상처난 것들의 향기

by 센터 posted Aug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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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집 난 기타
인천 부평공단에 있는 삼익악기에서 일하면서도 기타를 한번 사지 못했다. 명절엔 흠집 난 기타를 노동자들에게 반값에 판매하였는데 이때도 돈이 아까워 그렇게 갖고 싶던 기타를 사지 못했다. 그러다 작은 산재를 당하고 받은 얼마의 보상금에서 겨우 싼 기타를 하나 살 수 있었다. 누구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노래책 사다가 혼자 띵가띵가 치고,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형들을 피해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치고 하니 기타가 늘질 않아 그야말로 후루꾸 또는 막걸리 기타라 하는 정도에서 수십 년을 머물러 있다.
그래도 늘 좋은 기타 하나는 갖고 싶었다. 그게 그리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모으고 모아 결국 기타를 한 대 샀다. 군산에 있는 수제 공방에서 만든 국산 기타인데, 시중의 좋은 기타 중간 정도 가격에 소리가 엄청 이뻤다. 아주 무거운 합판 나무로 만든 하드케이스를 사서 조심조심 기타를 들고 왔다.
새 기타를 처음 들고 간 곳이 글쟁이들 1박 2일 모임이었다. 기타 자랑도 할 겸 기타를 꺼내 띵가띵가 하며 노래 몇 곡 부르는데, 처음 보는 손 아무개가 기타 좀 쳐 보자 해서 빌려 주었다. 꽤 잘 치는 솜씨였다. 한참 지난 뒤 아무래도 좀 이상해 기타를 돌려받아서 봤더니 이런, 새 기타에 피크 자국 흠집이! 난 거의 피크로 기타를 치지 않아서 흠집 날 일도 별로 없는데다 새 기타라 조심조심 하며 치던 터였다. 좀 불안했지만 기타를 빌려주었고 다행히 기타를 좀 치는 분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 인정사정없었다. 기타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 성질이 있는 그대로 올라왔다. 요즘 시대 이런 말 하면 뭐하겠지만, 옛날엔 목수가 마누라는 빌려줘도 연장은 안 빌려 준다고 했다.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선 다른 사람 악기를 만져보고 싶을 때 한번 만져 봐도 되는지 양해를 얻고도 정말 조심스레 다뤄보고 두 손으로 건네주는데, 악기를 친다는 새끼가 악기에 대한 기본 예의도 없이 처음 사서 꺼낸 기타에 흠집을 엄청 내 놨으니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당연지사. 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궈져도 사람들은 뭣 땜에 그러는지 아무도 몰랐다. 아! 성질나서 1박 2일 모임 즐길 생각도, 기타 사서 받아 안을 때 고이고이 아껴서 10년을 새것처럼 쓰자는 생각도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고, 그냥 기타 싸들고 집에 와 버렸다.



흠에서 돋아나는 힘
요즘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 집회에 가면 기타 치며 노래하는 류 변호사도 내게 와서 기타 좀 빌려 칠 수 있는지 묻고 내 기타로 노랠 한다. 출판노동자 고 아무개도 “형, 기타 좀 빌려 써도 되나요?” 하고 각종 투쟁 문화제에서 함께 한다. 그 외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기타 좀 치겠다며 빌려가는 등 내 기타가 투쟁 현장에선 동네 기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은 티브로드 케이블 비정규직 투쟁 현장에서 만든 노동자 합창단의 반주를 담당하여 가열차게 울려 퍼지고 있다.
에이, 어차피 흠집 난 기타. 더 편하게 사람들에게 건네질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애지중지 아끼자고 샀던 그 딱딱하고 무거운 하드케이스도 버릴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가벼운 가방 속에 넣어 등에 메고 다닌다.
상처 속에서 새살이 돋는다고 한다. 땅의 상처에 씨앗을 뿌리면 새순이 돋고, 고목나무 깊은 상처 속에 새들이 둥지를 틀어 사랑을 이루고, 거기서 알이 깨어난다. 세상의 모든 상처, 그 흠에서 새로운 힘이 돋아나는 것이다.
기타에 흠집이 난 대신, 그것이 지금은 확연하게 힘이 되어 있음을 느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성질내고 화내며 속으로 욕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기타에 난 흠집은 그때보다 열 배 백 배 많아져 있지만, 마음에 난 흠집은 지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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