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대책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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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줍는 방식으로 
모처럼의 연휴가 가고 있다
택배 상자를 차곡차곡 접어 내면서
나보다 더 자주 집에 오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과
감쪽같이 사라지는 상자들의 행방에 놀란다

노후대책을 세우려면 좀 아껴야지 않겠냐는 말을 주고
골목에는 당장 오후대책이 
더 급한 이가 있다는 대답을 돌려받는다 

아내는 큰그림을 그리는 사람 
소파와 리모컨과 홈쇼핑 채널이 
오후의 골목에 미치는 영향을 설파하며
끼니도 못 되는 책만 들이는 나를 방으로 돌려보낸다

구천 원을 주고 산 174그램의 시집들이 
빈 밥그릇처럼 가지런히 꽂힌 위에 또 엎어져 있는, 책장
먹지도 못하는 걸 자꾸 사온다는 아내의 핀잔을 
참 많이도 견뎠구나 위로 하다가
불현듯 오후를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 생각이 간다 
 
파지가 키로에 백 원이면 시집 한 권은 17원
삼백 명의 시인이 
오후 난민의 밥 한 그릇 해결하기 벅차다는 사실에
시 쓰는 일 참 부질없다 싶어서
내 시집 몇 권을 섞어 삼백 권 쯤 노끈으로 묶는다
시 쓰는 일도 밥이 된다는 듯이  

다시 아내가 다시 전화를 건다
질세라, 어느 시인에게는 또 미안한 일이지만
서명된 페이지는 오려서 비닐 파일에 넣고
그 위에 내 책을 또 몇 권 보태보는 오후가 저물어 간다


권상진.jpg 권상진 시인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복숭아문학상 대상, 경주문학상 수상.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눈물 이후》 한국작가회의 회원, 문학동인 Volume 회원


연대

by 센터 posted Mar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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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크레인.jpg

 

 

땀내가 유난히 시큼했다 뜨거운 여름보다 더 뜨겁게 달아오른 2011년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서 꽃 한 송이 말라가고 있었다 태풍이 불어 휘청거리는 크레인 위에서 꽃은 제 몸을 뜯어먹고 몹시도 흔들려 낙화 직전이었다 꽃잎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줄기는 말라비틀어질 무렵 난쟁이꽃들이 꽃잎을 떼어 엮은 다리를 타고 꽃은 현세로 내려왔다 형형색색 수천 송이 난쟁이꽃들이 물을 주고 그늘을 만들고 목숨을 나누었다 다시 꽃봉오리가 쑤욱 올라왔다 찬란하게 삶을 태우고 물들어가는 꽃 한 송이보다 작은 난쟁이꽃들이 모여 거대한 꽃밭을 이루었다 나비도 벌들도 날아들었다 흙으로 강으로 스며들어 더 척박한 곳에 뿌리를 뻗고 또 다른 꽃을 피울,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작은 난쟁이꽃들의 반란 찰나에 낙원이 지나가신다

 

글|시인 김사이

 


역사는 당신의 개인수첩이 아니다

by 센터 posted Dec 0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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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4대강을 1열로 줄세우겠다더니
박근혜는 역사를 1열로 줄세우겠다는구나
이명박은 용산에서 철거민을 불태워 죽이더니
박근혜는 아예 역사를 분서갱유하겠다는구나
이명박은 자원외교랍시고 20억을 해먹더니
박근혜는 역사 자체를 꿀꺽하겠다는구나
도대체 우리는 날강도들을 뽑는 건지
대통령을 뽑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역사가 당신의 가족사인가
역사가 당신 가족의 족보책인가
역사가 고작 새누리당의 국정홍보책인가
역사쿠데타로 어제를 독점하고
노동법쿠데타로 2000만 노동자들의 미래를
한 줌도 안 되는 재벌집단들에게 헌납하겠다는구나


세월호에서
단 한 사람의 생명도 구해주지 못한 무능 정권이
1년 반이 지나도록
25m 아래 세월호 하나도 인양하지 못하는 정권이
진실규명이나 탄압하는 정권이
역사의 키를 잡겠다고 하는구나
역사의 항로를 밝히겠다는구나


도대체 당신은 어떤
역사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국정원 대선 개입으로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을 불법탈취한 집단의 수괴일 뿐
도대체 당신은 어떤
사회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모든 노동자민중 시민들의
권리를 뺏아 자본에 헌납하는
좀비들의 우두머리일 뿐


아무래도 되게 맞아야겠구나
역사의 물줄기가 얼마나 거센지를 당해봐야겠구나
역사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숨가쁜 건지를 경험해봐야겠구나
역사의 갈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미로 속에 던져져봐야겠구나
역사의 철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맛봐야겠구나
역사의 평가가 얼마나 냉혹한 지를 맛봐야겠구나


아서라. 당신의 그 멍청한 수첩으로는
다 기록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아서라. 당신 같은 미성숙한 인격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서라. 당신 같은 닭대가리가
해석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아서라. 당신 같은 시대의 죄인이
손댈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끝내 꺾이지 않을 것이며
밟을수록 더욱 날카롭게 솟아올라
당신과 당신 주구들의
심장을 겨눌 것이다


송경동시인.jpg 송경동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못난 시인》(공저),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 《사람을 보라》(공저) 등이 있다.


엄지손가락

by 센터 posted Jul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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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2.jpg


엄지손가락


20년 전 보상금으로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
고춧대로 박아놓은 깃발 하나
덩그러니 마을 푯돌 앞에서 서성거린다
갈 데라고는  노인정밖에 없는 이씨 아저씨
한숨이 집까지 가 있다
그 많던 논밭 노름 바람으로 날려 보내고
엄지손가락 하나 끊고서야 멈췄는데
마누라도 날아간 자리에
개발인지 게발인지 신축부지 조성한다며
고향 밖으로 날아가란다
앞에서 막아도
뒤에서 밀어도
용달차가 울고
경운기 달달 거려도
보리 빤쓰 젖고
쌀 빤쓰 찢어져도
굴착기 돌아가는 소리 요란하게
벚꽃만 날린다
치켜들 엄지손가락 없이
주먹 쥐면 헛바람이 먼저 날아가는 자리
이씨 아저씨 바지춤 올리며
대낮 술주정이 한창이다





박경희.jpg

박경희

충남 보령 출생. 《시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벚꽃 문신》,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가 있음.



어느 쓸쓸한 주점에서

by 센터 posted Jan 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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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쓸쓸한 주점에서

 

박영선

 

 

노가다라 했다

빈 소주병 움켜쥔 사내의

벌건 눈에서 섬광이 번뜩인다

어른 대접을 받고 싶었던 늙은 노동자는

청년들을 향하여 거친

욕설을 내뱉는다

지금은 노가다를 하고 있지만

xx 나도 한때는 운동권이었다고 이 새끼들아!

너희들이 누구 덕에 학교 다니고 있는데

고래고래 지르는 목소리가 주점 유리창에 부딪친다

어디에도 토해내지 못한 말들이

보이는 출구마다 연처럼 걸린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술잔들은 이미 늙어버렸다

차가운 길바닥

떠밀려 나간 몸뚱이가

검은 포대자루처럼 웅크린다

한없이 누추하다

 

다시 허공이다

 

사진.jpg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광명에 살고 있다

시집 조금 더 사소해지는 사이분홍달이 떠오릅니다가 있다

시락’ 동인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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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것들

by 센터 posted Mar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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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2.jpg



알 수 없는 것들


김은경




오늘도 우리는 구름을 흠모하고
곧 탄로날 거짓말을 공모하네
그 수북한 라이터는 매일 어디로 사라지나
 
물은 누가 마셨나
펜은 어디 두었나
흡혈귀 같던 장미는 누가 썩게 놔뒀나
햇반은
라면은
어느 구석에 있다가
유통기한 지나서야 찔끔 나타나는가
 
이 많은 바람은 누구의 부역인가
태풍은 어디서 오는가
안남마을 사과나무 과실은 누가 달았나
자욱한 안개는 누구의 몫인가
남은 자의 유산인가 떠난 사람의 상흔인가
만장 같은 시신은 대체 누가
나무에 매달아 놓았나
혐의는 추억처럼 펄럭인다
눈부시게
뻔뻔하게


안녕

by 센터 posted Jun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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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는 멀어지고 그 사이 맨 얼굴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방에선 선풍기가 돌아가고 두루마리 화장지로 가끔 콧물을 닦으며 지나간 사람을 지나온 사람처
럼 불렀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애써 웃어주는 사람과 그 웃음 뒤의 막막함에 숨는 일로 잠시 웃어 보였으나

여름은 발에 걸리지 않아 부를 이름이 없고 수제비 같은 맨 얼굴은 수시로 뚝뚝 끊어졌다

간밤엔 기억에도 없는 일을 하였다가 기억에서 사라진 건 아닐까 마신 술에 속아 울면서

수용하였다 

간신히 입 다문 정든 수용소와 그 너머 안부까지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마시며 여름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도 속았다는 걸 모르는 거다 

빌려온 슬픔을 되돌려 보낼 수 있어 한여름은 없었다 

그래서 안녕

이돈형.jpg 이돈형 시인
2012년 《애지》로 작품 활동 시작. 제9회 김만중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우리는 낄낄거리다가》가 있다.

안개주의보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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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제국엔 국경선이 없다. 더 이상 도망칠 백성은 없으므로, 한번 갇히면 누구도 헤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연유로 제국의 문은 열려 있고 천지간은 적막으로 가득 떠 있다. 어느 새벽 자전거를 탄 이국의 사내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 적 있다.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고 차 있으나 차 있지 않은 그곳에서 꼼짝없이 여생을 갇혀 지내야 하는 일이 사람의 나라에선 외롭고 슬픈 일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흔하고 흔한 일, 아무도 자진 월경越境한 자의 행방은 수소문하지 않는다. 한번 삼키면 뱉을 줄 모르는 자본의 뱃속처럼 어둡고 컥컥한 길을 따라 그는 아직도 불 꺼진 공장 밖을 전전하고 있을까. 도道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듯 무無를 무라 하면 무가 아니듯 죽음을 죽음이라 말하지 않는 사람들, 저 속절없이 자욱한 안개숲에는 더 이상 가지를 내밀 수 없는 나무들이 있다. 혼자인 듯 아닌 듯 아스라이 하늘을 괴고 서 있는 저것들을 사람들은 전신주라 부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깃발 없는 만장輓章이라 부른다. 지난여름, 자전거를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말을 모른다.



이용헌.jpg

이용헌 시인은 광주(光州) 출생.

2007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있음.


시작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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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손으로 나오지 못하는 답답함이
우울로 켜켜이 쌓여 가고
머리맡을 지키던 시어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너는 
누구에게도 전염되지 않게 내 품에 있어주렴
너의 몸을 베고 나는 깊고 깊은 
잠에 들고 싶어

꿈이 풀려 허기가 지면
나는 비로소 책을 뜯어 
단어로 배를 채우고  
우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시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시가 있을까?
시에게는 진심이 있을까?
잠시, 
어떠한 질문을 시에게 할 수 있을까?

사흘을 굶고 앉아있어도
어제의 서글픈 나를 짓누르던 감정이
첫사랑처럼 지치지도 않고 
오늘 밤도 
심장을 누른다

사본 -김진.png 김진 시인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남작가회의 회원, 2007 경남작가 신인상

손님보다 알바생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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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가끔 야채곱창을 포장해오기도 했다
아빠는 가끔 나를 곱창집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곱창집 사장님은 아주 멋진 어른이었다
곱창도 정말 잘 구워줬고 서비스로 사이다도 줬다
교복이 예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사장님은 아주 친절했으므로 
사장님은 아주 상냥했으므로 
사장님은 교복 입은 나를 아주 칭찬했으므로 
나의 첫 곱창집 서빙 알바는 슬프지 않았다

사장님은 손님 자리 못 찾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주문 못 받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애가 멍청해가지고’라고 나의 교복을 무시했다
사장님은 ‘어서오세요’를 큰소리로 안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죽을 만큼 아파 잠깐 앉아있던 나의 생리통을 무시했다

나는 그대로 나인데 손님이 아닌 알바생이 되었을 뿐인데
사장님은 잘려나가는 곱창처럼 내 슬픔을 뭉텅뭉텅 잘랐다

실업자가 된 아빠는 다시 취직하면 곱창집에 가자고 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지 내가 곱창집 알바생이라는 것을

아빠 이제 곱창은 절대 먹지 않을 거야



유현아.jpg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생활

by 센터 posted Dec 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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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깃털).jpg



흰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
마당에 떨어진 깃털을 무겁게 주워든다


아름답다
죽고 없는 모든 것들과
고통스럽게 죽어간 이들이 겪었던


세계가 협소한 침대 안에 웅크리고 있다


잘 잠들고 잘 깨어나기 위해
사이좋게 살아가기 위해
근육과 뼈와 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다


잠과 삶
무신경과 죽음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바깥


어제까지 살아 있던 이들의 아침저녁과 다르지 않은
우리 대신 죽어간 모든 이들의 손발과 다르지 않은


내가 그들 대신 죽을 순간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잘 헤아리며 차분히 살아야지


글|시인  이진희



사카라

by 센터 posted Jul 0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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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라*

 

4500년 전의 문이 열리고 있어

죽은 자가 산 자를 방문하는 거지

 

해골을 보고 정중하게 

앗살라무 알라이쿰**

 

내 나이보다 4500살을 더 먹은

9살의 어린 주인 

 

죽음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아도 되는 일

 

쾡한 두 눈으로 전하는 무언의 말들

무슨 인사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하고 싶은 말이 많을수록 

침묵의 무게는 무거워지지    

 

무릎 앞에 수북이 쌓이는 흙모래 

 

 

뼈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했어 

 

이 아이가 기뻤는지

아니면 슬펐는지 

그것도 아니면 어디가 아팠는지

어느 들판에서 뛰어 놀았는지

 

뼈에 사연만 있고

행복에 대한 기록은 없었어

그것은 슬픈 모래알

 

둥근 두개골 아래

크고 작은 어둠의 구멍들 

 

나의 앞날을 알고 있다는 듯이

깊은 눈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지

 

* 이집트 나일강 연안에 있는 고분 마을  

** 아랍어로 ‘안녕하세요. 평화가 함께 하길’

 

황사라.jpg

 

 

 

 

 

 

 

 

 

 

 

 

 

 

 

 

 

황사라 시인 

2023년 전북일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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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탄생

by 센터 posted Apr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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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쓰러지고 나면 밤이 찾아왔다. 미싱이 돌고 도는 동안 밤의 거리가 얼어붙었다.
여성들은 향수 대신 먼지를 뒤집어썼다. 마른기침 뱉는 꿈이 멈추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 모든 걸 불과 함께 태워 올린 이가 있었다. 눈을 뜨면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양안다.jpg 양안다 시인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작은 미래의 책》,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창작동인 ‘뿔’로 활동 중.


빙점 아래

by 센터 posted Dec 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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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에 들어가는 것은 체온을 잃는 일이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살얼음이 끼었다 달력의 날짜들은 빙점 밑에서 동상을 

입었고 나는 그 방의 둘레를 상자라고 불렀다 언 뺨이 터지면 

불이 켜지는 어둠이었다 커튼 대신 쳐 놓은 런닝셔츠 사이에 

관을 그대로 세워 놓은 것 같은 냉장고가 있었다 빈 그릇들은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떨었고 자주 주저앉았다 불을 

얼어붙게 만드는 둘레였다 없는 두부이고 숫자가 사라진 달력 

이었다 냉기가 차오르는 방이 사람 하나를 저장하고 있었다

 

 

 

최세라.jpg

최세라 시인

2011년 계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콜센터 유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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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 세월호여!

by 센터 posted Jul 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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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jpg



너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자본에 혹사당한 이 땅의 노동자

자본과 정권과 관료의 결탁으로

바다에 수장된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장, 특근, 휴일노동 수난을 당하듯

너도 어찌할 수가 없었구나

 

20년이 한계였던 너의 노동력은

자본과 정권과 관료에 의해

30년으로 늘어나는 수난을 당했지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증축이라는 수난을 당했지

 

택배 특수고용 노동자가

할당량을 무리하게 배정받듯

네 몸에 과적된 화물들

네가 감당해야 할 짐은

너무나 무겁고 버거웠다

 

병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제때에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하듯

고장 난 너의 부품들 또한

제때에 제대로 정비를 받지 못했다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최소한의 생계비마저 착취당하듯

노쇠한 네가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평형수마저 착취당했다

 

이 땅의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무소불위 자본에 착취당하며

사랑하는 가족 가슴에 품고

막막한 노동판에서 병들어 죽어가듯

망망한 바다에 침몰된 세월호여!

떠안은 짐 힘이 부쳐

사랑하는 꽃다운 어린생명들

가슴에 품고

바다에 수장된 세월호여!

 

너는

바다에 수장된 비정규직 노동자!

다시, 떠올라라

분노하듯 떠오르고

떠오르듯 분노하라

그리하여

푸른 새벽바다 파도 헤치고

새날을 여는 붉디붉은 태양처럼

새 세상을 열자

 

 

 

글|시인 정세훈

 



부서진 사월

by 센터 posted Oct 0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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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사월


시계침에 매달린 인간들이 땅을 보며 걷는다
어젯밤에 썼던 콘돔은 튼튼한 것이었을까
일본 원전을 덮어씌운 콘크리트는 안전한 것일까


어제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이 오늘은 당신을 모른 체하고 지나간다
바닥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포개졌다가 흩어진다
잠시, 괴물의 형상이 되었다가 딱딱한 혼자가 된다


빈혈에 시달리는 가로수들
나뭇잎의 뒷면에서 어둠이 뚝뚝 떨어져
나무 밑동에 고인다


저 멀리서 온통 눈물로 젖은 얼굴이 걸어온다
그의 자식이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의사에게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은 것일까
그는 자신의 눈앞에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불행들을 손으로 걷어내려는 듯
양팔을 휘저으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눈을 감았다
그를 붙잡고
내가 같이 울어줄까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를 껴안으면 그는 물이 되어 쏟아질 것 같았다


눈을 뜨니 구명정 같은 구름이 떼를 지어 흘러가고 있다
나는 햇살의 뼈를 만져본다
뼛가루 같은 햇살이 내 손바닥을 데웠다
죽어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나뭇잎이 떨고 있다


이 지상에 파견된 봄은 갈 곳을 몰라 서성거린다
가운데부터 검게 시드는 목련 잎에는 자신의 몸에 권총을 쏜 것 같은
탄흔이 남아 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붕대를 감고 또 하루를 건너가겠지


눈을 감으면 수면을 뚫고 수많은 소금 인형이 걸어나온다
데운 조약돌로 눈두덩을 지져도 사라지지 않는



축소신철규.JPG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부서진 사월〉은  계간《시로 여는 세상》
2014년 가을호에 발표됨.


봄날, 그럼에도

by 센터 posted Jun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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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꽃 보러 가자 했더니

 

그 꽃 지면

다른 꽃 핀다고 했다

 

다시는 못 만날 인연일까봐

마음이 아팠다

 

텅 빈 귀를 열어둔 채  

지나간 봄, 

꽃무덤이 가득했다

 

흔들리는 것들은

흔들린 곳에서 

마음을 다 쏟고 말았나

 

붉은 꽃물이 흐르는 길 위에서

나는 또 하루를 더 살고

너에게서 하루 더 멀어진다 

 

박주하.jpg

박주하 시인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996년 《불교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항생제를 먹은 오후》 《숨은 연못》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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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는 좋은 것입니까?

by 센터 posted Jun 3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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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는 좋은 것입니까?*


노란빛이 숲을 이루었네
손톱만한 노란 꽃잎들이 관계처럼 촘촘하네
너는 어째서 그렇게 환하게 피어 있을까
다가서면 한순간에 사라질까 바라만 보네
망각과 기억 그 어디쯤이 따끔거리네


권력이 권력으로 안전장치를 강화했다네
사람들에게 보호의 단추를 달아주었다네
그물처럼 얽혀있어도 단추 하나로 이어지는
끝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네
열정적으로 보호하는 바람에 숨이 막히네
사육당한 삶이 부풀어 핏줄들이 터지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생명이여
무고하게 짓밟혀진 사랑이여
빛깔들이 색을 잃어가고 어두워지네
안과 밖이 다르지 않는 고장 난 시간
보호가 일상의 폭력을 재구성하고 있네



* 영화 <로봇, 소리>에서 로봇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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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이 시인은
2002년 계간 《시평》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 있음.


밥은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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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에 호박 오이 무생채 무쳐놨으니까 대접에 넣고 비벼먹어 고추장은 베
란다에 있고 참기름은 가스레인지 찬장에 있어 맨날 빵 같은 거 먹지 말구 된장
국은 쉬었는지 확인 한 번 해보고 먹어 오늘은 어디 가니 일찍 들어와 엄만 새벽
에 나가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했다
   엄마는 집에 없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이 집에 있고
   시위대가 톨게이트 옥상을 점거 중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퇴근했다
   올라간 지 한 달째라고 했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잤다


이종민.jpg 이종민 시인

                                                                2015년 《문학사상》 등단


바닥은 쉽사리 바닥을 놓아주지 않는다

by 센터 posted Aug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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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지하 계단
오르내리는 인파들 틈에서
걸레를 든 손
바닥이 가만히
발걸음소리를 새겨듣는다


이젠 바닥에도 정이 드는지
한몸이 되어버린 바닥이
주름을 비춰준다


엎드려 살았던 몸을 닦듯
수없이 바닥이 바닥을 끌어안는다


무릎을 구부릴 때
바닥의 눈과 귀가 숨을 받아낸다


지하철역 바닥을 닦는 늙은 손등 위로
전동차가 덜컹거리며 스쳐간다


이 바닥을 떠나면
올라가는 계단은 없다





정지윤.jpg 

정지윤 | 2015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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