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집*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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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1.jpg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까치조차 짓지 않는
30m, 40m 높이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땅 위에서 외치는 소리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 들리지 않아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르는 일이야 늘 이어지고 있지만
더 높이 오르면 소리 전할 수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날개도 없는 사람들
까치집 보다 높은 곳에
이상한 집을 짓는다



* 인권. 통권 78호 한금선 님의 시선에서 인용함.
* 2013년 1월 4일 전주종합운동장,  천일교통 해고노동자 김재주 분회장이 철탑 농성을 함.


축소이상호.jpg

이상호 | 창원 출생. 1999년 제11회 ‘들불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개미집》이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5년 《깐다》 등을 펴냈다.
‘객토문학동인’,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마네킹의 오장육부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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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소리가 이상하다
곡은 없고 숨소리만 있다
도레인지 미파인지 
불고 들이마시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맹인이 아니다
두 눈 멀쩡하게 뜨고
바구니를 들고 있다
멀쩡함이 멀쩡함에게 구걸하는 증상
속이 곯은 거다
외상 없는 내상
전화번호부 같은 것으로 맞았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암보험 상담 전화를 걸던 그녀는
말기암이었다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던 건
그녀의 오장육부가 위(胃)밖에 없었기 때문
배고픔이 모든 장기를 집어삼켰기 때문
합법적인 보이스피싱이라며
아는 사람에겐 권하지 않는다는 
일말의 양심이 악성종양이었을까
수술대에 오르기도 전에
그녀는 제거됐다
집도의는 그녀를 뽑은 사람이었다
회사는 멀쩡했다


이장근.jpg
이장근 시인
1971년 경북 의성 출생.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시), 2010년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동시)으로 등단.
시집《꿘투》, 동시집《바다는 왜 바다일까?》 《칠판 볶음밥》, 청소년 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나는 지금 꽃이다》,
《파울볼은 없다》 등

폭설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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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다 실비식당 뒷마당 
개밥그릇 덮으며 눈 내린다

인천역 화물열차의 
검은 지붕 위에 하얀 눈 내린다 

바다로 나가는 북성포구길 
마저 지우며 인천항 8부두에
함박눈 내린다

하늘과 땅 사이 너와 나 사이 
모든 경계를 지우며 온종일 눈 내린다

사람이 길을 버리고 
길이 사람을 버리는 저녁

흰 눈을 고봉으로 퍼먹은 저녁이 
하얗게 어두워지고 있다

이권.jpg
이권 시인
2014년 《시에티카》로 등단. 철도 노동자였으며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아버지의 마술》, 《꽃꿈을 꾸다》가 있다.

일몰의 기억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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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교 위를 지나면 알 것 같다 하루가 왜 저무는지 깜깜한 밤 인생의 등불이 어떻게 켜지는지 검푸른 물 위에 어둠 풀어질 때 사람들은 깊은 속도의 그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노을 지면 산비탈에 내려와 조그만 집과 창틀을 그러안는 그리움의 색깔들

흘러가는 건 물결만이 아니다 
풍경도 세월도 
사람과 더불어 흘러간다

한때 가슴을 불 인두로 지지던 젊은 날의 생채기도 쓰라린 눈물 훔치며 인파를 헤치던 열정의 숲도 이젠 더 이상 넘실거리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을 뿐 두꺼운 얼음 속 실개천이 흐르듯 살갗 아래 실핏줄이 흐르듯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저 혼자 흐르고 또 흐를 것이다


.박선욱.jpg
박선욱 시인
제1회 실천문학 신인 공모에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때 이후》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 《회색빛 베어지다》 등이 있고, 
편저로 《한국민중문학선Ⅰ 노동시편》 《한국민중문학선Ⅱ 농민시편》, 
청소년 평전 《채광석 : 사랑은 어느 구비에서》 《윤이상 :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본격 평전으로 《윤이상 : 거장의 귀환》 등이 다수 있다.





안개주의보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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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제국엔 국경선이 없다. 더 이상 도망칠 백성은 없으므로, 한번 갇히면 누구도 헤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연유로 제국의 문은 열려 있고 천지간은 적막으로 가득 떠 있다. 어느 새벽 자전거를 탄 이국의 사내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 적 있다.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고 차 있으나 차 있지 않은 그곳에서 꼼짝없이 여생을 갇혀 지내야 하는 일이 사람의 나라에선 외롭고 슬픈 일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흔하고 흔한 일, 아무도 자진 월경越境한 자의 행방은 수소문하지 않는다. 한번 삼키면 뱉을 줄 모르는 자본의 뱃속처럼 어둡고 컥컥한 길을 따라 그는 아직도 불 꺼진 공장 밖을 전전하고 있을까. 도道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듯 무無를 무라 하면 무가 아니듯 죽음을 죽음이라 말하지 않는 사람들, 저 속절없이 자욱한 안개숲에는 더 이상 가지를 내밀 수 없는 나무들이 있다. 혼자인 듯 아닌 듯 아스라이 하늘을 괴고 서 있는 저것들을 사람들은 전신주라 부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깃발 없는 만장輓章이라 부른다. 지난여름, 자전거를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말을 모른다.



이용헌.jpg

이용헌 시인은 광주(光州) 출생.

2007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있음.


손님보다 알바생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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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가끔 야채곱창을 포장해오기도 했다
아빠는 가끔 나를 곱창집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곱창집 사장님은 아주 멋진 어른이었다
곱창도 정말 잘 구워줬고 서비스로 사이다도 줬다
교복이 예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사장님은 아주 친절했으므로 
사장님은 아주 상냥했으므로 
사장님은 교복 입은 나를 아주 칭찬했으므로 
나의 첫 곱창집 서빙 알바는 슬프지 않았다

사장님은 손님 자리 못 찾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주문 못 받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애가 멍청해가지고’라고 나의 교복을 무시했다
사장님은 ‘어서오세요’를 큰소리로 안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은 죽을 만큼 아파 잠깐 앉아있던 나의 생리통을 무시했다

나는 그대로 나인데 손님이 아닌 알바생이 되었을 뿐인데
사장님은 잘려나가는 곱창처럼 내 슬픔을 뭉텅뭉텅 잘랐다

실업자가 된 아빠는 다시 취직하면 곱창집에 가자고 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지 내가 곱창집 알바생이라는 것을

아빠 이제 곱창은 절대 먹지 않을 거야



유현아.jpg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공장 빙하기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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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공장이 화석이 되어 지구 곳곳에서 발견될 때
새파랗게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
여기가 공장이 있던 자리라고 유일하게 증명해줄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이 빙하기(氷河期)를 견디고 견뎌 
지구의 역사가 되는
버림받은 노동자들 가슴을 심어야겠네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표성배 시인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95년 제 6회 ‘마창노련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침 햇살이 그립다》, 《저 겨울산 너머에는》, 《개나리 꽃눈》, 《공장은 안녕하다》, 《기계라도 따뜻하게》, 《기찬 날》, 《은근히 즐거운》 등이 있고, 시산문집으로 《미안하다》가 있다.

적벽에서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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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가려진들 달 아니겠느냐
바람에 흔들린들 나무 아니겠느냐
봄꽃도
되돌아보면
피멍 같은 아픔인 것을

이 가슴 무너진들 땅이야 꺼지겠느냐
애간장 타들어간들 매듭이야 없겠느냐
이 밤도
새우다 보면
적벽 쪼아대는 소리 들리는 것을

소한 대한 눈보라친들 새봄이야 없겠느냐
땡볕 더위 쏟아진들 그늘이야 없겠느냐
아픔도
깊어지다 보면
점멸하는 와등인 것을



최기종.jpg
최기종 시인
1956년 전북 부안 출생.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지 《대통령의 얼굴이 또 바뀌면》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만다라화》《어머니 나라》《나쁜 사과》《학교에는 고래가 산다》《슬픔아 놀자》가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며 전남민예총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환희

by 센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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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가고
눈이 내렸다

저녁에 공장으로 들어가 
아침이면 나오는 사람이

모두 똑같이 
생긴 얼굴로 포장된 
개체를 떠나보냈다

사람이라고 부르지 말 것
경고를 받았으나 
저녁에 공장으로 들어가 
아침이면 나오는 사람은 
사람들 몰래 
개체의 이목구비에 점을 찍었다
축복을 내렸다 

겨울새는 흰 잎을 물고와
공장의 굴뚝으로 수북수북 떨어뜨리
밤새

죽은 사람처럼 
흰 연기가  
옥상에서
사람과 똑같은 것을 대량생산하고도
저녁마다 맴도는 
세계적인 사람이
연기를 내뿜으며 올려다보는 곳에서
해가 떠오르고 

저녁에 공장으로 들어가 
아침이면 나오는 사람이 
나왔다 

김현.jpg

김현 시인
일하며 쓰는 사람.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아무튼, 스웨터》, 《질문 있습니다》가 있다.

당신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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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통기간이 끝나가는 동안 
거미줄같이 엉킨 골목을 걸으며 한숨을 쉬는 일
매일 다른 구인 전단지를 붙이는 일
안도의 시간을 타고 집으로 가는 일
그런 일들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밀폐된 시간 속에서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전단지 위에 덧붙여진 또 다른 전단지처럼 겹겹이 쌓이는 얼굴들 고향에 가서 감나무를 심자고 했던 이제는 떠나간 유통기간이 지난 얼굴들
얼굴들이 떠나도 새로운 날짜를 새긴 얼굴들이 금방 자리를 채웠다 몸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얼굴들은 나가고 들어왔다 모두가 흔들리는 외줄 위에서 한발 한발 내딛으며 하루를 열고 닫았다 

나의 기간도 연장전이 끝난 경기처럼 언제 울릴지 모를 호루라기 소리를 기다리며 고요하게 흐르는 일 속에서 채워져 간다  

또 하나의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신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김진.jpg
김진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남작가회의 회원. 
2007 경남작가 신인상.

50년의 판타지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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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던 아버지는 판타지를 꿈꿨다
상상력을 사줄 수호신을 기다렸다, 다만 집에서


엄마가 공장으로 일하러 나간 사이 하나뿐인 방을 판타지 소굴로 만들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방바닥에 배를 깔고 슬금슬금 시를 썼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낭만이 싫었다 하나뿐이었던 방도 싫었고 하나뿐이었던 마루도 싫었고 없는 사람처럼 일만 한 하나뿐인 엄마도 싫었다


나풀나풀 가벼운 아버지는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가면 돈 나간다고 돈은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신념에 가득 차 있었는데 1년 중 하루는 정성스레 양복을 다려 입고 밖으로 나가 저녁에 들어왔다 한 손엔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는데 소고기 반근과 미역 한 움큼이었다 철야하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쌀을 안치고 소고기 미역국을 끓였다 나는 그때가 가장판타지적인 공간에 있었다고 기억한다


철야를 하고 온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욕했는데 1년의 그 하루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상 위 소고기 미역국에 밥을 말아 코 박고 먹기만 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기타를 쳤고 나는 쌀밥의 냄새와 소고기 미역국의 향긋함에 미움이 사라지는 하루였다


팔순의 아버지는 여전히 일 년 중 하루는 소고기 반근과 미역을 샀으며

팔순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 원망을 1년 중 단 하루만 빼고 주구장창 한다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하루의 판타지를 50년 째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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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음



오후대책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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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줍는 방식으로 
모처럼의 연휴가 가고 있다
택배 상자를 차곡차곡 접어 내면서
나보다 더 자주 집에 오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과
감쪽같이 사라지는 상자들의 행방에 놀란다

노후대책을 세우려면 좀 아껴야지 않겠냐는 말을 주고
골목에는 당장 오후대책이 
더 급한 이가 있다는 대답을 돌려받는다 

아내는 큰그림을 그리는 사람 
소파와 리모컨과 홈쇼핑 채널이 
오후의 골목에 미치는 영향을 설파하며
끼니도 못 되는 책만 들이는 나를 방으로 돌려보낸다

구천 원을 주고 산 174그램의 시집들이 
빈 밥그릇처럼 가지런히 꽂힌 위에 또 엎어져 있는, 책장
먹지도 못하는 걸 자꾸 사온다는 아내의 핀잔을 
참 많이도 견뎠구나 위로 하다가
불현듯 오후를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 생각이 간다 
 
파지가 키로에 백 원이면 시집 한 권은 17원
삼백 명의 시인이 
오후 난민의 밥 한 그릇 해결하기 벅차다는 사실에
시 쓰는 일 참 부질없다 싶어서
내 시집 몇 권을 섞어 삼백 권 쯤 노끈으로 묶는다
시 쓰는 일도 밥이 된다는 듯이  

다시 아내가 다시 전화를 건다
질세라, 어느 시인에게는 또 미안한 일이지만
서명된 페이지는 오려서 비닐 파일에 넣고
그 위에 내 책을 또 몇 권 보태보는 오후가 저물어 간다


권상진.jpg 권상진 시인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복숭아문학상 대상, 경주문학상 수상.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눈물 이후》 한국작가회의 회원, 문학동인 Volume 회원


밥은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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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에 호박 오이 무생채 무쳐놨으니까 대접에 넣고 비벼먹어 고추장은 베
란다에 있고 참기름은 가스레인지 찬장에 있어 맨날 빵 같은 거 먹지 말구 된장
국은 쉬었는지 확인 한 번 해보고 먹어 오늘은 어디 가니 일찍 들어와 엄만 새벽
에 나가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했다
   엄마는 집에 없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이 집에 있고
   시위대가 톨게이트 옥상을 점거 중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퇴근했다
   올라간 지 한 달째라고 했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잤다


이종민.jpg 이종민 시인

                                                                2015년 《문학사상》 등단


공장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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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감귤밭에서 일하다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요 하지만 울지는 않았어요 작은언니 중학교 졸업식날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구나, 말하며 울었지만요 
  아버지는 내일도 다시 입을 작업복을 공장에 걸라고 하셨지요 새 옷과 겹치지 말아야 하는 먼지 묻은 옷이 걸려 있던, 공장은 벽에 못 하나를 박아 만든 아버지 혼자만의 장롱이었지요

  바람이 지나가는 구멍을 가진 제주 돌담은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들은 허기진 구멍을 가지고 있어요 굶주리면 흙이라도 풀이라도 입 속에 넣어야지요 허기처럼 쉽게 사라지는 우리들은 새 달력에 죽음을 먼저 기록하지요

  새 달력을 앞에 두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새 달력에 나의 공장이 두 개, 심장처럼 두 개, 심장에 박힌 못에 걸어 둘 민호와 고래,

  민호는 음료수 공장에서 사라진 학생, 태평양 고래들도 해파리 대신 비닐을 삼키며 사라져 갑니다 무릎을 꿇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열아홉 민호는 젊기도 전에 사라졌고,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고래들도 텅 빈 뱃속 채우다 사라져 갑니다 

  민호가 없는 텅 빈 하루를, 허기로 가득 찬 고래 배를, 손가락 하나 없는 손으로 단추를 채워 나갔을 아버지는 몇 번이나 울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다시 새 달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두 개의 울음을 공장에 겁니다 

  새 달력에는 이미 무릎을 꿇고 박은 투명한 두 개의 못이 박혀 있으니까요


*선반 같은 것이 없는 작은 벽에 못을 박아 옷을 걸어두게 한 자리를 제주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공장이라 불렀다. 그것은 허공에 둔 장롱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김신숙.jpg 김신숙 시인
2012년 《제주작가》, 2015년 《발견》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발간.

근로하는 엄마 노동하는 삼촌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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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근로자의 날이라서 쉬고
엄마는 노동자의 날이라서 쉬고


삼촌은 회사 안 가서 좋다고 하고
엄마는 회사 잘릴 것 같다고 하고


삼촌은 굴뚝이 있었다는 옛날 목욕탕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굴뚝에 여전히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삼촌은 누나 일 아니니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라 하고
엄마는 내 일 될 수 있으니까 관심 가져야 한다고 하고


난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나 노동자의 날이나 상관없다
엄마나 삼촌이나 저런 소리 안 하고
삼촌이나 엄마나 잘릴 걱정 없이
편안히 쉬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시끄러워 죽겠다


유현아.jpg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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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이 시인

두통 없는 하루가 지나가요
멀미 나지 않는 하루가 저물어요
몸살 없이 무사한 오늘이에요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라 믿었어요
오늘이 지나도 내일은 아니었어요
오늘 하루만큼 죽어간 나의 오늘이었어요
나를 죽이면서 날름 삼킨 오늘이에요

농담이라고 하니 몸살이 났어요
별것도 아닌데 예민해서 더 예민해졌어요
오늘이 잘릴까 봐 두려웠어요

나 없는 나의 하루하루 일상이에요
야금야금 파먹는 미세먼지처럼 달라붙었어요

억누르고 침묵했던 오늘이 길이 되었어요
냄새 난다고 버리지 못하게 한 생리대를 다시 가방에 쌌어요 
거식과 폭식이 앞뒤로 치고받으며 슬픔을 외면해요
수행하듯 삭였던 침묵은 진짜 인형이 되었어요
오늘이 쌓은 그 인형의 길을 소리 없이 뒤따르고 있어요
그래요 중독된 날들이에요

나를 찾아오는 기억이 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나는 지하방 너머 어슴푸레한 달빛처럼 희미해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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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이 시인_2002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반성하다 그만둔 날》,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가 있음.

해고

by 센터 posted Apr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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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시인

우리는 철탑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개 없이도 하늘을 밟고 살아요
등을 돌리면 아무나 와서 내 등을 밀어버릴 것 같습니다
엉겁결에 그어진 하늘선을 밟고 죽을 것 같습니다

퇴근길 창문에서 서녘의 새떼를 자주 봅니다
작은 머리통들이 느닷없이 날아가 나란히 사라지는 걸
왜 자꾸 보게 되는 걸까요?

지평선에서 새들이 멀어지면 깃털이 빠진다고 해요
아주 사라지지 못하는 거죠

내 몸으로 새가 들어온 날
영하의 날씨에도 창문을 반쯤 열어둡니다
하늘 한쪽 해고당한 새들만 모여 사는 곳이 있다지요?
고공농성 간호사가 복직을 약속 받고 털모자를 쓴 친구를 끌어안고 웁니다
기쁨은 아닙니다
몸 안의 새를 내보내는 일은 기쁨의 영역이 아니죠


송전탑과
크레인에서 사는 사람들
몸 안에 들어온 새를 내보내려고 애를 씁니다
중력을 얻으려고 환약을 삼킵니다
경험 많고 침묵이 깊은 새들입니다

갓 날개 달은 새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날
별자리는 어둠에게 눈멀지 말라고 촛불 하나씩 쥐어 줬다지요
우리 언제쯤 상공에 맺히는 아침이 다시 오겠습니까?


이소연2.jpg


안녕

by 센터 posted Jun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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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는 멀어지고 그 사이 맨 얼굴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방에선 선풍기가 돌아가고 두루마리 화장지로 가끔 콧물을 닦으며 지나간 사람을 지나온 사람처
럼 불렀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애써 웃어주는 사람과 그 웃음 뒤의 막막함에 숨는 일로 잠시 웃어 보였으나

여름은 발에 걸리지 않아 부를 이름이 없고 수제비 같은 맨 얼굴은 수시로 뚝뚝 끊어졌다

간밤엔 기억에도 없는 일을 하였다가 기억에서 사라진 건 아닐까 마신 술에 속아 울면서

수용하였다 

간신히 입 다문 정든 수용소와 그 너머 안부까지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마시며 여름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도 속았다는 걸 모르는 거다 

빌려온 슬픔을 되돌려 보낼 수 있어 한여름은 없었다 

그래서 안녕

이돈형.jpg 이돈형 시인
2012년 《애지》로 작품 활동 시작. 제9회 김만중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우리는 낄낄거리다가》가 있다.

말의 힘

by 센터 posted Aug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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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 닿아 반짝이는 칼끝 마주치면
반짝이는 그 칼끝 닮고 싶었다

미풍에 부드럽게 떠는 깃털 발견하면
부드러운 그 깃털 닮고 싶었다

자주 
손과 발이 차디찼다 몸의 온기
칼끝과 깃털에 온통 빼앗긴 것처럼
마음이 텅 비었다 약탈하도록 
칼끝 햇빛과 깃털을 건드리고 간 바람에게
빗장을 열어둔 것처럼

나 아닌 것을 닮으려고 했다
나 아닌 것이라면 
대체로 아름답고 부드럽다고 여겨져

온기도 영혼도 없던 나에게도
아름답다고 얘기해 준 이가 있었으나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오래도록

여전히 손발이 차가워질 때가 있지만
이제는 손발이 차가워질 때면 스스로에게 
크게 소리 내어 

아름답다고 말해준다

이진희.jpg 이진희 시인
2006년 계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으로 《실비아 수수께끼》, 《페이크》가 있다.

우기의 나라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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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처럼 비가 흐를 때

사람들이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핥고 서로에게 키스하던

때, 덩굴풀이 무성하게

담장을 허물던 날들에


빗방울을 모아 접시에 두고

여름의 짧은 밤을

춤추며 보내던 시절에


비를 말려 얻은 색으로

연인의 이마에

혈관의 무늬를 탁본하던 꿈결에


잡아먹힌 빛들이 흐르고

어둡다 여전히 비는 가볍게

빛나며 나는데


목덜미의 흰빛을 물고 비가 툭,


사라지는 비

깔깔 웃으며 가버리는 비


사람 잡아먹는 비에 홀렸대

소중한 걸 묻어둔 곳을 찾지 못해서

맹렬하게 건조한 우기를

그저 견디고만 있는 거래


범람하지 않는 비를 골몰한다

눈이 타버릴 때까지

좋았던 날의 돌을 움켜쥐고


때가 오면 내리칠 것이다


또 한 명이 쓰러진다 어스름이 짙어진다


기도를 잊고 텅 빌 것이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주마등 속에 산다

비가 속살거리는 옛 기억에 들려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


또 한 명이 쓰러진다 비가 툭,

주검의 관절마다 비가 툭,


빗방울만 환한 나라에서

비에 갇힌 꿈의 군락에서


오로지 비만,

사랑스럽다


이용임.jpg 이용임 시인

2007년 한국일보 시 부문 당선. 시집 《안개주의보》 《시는 휴일도 없이》, 산문집 《당신을 기억하는 슬픈 버릇이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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