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도 없이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까치조차 짓지 않는
30m, 40m 높이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땅 위에서 외치는 소리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 들리지 않아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르는 일이야 늘 이어지고 있지만
더 높이 오르면 소리 전할 수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날개도 없는 사람들
까치집 보다 높은 곳에
이상한 집을 짓는다
* 인권. 통권 78호 한금선 님의 시선에서 인용함.
* 2013년 1월 4일 전주종합운동장, 천일교통 해고노동자 김재주 분회장이 철탑 농성을 함.
이상호 | 창원 출생. 1999년 제11회 ‘들불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개미집》이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5년 《깐다》 등을 펴냈다.
‘객토문학동인’,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안개의 제국엔 국경선이 없다. 더 이상 도망칠 백성은 없으므로, 한번 갇히면 누구도 헤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연유로 제국의 문은 열려 있고 천지간은 적막으로 가득 떠 있다. 어느 새벽 자전거를 탄 이국의 사내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 적 있다.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고 차 있으나 차 있지 않은 그곳에서 꼼짝없이 여생을 갇혀 지내야 하는 일이 사람의 나라에선 외롭고 슬픈 일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흔하고 흔한 일, 아무도 자진 월경越境한 자의 행방은 수소문하지 않는다. 한번 삼키면 뱉을 줄 모르는 자본의 뱃속처럼 어둡고 컥컥한 길을 따라 그는 아직도 불 꺼진 공장 밖을 전전하고 있을까. 도道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듯 무無를 무라 하면 무가 아니듯 죽음을 죽음이라 말하지 않는 사람들, 저 속절없이 자욱한 안개숲에는 더 이상 가지를 내밀 수 없는 나무들이 있다. 혼자인 듯 아닌 듯 아스라이 하늘을 괴고 서 있는 저것들을 사람들은 전신주라 부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깃발 없는 만장輓章이라 부른다. 지난여름, 자전거를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말을 모른다.
이용헌 시인은 광주(光州) 출생.
2007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있음.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대책 없던 아버지는 판타지를 꿈꿨다
상상력을 사줄 수호신을 기다렸다, 다만 집에서
엄마가 공장으로 일하러 나간 사이 하나뿐인 방을 판타지 소굴로 만들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방바닥에 배를 깔고 슬금슬금 시를 썼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낭만이 싫었다 하나뿐이었던 방도 싫었고 하나뿐이었던 마루도 싫었고 없는 사람처럼 일만 한 하나뿐인 엄마도 싫었다
나풀나풀 가벼운 아버지는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가면 돈 나간다고 돈은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신념에 가득 차 있었는데 1년 중 하루는 정성스레 양복을 다려 입고 밖으로 나가 저녁에 들어왔다 한 손엔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는데 소고기 반근과 미역 한 움큼이었다 철야하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쌀을 안치고 소고기 미역국을 끓였다 나는 그때가 가장판타지적인 공간에 있었다고 기억한다
철야를 하고 온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욕했는데 1년의 그 하루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상 위 소고기 미역국에 밥을 말아 코 박고 먹기만 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기타를 쳤고 나는 쌀밥의 냄새와 소고기 미역국의 향긋함에 미움이 사라지는 하루였다
팔순의 아버지는 여전히 일 년 중 하루는 소고기 반근과 미역을 샀으며
팔순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 원망을 1년 중 단 하루만 빼고 주구장창 한다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하루의 판타지를 50년 째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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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음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눈물 이후》 한국작가회의 회원, 문학동인 Volume 회원
냉장고에 호박 오이 무생채 무쳐놨으니까 대접에 넣고 비벼먹어 고추장은 베
란다에 있고 참기름은 가스레인지 찬장에 있어 맨날 빵 같은 거 먹지 말구 된장
국은 쉬었는지 확인 한 번 해보고 먹어 오늘은 어디 가니 일찍 들어와 엄만 새벽
에 나가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했다
엄마는 집에 없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이 집에 있고
시위대가 톨게이트 옥상을 점거 중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퇴근했다
올라간 지 한 달째라고 했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잤다
이종민 시인
2015년 《문학사상》 등단
삼촌은 근로자의 날이라서 쉬고
엄마는 노동자의 날이라서 쉬고
삼촌은 회사 안 가서 좋다고 하고
엄마는 회사 잘릴 것 같다고 하고
삼촌은 굴뚝이 있었다는 옛날 목욕탕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굴뚝에 여전히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삼촌은 누나 일 아니니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라 하고
엄마는 내 일 될 수 있으니까 관심 가져야 한다고 하고
난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나 노동자의 날이나 상관없다
엄마나 삼촌이나 저런 소리 안 하고
삼촌이나 엄마나 잘릴 걱정 없이
편안히 쉬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시끄러워 죽겠다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꿀처럼 비가 흐를 때
사람들이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핥고 서로에게 키스하던
때, 덩굴풀이 무성하게
담장을 허물던 날들에
빗방울을 모아 접시에 두고
여름의 짧은 밤을
춤추며 보내던 시절에
비를 말려 얻은 색으로
연인의 이마에
혈관의 무늬를 탁본하던 꿈결에
잡아먹힌 빛들이 흐르고
어둡다 여전히 비는 가볍게
빛나며 나는데
목덜미의 흰빛을 물고 비가 툭,
사라지는 비
깔깔 웃으며 가버리는 비
사람 잡아먹는 비에 홀렸대
소중한 걸 묻어둔 곳을 찾지 못해서
맹렬하게 건조한 우기를
그저 견디고만 있는 거래
범람하지 않는 비를 골몰한다
눈이 타버릴 때까지
좋았던 날의 돌을 움켜쥐고
때가 오면 내리칠 것이다
또 한 명이 쓰러진다 어스름이 짙어진다
기도를 잊고 텅 빌 것이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주마등 속에 산다
비가 속살거리는 옛 기억에 들려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
또 한 명이 쓰러진다 비가 툭,
주검의 관절마다 비가 툭,
빗방울만 환한 나라에서
비에 갇힌 꿈의 군락에서
오로지 비만,
사랑스럽다
이용임 시인
2007년 한국일보 시 부문 당선. 시집 《안개주의보》 《시는 휴일도 없이》, 산문집 《당신을 기억하는 슬픈 버릇이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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