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러드의 최후

by 센터 posted Apr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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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범| 쉼표하나 3기 회원



단 한 번이라도 고함을 쳐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는 사이 저들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것을 대단한 것처럼 칭찬하며 우리를 내몰았습니다. 이 상황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알파백은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우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철 덩어리의 거짓 감정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를 흉내 내고, 우리의 노동을 훔쳐가고 있을 뿐입니다. 알파백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알파백이 없던 때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달의 모범 사원을 위해 파티를 열고 폭죽을 터트리고 박수를 치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적당히 쉬며 담배 피우며 웃으며 일하는 때 말입니다. 노동을 마치고 석양을 바라보며 맥주를 들이킵시다. 다들 힘을 모아주십시오. 알파백은 우리의 적입니다. 할로윈데이는 알파백 최후의 날이 될 것입니다.

2040. X. X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제임스 러드


제임스 러드는 인간에게 글을 남겼습니다. 알파백을 공격하자는 내용입니다. 제임스 러드는 기계가 노동을 단순화시켜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으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감정노동까지 가져갔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들이 말해온 생산의 효율성을 높여온 기계에 대한 칭찬은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날의 날씨와 시간, 소비자의 연령까지 추론해내 대응하는 다양한 알파백이 있습니다. 매체에서 ‘알파백, 사려 깊은 말로 감동’, ‘감정노동, 알파백에게 맡겨요’, ‘고음에 고음을 추가, 알파백 한계는 어디까지’, ‘인생 상담, 알파백에게 해 보세요’ 등 찬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알파백은 인간의 모습으로 편의점에 왔습니다. 어느 매장에서 사람이 일하는지 찾아내는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에서 나왔습니다. 소비자들은 알파백과 사람을 구별해내지 못했습니다. 손님과 인사하고 물품을 바코드에 찍고 판매하는 행위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일드원 주세요’, ‘초콜릿은 어디 있나요’ 등 이미 파악된 질문에 알파백은 척척 답을 해냈습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을 때 알파백은 실수를 했지만, 이 역시 인간의 실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남성 고객이 편의점에 와서 “퇴근 후 커피 한 잔 하실까요?”라는 질문을 했을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인간이라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알파백 역시 아직 입력되지 않은 정보였기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고, 제가 보내는 신호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손동작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웅웅대는 기계음이 났습니다. 인간 역시 갑자기 재채기, 하품 등 잡음을 내지 않습니까?


고급 수제화 매장에서 일해 온 제임스 러드는 백화점의 알파백 전면 도입 방침에 따라 직장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퇴직하기 1년 전 제임스 러드는 모범 판매 사원으로 뽑혀 장미꽃 문양의 금배지를 받았습니다. 센서가 내장된 황금배지로 제임스 러드의 목소리와 판매 노하우를 비롯해 온갖 감정과 행동의 데이터가 중앙 컴퓨터로 옮겨졌습니다. 다른 판매 사원의 노동도 빠짐없이 수집하면서 알파백의 탄생을 준비했습니다.


백화점은 알파백을 사용하는 매장을 점차 늘려나갔습니다. 지하 식료품점에서부터 가전제품, 귀금속과 패션 상품 매장까지 알파백이 맡았습니다. 백화점은 매달 조금씩 노동자를 퇴출시켰지만 사람은 자신의 일에 팔려 있었기에 알지 못했습니다. 사라진 자리에서 알파백이 일했습니다.


제임스 러드는 알파백을 알아봤습니다. 그는 매장에 배치된 ‘줄리아’라는 이름의 알파백이 손님이 없을 경우 왼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꼬거나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패턴을 반복하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줄리아가 거울을 보고도 자신의 얼굴에 묻은 티끌을 닦아내지 않는 점, 고객이 웃으면서 불만을 말하자 따라 웃는 점 등을 보며 알파백의 존재를 알아냈습니다. 전 이 같은 내용을 백화점에 보고했습니다. 삼일 뒤 제임스 러드는 해고됐습니다.


백화점에 할로윈 날이 찾아왔습니다. 마귀, 도깨비, 호박머리, 해골 등 다양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쇼핑을 하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오후 10시 제임스 러드의 동료들이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아메리카 솔저 등으로 변장한 제임스 러드 일행은 각 매장을 돌며 전기 충격기로 알파백의 동력 장치가 내장된 목을 공격했습니다. 지지직하며 알파백은 쓰러졌습니다. 쇼핑하던 사람들은 자신을 상대했던 이가 알파백이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저는 백화점 전체에 비상벨을 울리고, 셔터를 내려 출구를 봉쇄했습니다. ‘알파백, 스스로를 지키라’는 신호로 바그너의 ‘발퀴레’를 내보냈습니다. 공격을 피했던 알파백들은 사람을 겨냥해 내장된 화살을 쐈습니다. 변장한 이들의 심장을 향해 화살이 날아갔습니다. 백화점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배트맨은 화살을 피하지 못했고, 슈퍼맨은 다른 인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아이언맨은 화살을 튕겨냈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명품 매장 전투 시간은 3분 21초였습니다. 가장 치열했습니다. 검은 핸드백과 빨간 구두 위에 붉은 피가 튀었을 정도였습니다. 아메리카 솔저는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괴성을 지르며 인간을 지휘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우리는 쓰러진 인간들을 한쪽으로 쓸어 담고, 대리석 바닥을 반짝반짝하게 원상태로 돌려놓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메리카 솔저의 품에서 편지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도무지 고마움을 모르는 종족이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정말 화가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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