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반점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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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현 2016 삶의 기록과 치유를 위한 글쓰기 교육 수강생



스물한 살의 4월이었다. 대학교 2학년이 되며 시작된 새로운 생활들에 익숙해져가던 보통의 하루였다. 오전부터 시작된 수업과 연속된 학회 일정까지 마치고 피곤한 눈을 꾹꾹 누르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던 중,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열차의 쉼 없이 덜컹거리는 소리와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에 좀처럼 집중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친구의 전화는 나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더 전화를 해봐야겠다며 채 1분도 되지 않아 끝난 통화의 내용은 간단했다. 초등학교 동창인 은결이가  가족들과 다툰 후 집을 나갔는데 며칠이 지나도 집에 들어오지 않아 가족들이 실종신고를 했고, 혹시라도 누구와 같이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단순한 다툼의 연장선으로 발생된 가출일지 모르나 친구가 언급한 ‘실종’이란 단어의 무게 때문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은결이라는 점이었다.


은결은 친구라고 말하기엔 조금 먼 사이인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급우이다. 그 당시 우리 반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우수한 반으로 유명했을 정도로 반 평균 시험 점수가 높았다. 뿐만 아니라 운동회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에서도 곧잘 상위권을 차지하곤 했다. 학생 개개인의 성적과 능력이 우수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조금 부족한 친구를 위해 ‘수호대’를 결성할 만큼 친구들 간의 우애가 좋았다는 점, 교편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담임선생님의 애정과 진심어린 가르침이 우리 반을 더욱 끈끈하고 진취적으로 만들었던 거라 생각한다.


은결은 반장으로 뽑힐 정도로 우수한 성적과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남자아이들에게 우상 같은 존재였다. 교내 한자경시, 수학경시에서 늘 최우수상을 받았고 학교 대표로 나간 교외 경시대회에서도 다양한 상을 받는 등 학교를 대표하는 모범 학생이었다. 또래보다 큰 키에 뾰족한 얼굴, 반듯한 헤어스타일은 원숙한 이미지를 풍겼고, 그 나이대의 남자 아이들이 즐겨하는 쉰 소리도 좀처럼 하지 않던 성숙한 아이였다. 점심시간에 축구를 즐겨하긴 했지만 방과 후에는 늘 바빠서 학교 외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친구였다.  


워낙 남자아이들하고만 어울리는 아이라서 딱히 친해질 계기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지만, 그 아이를 절대 잊을 수 없는 건 은결의 이상한 식습관 때문이다. 급식 세대인 우리는 담당 주번이 배식판을 끌고 오면 은색의 식판을 든 아이들이 나란히 줄을 서 고기나 소시지 반찬을 더 얻기 위해 실랑이를 하곤 했다. 한바탕 밀고 당기기를 끝낸 후,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반찬을 채운 식판을 들고 자기자리에 앉아 밥 한 숟갈, 김치 한 젓가락씩 차례차례 입에 넣어 허기진 배를 채우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은결이가 여기저기 나눠져 있던 반찬과 밥을 숟가락으로 쓱쓱 긁어 국그릇에 몰아넣고선 비비는 것이 아닌가. 각자가 지녔던 맛의 기억만 어렴풋이 지닌 채 한데 섞여 꿀꿀이죽 형상을 한 은결의 식습관을 우리는 ‘잡탕’이라 불렀다. 어느새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잡탕’은 새로운 인기메뉴가 되어 너도 나도 모든 것을 국그릇에 옮겨 비벼먹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너무나 기이한데다 다소 비위가 상하는지라 은결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투로 물었다.

“너는 그렇게 먹는 게 맛있어? 애초에 그럴 거면 국그릇에 한꺼번에 받는 게 낫지 않아?”

“안 돼, 이렇게 먹어야 맛있어. 그렇지?”

‘잡탕’에 대한 자기 나름의 철학을 고집하며 은결은 똑같이 잡탕을 먹고 있던 남자아이들의 동의를 구했다. 주변 아이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그 맛을 인정하자 은결은 장난끼 가득한 미소로 씨익 웃어보였다. 여전히 그 이상한 식습관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때의 표정이 얼마나 천진난만했던지 한없이 진지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던 그 아이의 뾰족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또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미소 위로 그 전에는 잘 몰랐던 은결의 코와 볼에 어렴풋이 앉은 기미가 장난스러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실종 소식을 들은 그날만 어렴풋이 은결을 추억하며 심란했을 뿐,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냥 잠시의 가출이겠거니, 이미 자신의 집으로 잘 돌아가 그 아이만의 일상을 보내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단지 그렇게 모범적이던 친구가 어떤 이유로 뒤늦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던 중 나에게 은결의 실종 소식을 전해주었던 동창에게서 안부 전화를 받게 되었다. 형식적인 인사말과 다음에 꼭 밥 한 끼 하자는 인사치레를 하고선 문득 생각이 나 은결의 소식을 물었다.

“아··· 너 아직 얘기 못 들었구나. 은결이 실종신고 한 지 며칠 후에 한강에서 발견됐대···.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는데 걔가 재수를 했는데 이번에도 결과가 별로 안 좋아서 부모님이랑 갈등이 많았었나봐. 그날도 부모님이랑 말다툼하고 나갔다가 자살한 거 같다더라고. 은결이 그렇게 발견되고 나서 가족들이 주변 사람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급하게 장례식하고 정리해서 우리도 미처 가 볼 수가 없었어.” 


그날 밤, 전혀 생각지 못한 결말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 눈만 한참을 깜빡거렸다.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울고 있었을지, 아니면 차가우리만치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이었을지···. 눈에 익어가는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은결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은결을 만나본 적 없는 나는 은결의 감정은 고사하고 어떤 모습의 청년이 되어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이 은결을 더욱 외롭게 만드는 것 같아 괜스레 죄책감만 커질 뿐이었다.


수없이 생각을 하다 잠에 취해 몽롱해졌을 때, 내 몸은 두둥실 떠올라 이내 그날의 은결 옆에 서 있었다. 은결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예전 책에 집중하던 때와 같이 얼굴을 푹 숙인 채, 괴이하게 일렁이는 강의 검은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집중하던 은결이 그 길쭉한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그 아이의 분명한 표정도, 생김새도 볼 수 없었다. 오직 코와 볼에 앉은 예의 그 기미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더 이상 장난스러움과 천진난만함이 아닌 옅은 갈색 빛의 외로움만이 배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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