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떼기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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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2016 삶의 기록과 치유를 위한 글쓰기 교육 수강생



드드드드! 드드드드!

작업복 주머니에서 묵직하니 진동이 허리춤으로 전해졌다. 점심이랍시고 밥을 국에 말아 게 눈 감추듯 먹고 잠시 짬에 담배 하나 피려던 참이었다. ‘울 엄니’ 라는 이름이 화면에 떴다. 에이, 바쁜데. 약간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통화를 눌렀다.

“아범. 저녁에 늦게 들어오나?”

“오늘 약속이 있어서 늦을 것 같은데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그래 알았어.”

또 애들 엄마하고 불편한 게 있었나. 아니면 며칠째 술에 젖어 늦게 귀가하는 나 때문에 속이 상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언젠가 설탕 때문에 며느리에게 잔소리를 들어서 마음이 상했던 어머니다. 칠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는 국수를 매우 좋아하신다. 그런데 국수를 드실 때 꼭 설탕을 넣어 드셨다. 그것도 두세 숟갈 수북하게 넣어 드셨다. 그러면 애들 엄마는 그렇게 드시지 말라고, 당뇨병에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아이들 있는 데서 종알종알 잔소리를 하였다.    


며칠 전 일요일이 생각났다.

조기축구회에서 운동을 하고 오니 어머니가 손주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드시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보시더니 황급히 무엇인가를 옷 춤에 감추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 뭐예요?”

“아니야. 그런데 국수 먹을려?”

“아니요. 운동장에서 짜장면 먹고 왔어요.”

그때였다. 국수대접에 남은 국물까지 다 마신 아들놈이 한마디 했다.

“아빠. 할머니 국수에 설탕 두 숟갈 탔다 아빠 오니까 숨겼지. 히히히.”

순간 어머니가 당황하는 모습으로 나의 눈치를 살피셨다.

“설탕을 안 넣으면 영 맛이 안 나서 그래. 애 엄마한테 말하지 말어.”

“예. 그냥 편하게 드세요. 많이만 드시지 말고요.”


처서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바람이 서늘한 기운이 있다. 올 여름은 우악스럽게도 더웠는데 이제 가을로 들어서고 있나보다. 아침 근무를 마치고 오니 불도 안 켠 거실에서 어머니가 빨래를 개고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텔레비전을 켜니 빨래를 개다말고 옆으로 밀어놓으신다. 어째 표정이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아 옆에 앉았다.

“아범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무슨 일 있어요? 애들 엄마가 또 뭐라 해요?”

“아니야. 그게 아니고 나 방 얻어서 나갈련다. 동사무소 근처에 허름한 월세방 계약했어.”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왜 불편한 거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게 아니고 노인정에서 그러는데 혼자 살면 나라에서 쌀이랑 생활비 그런 거 나온데.”

“아니, 아들 며느리 멀쩡하게 있는데 어떻게 수급자가 되요? 괜히 되지도 않는 거에 매달리지 마세요. 불편한 게 있으면 이야기를 하세요. 그리고 그런 엉뚱한 말에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요.” 


노인정에서 주워들은 것에 혹하는 어머니에게 순간 화가 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머니는 윽박지르는 듯한 아들의 얼굴을 서운한 눈으로 쳐다보셨다. 나는 그게 아닌데. 왜 내 맘을 몰라 주냐.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큰소리를 낸 것에 마음이 안 좋아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들어왔다.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제 방에서 핸드폰에 머리를 처박고 있고 어머니는 저녁 해를 등지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샛노란 햇살에 눈이 부셔 어머니는 그저 팔과 손이 움직이는 그림자처럼 어둠으로 보였다. 어머니의 모습은 작고 초라했다. 마음이 아팠다. 얼마 후 퇴근하고 온 와이프에게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동네 치킨 집에서 아까 어머니와 있었던 내용을 말했다. 묵묵히 듣던 애 엄마는 어머니의 분가가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자책을 하며 눈시울을 흐렸다.


담배 생각에 바깥으로 나왔다. 허공으로 담배 연기를 날리며 하늘을 봤다. 흐리기는 했어도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었다. 어머니의 하루일과를 그려봤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 개고 잠시 노인정에 가서 점심 먹고 아이들 학교 끝날 때쯤 집에 와서 간식 챙겨주는 하루였다. 아들이라는 나는 바쁘답시고 살갑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니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리고 아들집에 살면서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는커녕 어쩌면 텔레비전 채널도 맘 편하게 돌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모신다는 어쭙잖은 생색으로 정작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국수에 설탕 두 숟갈을 넣든 세 숟갈을 넣든 어머니 입맛대로 먹을 수 있고 텔레비전도 보고 싶은 거 맘 편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자유를 갖고 싶었을 것이다. 종합해보면 어머니는 자유롭고 싶었고 나는 본의 아니게 어머니의 자유를 막고 있었고, 이제 어머니가 분가를 통하여 자유를 찾고 싶은 것이다. 

술자리에 들어가 와이프에게 이런 생각을 말했다. 처음에는 분가를 반대하던 와이프도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의했다. 거리도 멀지않으니 자주 찾아보면 되고 낮에는 아파트 노인정으로 점심 드시러 오시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혼자 화투판을 펴고 운수 떼기를 하고 계셨다.슬쩍 들어가 옆에 앉으며 한마디 했다.

“어디 운수 잘 나왔어요?”

“그냥 그렇지 뭐.”

어머니가 화투판에서 눈을 떼지 않고 힘없이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럼 언제 이사 가시게요?”

내가 다짜고짜로 이사 가는 날을 물어보자 어머니 얼굴이 밝아지셨다.

“이사야 뭐, 이달 안에만 가면 되지.”

어머니가 웃음 번지는 얼굴로 달력을 집으셨다.

“예. 그래요.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하시고요. 제가 다음 주 일요일에 쉬니까 차량이랑 알아볼게요. 토요일에 가져가실 거 하고 짐이나 정리해놓으세요. 건너갈게요.”

말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어머니의 운수 떼기가 끝난 바닥에 6월 모란이 깔려 있었다. 화투에서 6월 모란은 ‘좋은 소식이 온다’고 하는데 오늘 어머니의 운수는 제대로 맞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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