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리펙 - 선순환의 시작 1

by 센터 posted Jul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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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생선이 해동되듯 온기가 전해지자 두터운 나무껍질 위로 초록 잎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둥근 돌 사이로 물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콸콸 제법 센 물살을 이뤘다. 동서를 가로지른 살리시스산에 변화가 찾아왔다. 메마른 땅에 풀이 자랐고, 나무는 숲을 이뤘다. 꽃이 생기자 나비와 벌이 날아왔다. 참새, 토끼, 이리도 보였다. 칼처럼 뾰족한 바위와 평평한 능선, 초목지대 그리고 필요하다면 지형의 바위 끝에 산 정상을 알리는 표지석도 세워놓았을 수도 있다. 하룻밤 사이 아니 어쩌면 더 빠르게 생명체가 사라지거나 만들어지는 곳이 살리시스산이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지만 흙, 공기, 물 그리고 사람은 생명의 기원이 됐다. 먹이 사슬로 누군가는 누군가의 삶을 빼앗는다. 그리고 마지막 포식자는 생을 마치고 흙으로 공기로 돌아간다. 이를 선순환 구조라 부른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살리시스산은 그렇게 매일매일 커간다.


산 동쪽 끝 붉은 컨테이너박스 안에 주방과 화장실, 냉장고, 작은 침대가 있다. 잭은 침대 위에 누워있다 일어나더니 냉장고에서 병으로 된 버드와이저를 꺼냈다. 수칙에 어긋난 행위는 아니다. 아직 셀리펙의 대이동이 시작되지 않은 것은 잭도 시청자도 알았다. 이런 자연스런 모습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 렌즈는 잭의 이동에 맞춰 돌아갔다. 잭은 셀리펙을 이끌고 살리시스산에서 지내는 일을 하고 있다. 셀리 박사의 제안에 따른 거였다. 보수도 좋았다. 잭은 프로젝트를 마치고 그리스에서 정착할 생각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셀리 박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컨테이너 박스 주위로 붉고 긴 털을 가진 셀리펙 한 무리가 잠을 자고 있다.


셀리펙(Selly-pack)은 굵고 튼튼한 네 다리가 있는 소와 돼지의 중간 정도 크기의 동물이다. 3개월이면 성장을 마치며 사료 성분에 따라 털 색깔을 바꿨다. 셀리컴페니(Selly-Company)에서 나온 A형 사료를 먹고 키우면 붉은색 털을, B형은 파란색을, C형은 보라색 털이 자라난다. 보드라우면서도 매끈한 셀리펙의 털은 탄성과 보온성도 높았다. 털을 채취하는 방법은 쉬웠다. 양의 경우 일일이 털을 깎았다면 셀리펙은 조심스럽게 털을 뽑아 돌돌 말기만 하면 된다. 셀리펙 머리끝에서 자라난 털은 30일가량 지나면 온몸을 실패처럼 휘감았다. 물론 다리 끝 등 다른 부분에서 털이 나는 경우도 있지만 잔털로 상품성이 떨어진다. 추출기로 머리 끝 모근을 뽑은 뒤 모터를 장착한 기계로 옮기고 버튼을 누르면 윙하고 회전이 시작되면 기계에는 털이 마치 실처럼 감긴다. 그러면 셀리펙은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셀리펙의 털로 만든 아웃도어 제품을 좋아했다. 화학섬유에 지친 시장에 새로운 상품이었다. 한 전문기관은 5년 내 셀리펙 섬유가 섬유 시장을 주도한다고 했다. 적어도 10년 내 목화와 양털의 수요까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측했다. 여기에 한계가 있다. 한 번 털을 뽑아낸 셀리펙에게 다시 털을 얻으려면 30일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그 기간 동안 셀리펙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투자자들은 셀리펙의 질적 전환을 위해 돈을 댔고, 그 임무는 윌리암 디토드 셀리 박사가 지게 됐다. 셀리펙을 만든 이에게 당연히 주어진 프로젝트였다. 셀리 박사는 살리시스산에서 셀리펙의 야성을 키워낼 계획이다. 이후 고무처럼 질겨 먹기 힘든 셀리펙의 육질을 개선하겠다고 기자 회견을 했다. 투자자들은 열광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의식주 중 옷과 음식을 셀리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청사진이다. 한 기자는 집집마다 셀리펙 한 마리씩 키우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가상 기사를 썼다. 그러자 셀리 박사는 기자들 앞에서 셀리펙을 집에서 누구나 키울 수 있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박사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을 취재할 한 방송사를 뽑았다. 방송사는 셀리펙 100마리를 30일 동안 살리시스산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기는 내용을 생중계 형식으로 내보낼 셈이다. 강한 개체들의 유전자를 취하기 위한 대이동이었다. 제품의 우수성, 셀리펙의 관리가 쉽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단 한 사람만 셀리펙 대이동에 투입했다.


셀리펙 프로젝트를 독점 보도하기로 계약한 방송사는 셀리펙 무리를 이끌 사람이 잭이라고 소개했다. 30대 건장한 체격의 잭은 강인함과 함께 자신감이 넘쳤다. 잭은 방송에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목동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그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군대에서도 근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30일 동안 제가 셀리펙을 맡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잭 뒤쪽으로 우리에 갇힌 셀리펙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중 푸른 털을 한 셀리펙이 킁킁거리며 연신 빠른 속도로 우리 끝과 끝을 왔다 갔다 했다. 셀리 박사는 “프로젝트는 안전하게 진행됩니다. 살리시스산 주변에 카메라가 설치됩니다. 참 잭에게는 당연히 빵 등 조리된 음식이 제공됩니다” 하며 웃음 지었다.


셀리 박사는 주머니에서 약처럼 생긴 작은 캡슐을 잭과 시청자들에게 보여줬다.

“캡슐을 깨면 페르몬 성분의 붉은 액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을 조끼에 바르기만 하면 셀리펙들이 잭 주변을 떠나지 않게 되고, 잭을 따르게 됩니다. 오리 새끼들의 이동을 보신 적이 있죠. 어미 오리가 앞장서 가면 새끼 오리가 졸졸 따라다니는 거처럼···.”

셀리 박사는 잭에게 붉은 캡슐을 건네줬다. 잭은 셀리 박사의 말대로 캡슐을 깬 뒤 흰 조끼에 문질렀다. 군데군데 붉게 물든 조끼를 입은 잭은 셀리펙이 있는 우리에 혼자 들어갔다.


검붉은 아니 분홍색 짐승이 꿈틀거렸다. 잭은 창살을 살며시 벗겨내고 셀리펙 우리로 들어갔다. 무리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눈으로 낯선 종의 움직임을 살폈다. 잭은 살며시 걸으며 주머니 속 캡슐을 꺼내 깼다. 푸른색이 감도는 핏빛의 액이 흘러나왔다. 옷에 한 번 문지르고 나서 손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휭휭휭휭 킁킁. 셀리펙의 울음소리가 기계음처럼 들렸다. 푸른색 털을 가진 놈이 휭휭하며 다가오더니 머리끝을 잭의 몸에 비볐다. 잭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해치지 않겠다는 의미로 자세를 낮추고 손으로 셀리펙 목을 쓰다듬었다. 푸른 셀리펙은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에게 고갯짓했다. 마치 사람이 다른 이에게 손짓하는 듯했다. 잭 주위로 셀리펙들이 모여들었다. 수백 개의 눈들이 잭의 눈을 바라봤다. 최대한 평온한 눈을 유지하려 했으나 손은 떨렸다.

 “최대한 눈을 피하지 말아요. 신뢰감을 주어야 해요. 해치지 않는다는 뜻을 마음으로 전해 보세요.”

셀리 박사의 목소리가 내부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잭은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바다에 떠서 잠자는 자신을 생각했다. 물결이 퐁신퐁신거리며 잭의 등과 팔다리에 천천히 와 닿는 느낌을, 그 평온함을 기억해내려 했다. 푸른 셀리펙의 눈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에 갈색을 띄고 있었다. 셀리펙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잭은 일어나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갔다. 셀리펙 역시 천천히 잭을 따랐다. 잭이 물속에 있는 생각을 하다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난 듯 몸이 경직되어 버렸다. 상상 속에서 몸이 경직되자 실제 잭의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잭의 손에 경련이 생겼고, 눈 밑이 떨렸다. 우훙후훙 셀리펙이 울었다.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더니 전체가 우훙우훙하며 우리 전체를 가득 채웠다.

 “당황하지 마세요. 셀리펙은 집단성이 강합니다. 안전하다는 시선을 보내 주세요. 지금 당신의 몸에는 호르몬 캡슐이 발라져 있어 괜찮습니다.”

셀리 박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셀리펙들이 우훙우훙하면서 일제히 일어서자 우리 안에서 잭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잭, 천천히 뒷걸음으로 나오세요.”

경직된 몸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 것 같은 몸에 통증까지 왔다. 그 때 붉은 셀리펙이 잭을 노려봤다. 당신이 왜 들어왔느냐,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 우리 속에서 잭은 이질적이면서도 생명을 가진 동질의 존재다. 셀리펙은 털을 곤두세웠다. 감겼던 붉은 털들이 서자 셀리펙 몸집이 두세 배 불어 있었고 검은색 눈만 보였다. 우리 안에 경고음이 울렸고, 붉은 등이 돌면서 위험 상황임을 알렸다.


우리 안으로 전기 충격기로 무장한 안전 요원들이 들어갔다. 한 사내가 파파팍 파파팍 튀는 진압봉을 위아래로 흔들며 셀리펙이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크윽윽윽거리던 셀리펙이 갑자기 튀어 올라 안전 요원을 쓰러트렸다. 그 순간 다른 이가 봉으로 셀리펙의 머리를 후려쳤다. 육중한 몸 덩어리가 푹하고 쓰러졌다. 뒤를 따르려던 셀리펙들이 주춤하며 물러섰다. 안전 요원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잭을 부축해 나갔다. 셀리펙들은 후웅후웅거리며 우리 밖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시죠. 오늘 일어난 일은 여러분은 물론 저에게도 좋은 내용은 아닙니다. 다 아시겠죠?”

셀리 박사는 촬영분을 회수했다. 카메라맨은 철수했다. 셀리 박사는 극도로 보안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잭··· 잭···”

주위에서 두려움에 싸인 채 몸을 흔들었다. 잭이 눈을 떴다. 형광 빛 아래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죠?”라는 말을 한 뒤 잭은 쓰러졌다. 푸른 셀리펙 역시 전기 충격 탓에 다리를 절룩거렸다.


“일어나, 일어나.”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박사님, 깨어나지 않는데요? 심장 박동, 체온, 체내 신체 장기의 움직임은 모두 정상 범위에 있지만, 의식이 없습니다. 뇌에 전기 쇼크를 줘볼까요?”

 “그러다가 블랙아웃 상태가 될 수도 있어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싶나요.”

셀리 박사는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벽 전체가 페르시안 블루로 칠해진 실험실은 침묵에 빠졌다. 뚜욱뚜욱 삐익삐익 전자음이 간헐적으로 두터워진 공기층을 뚫고 나올 뿐이었다.


한 시간가량 지났을 때, 침대 위에 놓여 온 몸에 전선들로 이어진 한 육체가 꿈틀거렸다.

“박사님, 이거 보세요. 눈을 떴어요, 눈을. 의식이 있는 거예요.”

 “좋아요. 제 말 들려요? 들리며 당신의 고개를 끄덕여 봐요.”

건강한 육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온 몸에 피가 왕성하게 돌아가고 신체 장기가 이상이 없다는 뜻의 파란 불이 켜졌다.

“어디죠?”

세상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성대를 통해 입 밖으로 나온 ‘어디죠’라는 말에 셀리 박사를 대표로 한 연구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자, 손을 움직여 보시겠어요?”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였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러더니 두 팔을 하늘 위로 뻗어보였다.

“잘했어요. 이번에는 일어나 보세요.”

침대 위에서 꿈틀거릴 뿐 일어서지는 못했다. 바닥에 디딜 손의 힘이 부족했다. 아직은 무리였다.

 “세상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움직일 수 있을까요?”

검은 머리의 한 연구원이 말했다.


조금 전까지 기다리자고 했던 셀리 박사는 막상 움직임을 보자 마음이 급해졌다. 한 발을 딛자 다음 발을 딛는 것은 시간문제 아닌가. 아이들이 클 때 그랬다. 하룻밤 사이에 훌쩍 크고, 어제 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을 바로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가도 지체의 시간을 거쳐 마치 언제 내 아이였나 싶을 정도로 훌쩍 커 보호가 필요 없는 것이 사람이 아니던가.


배아복제는 생명 윤리에 어긋나 연구 자체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은 생명 윤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심장이 멈춰 사망 판정을 받은 경우 그 이후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다. 셀리 박사의 연구는 거기에서 출발했다. 사망의 원인은 들숨과 날숨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발생한다. 숨이 끊어져도 신체 장기는 있고, 육체 역시 남아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여기에 인공적으로 숨을 넣어주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셀리 박사는 신체 장기 복제가 가능한 상황에서 새 심장을 신체에 심으면 생명 역시 돌아온다는 판단이었다. 여러 시행착오가 발생했다. 뛰는 심장을 만들어도 그것이 과거의 그 사람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 숨이 끊어진 상태에서 뇌 손상이 급속히 빠르게 시작되기 때문에 기억의 복원은 장담할 수 없었다. 새 심장의 신체 적합 역시 잘 되지 않았다. 꿈틀거림 그 자체가 진전이었다. 그나마 반응은 있었으나 몇 시간 버티지 못하고 정지한 경우도 있다. 건전지 수명이 끝나 움직임을 멈춘 장난감 트럭처럼. 연구도 중단될 처지였다. 누가 허무맹랑한 프로젝트에 돈을 계속 주겠는가. 셀리는 인간 연구와 함께 새로운 종 개발에 착수했다. 식물의 경우 뿌리에서 고구마가, 잎에서는 토마토가 자라게 하는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실제 성공했지만 그 맛과 수확량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동물의 경우는 달랐다. 적어도 인간이 취할 부분이 많다. 육류, 털, 장기의 활용 등 변형된 유전자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제 셀리 앞에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두 개의 종이 서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름을 딴 셀리펙 그리고 잭.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글 | 이기범

글과 사진, 그리고 춤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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