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by 센터 posted Mar 1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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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 종로서적 자리에서 희한한 풍경을 목격했다.
타고 가야 할 택시를 승객으로 보이는 일행 4명이 밀고 있다. 개중에는 장갑을 끼지 않아 택시를 밀다 말고 손을 호호 부는 사람도 있다. 시간은 밤 12시다. 호기심이 일었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
 
22년 전 나는 택시노동자였다. “젊은 사람이 무슨 택시야! 다른 일 하다하다 안되면 그때 나이 들어서 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을 고쳐먹으라고. 택시는 막장에 하는 일이야!” 갓 입사해서 인사를 하는 나에게 선배가 점잖게 타일렀다. 이런 선배들의 애정 어린 협박을 귓등으로 흘렸다. 택시를 하게 된 동기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용노조의 민주화가 그것이다. 당시 택시노조는 한국노총 사업장이었다. 이곳을 전노협 사업장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취업을 했던 것이다. 입사 3개월 만에 노동조합 후생복지부장이 되었다. 비교적 빨리 노동조합 간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2시간 운전과 낮은 급여로 인한 높은 이직률 때문이었다. 간부가 되고나서부터 연일 회사에 돈을 꼴아 박았다. 집회, 회의, 조합원 조직화를 하다 보니 일할 시간이 부족했다. 택시는 사납금제도라는 것 때문에 내 돈을 넣어서라도 그날 사납금을 채워야 했다. 이런 일이 6개월째 반복되던 12월의 밤 12시. 종로서적 앞. 한 남자가 손을 들어서 내 택시를 향해 소리쳤다. “도봉동!” 귀가 솔깃했다. 도봉동이라면 거리도 길고 코스도 좋다. 코스가 좋다는 것은 합승할 여지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기다 한 사람이다. 오늘도 회의, 조합원 조직화 때문에 일을 늦게 시작한 지라, 피크시간(손님이 많아 합승하기 좋은 시간) 때 합승을 최대한 많이 하지 않으면 돈을 회사에 꼴아 박아야 할 처지였다.
‘하늘에서 도와주는 구나. 대의(노조 민주화)를 위해 일하다 보면 하느님도 그 뜻을 갸륵히 여기시고 도와주는 구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타세요!”라고 힘차게 말했다. 한 남자는 택시 앞문을 열고 반쯤 다리를 걸친 채 뒤를 돌아다보며 “야! 빨리 와!” 하며 일행을 불렀다. 우르르 친구들이 몰려들더니 택시 뒷문을 열고 탔다. 총 4명 택시를 꽉 채웠다. 꿈이 날아갔다. 오늘도 돈을 꼴아 박아야 할 처지가 됐다.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못마땅한 내 표정과 달리 한 남자 무리들은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얄미웠다. 내 불행이 저들의 행복인 것 같아서. 내 앞에 보이는 차량에는 한 사람을 싣고, 조금 가다가 또 한 사람을 싣고, 바퀴가 세 바퀴 구르고 또 손님을 태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자리까지 채우고 혼잡한 종로거리를 빠져 나간다. 부아가 났다. ‘피크시간에 네 명이 탔으면 미안해서라도 조용히 있어야지. 오히려 뭣이 좋다고 떠들고 웃으며 난리야!’
한 남자무리를 태우고 20미터 쯤 진행 했을 때 차가 크르렁, 크르렁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끌벅적 대던 한 남자 무리와 내가 동시에 소리를 냈다 “어! 차가 왜 이러지?” 크르렁 대던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차가 멈췄다. 차 키를 몇 번이고 돌려 보았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내려서 밀어 보시겠어요.” 한 남자 무리는 차에서 내려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밀었다, 쉬었다를 반복하다 보니 15분이 지났다. 이쯤이면 포기하고 다른 차를 잡으려고 할텐데 요지부동이다.
“손님 아무래도 차가 고장 난 것 같아요. 다른 차를 타세요.” 하고 정중히 말했다. 한 남자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더 밀어 볼 테니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이 시각에 다른 차 잡히지도 않아요.” 큰일이다. 더 지체 했다가는 피크시간이 지나갈 것이다. ‘거머리 같은 놈들….’
마지막 수단을 발동했다. “좋습니다. 뒤에서 힘껏 다시 밀어보세요” 한 남자 무리가 뒤에서 차를 힘껏 밈과 동시에 버튼을 눌렀다. 2, 30미터를 달렸을 때 쯤 시동이 걸렸다. 그 길로 나는 줄행랑을 쳤다. 룸 미러로 보니 한 남자 무리들 중 일부는 주저앉았고, 나머지는 그냥 서있다.
  
3.
 
택시를 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택시가 갑자기 시동이 꺼졌어요.”
“제가 1급 정비사인데 좀 봐 드릴게요” ‘와!’하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택시가 있는 쪽으로 가서 안을 살폈다. 택시기사는 운전석에 앉아서 계속 자동차 키를 돌리면서 “왜 안 걸리지?”를 연발하고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좀 볼 줄 아는데 봐 드릴게요.” 택시기사에게 말을 건네고 안을 살폈다. 혹시나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였다.
“한 분 이리로 와서 기사분 옆에 꼭 앉아 계세요.” 그리고 나서 택시 안에 불룩하게 솟아 있는 버튼을 누르고 나서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시동 걸어 보세요.” 택시기사의 표정을 살폈다. 몹시 못마땅한 표정이다.
몇 번 크르렁 크르렁 거리더니 이내 시동이 걸렸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이 버튼이 올라와 있으면 시동이 꺼집니다. 이 버튼이 항상 눌려져 있는지 확인 하시면 절대 시동 안 꺼질 겁니다.” 시동을 걸어줬음에도 택시기사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택시기사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아래위로 까딱인다. 택시 밖에 있던 사람들도 “고마워요, 아저씨.” 하며 택시에 차례로 오른다. 그때 다시 택시 문이 열리면서 한 여성이 다가오며 나를 부른다.
“잠시 귀를 빌려 주세요.” 하더니 귀를 그녀 앞으로 가져가는 순간 볼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는 “멋쟁이 아저씨 쌩유!”하며 택시에 오른다. 택시를 밀던 일행 4명중 1명은 남자, 세 명이 여자였다. 만약에 전부 남자였거나, 쌍쌍이었다면 어찌했을까?
아참, 그렇지. 그 버튼이 뭐냐고? 조그만 정 사각 모양에 LPG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위치는 라디오와 핸들 사이쯤에 위치해 있다. 이 버튼이 솟아 있으면 LPG가 공급이 차단되어 시동이 안 걸리는 것이다. 22년 전 한겨울 밤에 내동이 친 미안함을 오늘에서야 털어냈다.

 

 

글|고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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