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에게 보내는 봄 편지

by 센터 posted Apr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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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덕| 쉼표하나 2기 회원



OO씨! 잘 계신지요.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마지막 문자를 주고받은 게 두 해 전 시월 말이더군요. 늦가을 낙엽들이 이리저리 뒹굴 무렵이나 두꺼운 겨울 옷 대신 이번 봄엔 뭘 입지 할 이맘때면 어김없이 ‘그리움’이 새록새록 피어납니다. 그래서였나 봐요. 이달 초 문득문득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진주는 지금쯤 봄이 성큼 다가왔겠지요. 남강과 진양호에도 어김없이 꽃들이 활짝 폈는지요. 자리를 순순히 내주지 않으려는 봄바람의 시샘도 있겠지만요. 일기 예보로는 서울은 대략 4월초 벚꽃이 만개할 거라네요. 꽃구경 하러갔다 자칫 사람들에 밟힌다고 들었지만, 이번에는 집 가까운 여의도 윤중로라도 가볼까 합니다. 잘 모르지만 진주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씀드린 거 같아요. 저는 지금까지 대략 시골과 대도시에서 절반씩 살아왔어요. 그래서인지 몸은 도회에 가깝고 마음은 시골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거 같아요. 제가 가본 그리 많지 않은 도시 중에 진주가 딱 그런 곳이라고 생각되었어요. 도시와 농촌을 적당히 섞어놓은···.  


기억하시는지요. 재작년 팔월 여름 한복판이었지요. 모처럼 긴 휴가를 맞아 저는 혼자 전라도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어요.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그럼에도 그제서야 찾은 망월동에서 수많은 민주 영령들 앞에 섰습니다. 묘비에 적힌 한 분 한 분 사연을 보며 큰 슬픔에 빠졌어요.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어떻게 이룬 민주주의인데.’ 그날 저는 낯선 금남로와 전남도청 앞을 밤늦도록 서성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전남도청을 다시 찾았어요. 한창 무슨 공사 중이라 가까이 가볼 수 없었지만 그날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한참을 서 있었지요. 


다음날 오랜 벗이 기다리는 창원으로 가는 중에 진주에 들렀어요. 문득 지난 주 처음 만난 인연이 떠올라 전화를 드렸지요. 그렇게 우리는 진주성을 함께 거닐었어요. 그때 OO씨는 등산용 모자를 쓰고 오셨지요. 연한 아이보리 색에 주황색 테두리가 있는 좀 낡았지만 썩 잘 어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우리는 서로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지요. 진주 시내 가까운 교외에 살고 작은 직장을 다닌다 하셨어요. 아이는 셋이고 큰딸은 부산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하셨고요. 작은 텃밭을 가꾼다고 들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꾸미실지 궁금하네요. 고양이도 키운다고 하셨지요. 저는 저희 집 푸들 ‘돌이’를 살짝 자랑했던 거 같아요. 점심으로 먹은 남강 장어 맛이 일품이었어요. 언젠가 또 한 번 그럴 기회가 있을 지요. 그리고 OO씨가 생각날 때마다 자주 들른다는 진양호 입구 어느 나무 아래 함께 갔지요. 주위에 많은 여느 나무와 다를 게 없었지만 OO씨에게 각별한 위안을 주는 존재라니 저에게도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전날 저녁 전남도청 앞에 홀로 말없이 서있던 고목을 다시 떠올렸어요.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저는 옷만 갈아입고 바로 광화문으로 향했어요. 많은 이들이 참사를 당한 아이들을 기억하며 단식하는 곳에 잠시라도 함께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렇게라도 미안함을 덜고 싶었지요. 다음 달이면 2주기가 되네요. 못다 핀 젊은 꽃들이 하늘에서나마 편안할는지요. ‘진상 규명’, ‘절대 잊지 않을게’를 수없이 다짐했지만 먹고사는 일상 속에 어느덧 무감각해진 저를 발견하네요. ‘잊혀진다는 것’ 만큼 세상에 슬픈 일이 있을 지요. 


그날 진주에서의 만남을 이렇게 썼어요.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건 삶의 큰 기쁨! 왠지 그녀와의 만남이 오래 이어질 거란 기분 좋은 예감.’ 참 인연이란 얄궂지요. 생각지 못한 다른 일, 그것도 저와 OO씨 사이의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좀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지요. 당시 저는 OO씨 입장을 백 번 이해했지만, 당사자가 아닌 까닭에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기도 주제 넘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안타까울 뿐이었지요. 결국 나중에는 연락드리기가 망설여지더군요.


저에게 보내준 마지막 문자를 다시 봤습니다.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선 직·간접적 만남을 통해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겠죠. 제게 다한 인연은 마음에서조차 내려놓았을 때 입니다.(중략) 얼마 전 일간지에서 신형철의 산문집인가 평론집을 소개하는 글에서 마음에 와 닿는 글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 더불어 삶이 ‘간결’해지길 바래봅니다. 어느새 가을 끝자락입니다, 쓸쓸함이나 휑함이 응덕 씨의 단단한 심지는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하신 책을 검색해 보니 젊고 유명한 평론가 분이네요. 언젠가 꼭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최근 소설집 두 권을 연이어 읽었어요. 이시백 선생의 《응달 너구리》와 이인휘 선생의 《폐허를 보다》. 사실 소설을 그리 즐겨 읽는 편이 아닌데 두 분은 저와 작은 인연이 있는 분들이에요. 제가 다니는 글쓰기 모임에서 강의를 듣고 합평 모임에서 뵌 분들이지요. 말하자면 한 편은 농촌 소설이고 또 한 편은 노동 소설이지요. 특히 이인휘 선생은 거의 십 년 만에 작품을 내 지난달 북 콘서트도 있었어요. 저도 참석했는데 참 보기 좋더군요. 자리를 꽉 채운 많은 이들과 행사에 나온 분들의 얘기를 들으니 그가 살아온 삶이 짐작되더군요.

‘저 분은 인생을 참 잘 살아오셨구나.’

평을 하자면 둘 다 ‘강추(강력 추천)’입니다.


이제 사연을 접어야겠네요. 뜬금없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저는 남녀 간에도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생각해요. 직장 생활만, 그것도 한 곳에서만 오래 해온 탓에 저는 인간관계가 넓지 못해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압니다. 더구나 사람을 ‘진실로’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지요. 그런데 이 말은 자칫 남 탓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요. 제가 그리 진실하지 못했다는 자성의 말로 이해해 주세요. OO씨도 저와 좋은 인연 만들어갈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 새삼 듭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겠지요. 언제 서울 오실 일 있으면 꼭 연락주세요. 아니면 제가 진주 갈 일을 만들 수도 있겠네요. 말씀하신 대로 하루하루 새롭게, 언제 어디서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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