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주

by 센터 posted Oct 24, 201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숟가락이 자꾸 튕겨져 한 번에 따지지 않았다. 역사 속 누군가는 긴 장대와 단단한 받침대만 있으면 달은 물론 지구라고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또다시 집중해 힘을 줘 숟가락을 잡아 쳤지만 받침대 노릇을 하던 엄지손가락만 붉어질 뿐이었다. 주위에 몰렸던 시선들이 물대포에 맞은 듯 흩어지고 있었다.

이리 가져와.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냐!” 까칠한 목소리가 귀를 쳤다. P 선배다. 누구도 그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다. 병권이 넘어갔다. P 선배는 왼손으로 맥주 병목을 꽉 쥐더니 골뱅이 소면을 집어 먹던 젓가락 중 하나를 가져댔다. 오른손 손목이 몇 번 좌우를 가르더니 순간 !” 하고 병뚜껑이 맥주집의 낮은 천장을 맞고 튀겨져 나가 뒤쪽 테이블로 하고 떨어졌다.

~” 박수가 터져 나왔다. 뒤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잠시 이쪽을 쳐다봤지만 문제 삼지 않았다. P 선배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잔 모아. 맛있게 타줄게.” 말 한마디에 맥주잔들이 줄을 섰다. 맥주와 소주가 섞였다. 대충 말아주는 것 같았지만 유리컵 잔에 인쇄된 CASS의 첫 단어 C에 정확히 술의 양이 맞춰졌다.

P 선배는 폭탄사를 했다. “잔 들어. 다들 고생 많았다. 아침부터 걱정했는데 다들 알아서 일들 해줘서 너무 고맙다. 다음에 더 멋있게 해보자. 파이팅!” 잔들이 파이팅!”이라는 합창 속에서 경쾌하게 부딪쳤다. 청량함 속에 쓴맛이 녹아든 폭탄주는 목구멍을 타고 빠르게 몸에 퍼졌다. 술자리는 P 선배가 주도해 나갔다. 여자 후배들과 동기들 모두 P 선배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했다.

선배, 오랜만에 충성주 어때요.”라는 말이 나오더니 누군가가 주방에서 주황색 플라스틱 물바가지를 가지고 나왔다. 차가운 맥주와 뜨거운 소주가 뒤섞여 혼연일체가 되어 찰랑거리며 물바가지를 채웠다.

P 선배를 중심으로 왼쪽부터 바가지가 돌았다. 한 명 한 명 들이킬 때 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술이 줄어들고 있었다. 줄줄 흘리면서 줄이기도 했고, 단숨에 들이키거나 조금씩 끊어먹는 이도 있었다. 걱정하는 듯 지켜보면서도 자신의 몫이 왔을 때는 거침없이 마셔댔다.

차례가 와서 입을 대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꾹 참고 들이켰다. 남자 아닌가. 최대한 기본 이상은 해야 하지 않나. 주위에서 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왕 시작한 거 과감해질 필요가 있었다. 치욕을 풀어야 했다. 그래 조금만 더 마시자! “어어, 그만그만. 뒤에 둘이나 더 있어.”라는 소리에 멈췄지만 상당한 양을 먹은 후였다. 충성주는 두 모금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충성주 후 폭탄주가 몇 차례가 돌고 나서야 술자리는 끝났다. 중심이 없이 흐느적거리는 무리들은 P 선배를 택시에 태운 뒤에야 흩어졌다. 난 버스 막차를 잡아탔다. 비틀거리며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가방을 뒤져 세미나책을 꺼냈다. 두 눈은 흔들리는 글자를 잡아먹듯 좇았다.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분리해야 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는 자신의··· 신체와 육체노동에서, 승무원은 자신의 감정과 감정노동에서··· 자기 스스로를 떼어내야 한다···.”



이기범| 글과 사진 그리고 춤으로 세상과 만나고 있습니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