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 4개

by 센터 posted Aug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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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밥상에 초등학교 2학년 조카딸이 “둘 큰(둘째 큰아빠)∼ 소주병 내 꺼 4개, 언니 꺼 4개만 줘요.”라고 한다. 같이 사는 막내 동생 딸들에게 둘째 큰아빠인 난 그야말로 봉이다. 아이들이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늘 나에게 주문을 한다. 그런 아이들이 가끔은 버릇없게 굴 때도 있지만 갓난아이 때부터 주말 부부인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게 안쓰러워 가족 중에선 내가 웬만하면 뜻을 다 받아주는 편이다.^^
 
밥상머리에서 오늘은 또 뭐 요구할게 있나 했더니 느닷없이 술병을 달라고 해서 좀 당황스러웠다. 요 며칠 술 잔뜩 먹고 새벽에 들어왔다고 타박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린 속을 해장하면서 엄니께 한 소리 듣고 있는데 아이들이 술병 달라는 소리에 술이 확 깼다.
지레 찔려서 내색도 못하고 “네 병씩 이면 되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병 모으는 가방을 내민다. 학교에서 빈병을 가져오라는 거다. 어릴 적 학교에서 빈병이나 신문 등을 잔뜩 할당량을 주어 경쟁하듯이 가져갔는데 지금도 이런 걸 하는가 보다. 국민소득이 2만 불이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시절에 아직까지도 학교에서 빈병을 모으고 있다니….

요즘 길거리나 지하철에 폐지 줍는 어르신들도 많은데 이젠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빈병을 모으라 한다. 요 며칠 먹던 술병을 모으면 금방 할당량이 채워지겠지만, 집에선 술을 안 먹는지라 빈병이 없다. 그렇다고 사서 먹을 수도 없기에 출근하여 근무하는 아파트 재활용장 수거함을 뒤졌다. 한참을 뒤져 그나마 깨끗한 병으로 점심시간 집에 밥 먹으러 가는 길에 가져다주고 페북에 올릴까 하여 사진을 찍어봤다. 
 
대한민국이 경제대국 세계 몇 위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다!! 아직도 이렇게 빈병을 모아 오라는 학교가 있다는 게 경제대국 세계 몇 위인 나라의 현실이다. 저녁에 데모 마치고 한잔할건데 울 조카들 학교 준비물 잘 내라고 술병이나 챙겨 와야겠다. 이런 젠장. 
 
아침 뉴스를 보니 밤새 광화문과 영동대교에 월드컵 응원하느라 수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월드컵 응원하는 한쪽에서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사진이 페북에 올라와 있었다. 밤새 열광적으로 응원하면서 먹은 치킨 뼈다귀와 빈 술병들이 수없이 나뒹구는 한쪽에 1인 시위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학교에서 별도로 아이들에게 빈병 모아 오라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런 젠장….



이상선 | 마음만은 젊은 청년인 40대 노총각. 사람과의 인연을 늘 소중하게 여기는 넉넉한 몸매의 소유자. 데모를 좋아하고 희망세상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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