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리펙 - 선순환의 시작 2

by 센터 posted Oct 05,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글 | 이기범 쉼표하나 3기 회원



“강한 힘에는 그만큼 대가가 따른다.”

 “그를 막았다면, 할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으셨겠지.”

잭이 깨어났을 때 침실 한 구석에서는 고전 영화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이 할아버지가 초월적인 힘을 소유하게 된 손자에게 당부했던 말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눈물을 흘리며 마천루를 누볐다. 잭은 리모컨을 쥔 채 왼쪽 손목을 앞으로 내뽑으며 텔레비전을 껐다. 언젠가 많이 해봤던 장난인 것 같았다. 쓩슝쓩 거리며 쏘아댈 수 있는 거미줄이 있지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사랑하는 이조차 지킬 수 없었던 쓸쓸한 영웅을 잭은 닮고 싶었다.

셀리 박사가 왔다.

“괜찮나요?”

 “약간 놀랐을 뿐입니다. 프로젝트에 차질이 있는 것은 아니죠.”

 잭이 답했다. 셀리 박사는 셀리펙이 흥분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우리 안에 갇혀 있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여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매일 아침마다 약물을 투입해 스트레스 지수를 조정할 생각입니다”라고 박사가 말했다. 프로젝트는 문제가 없을 것이며 지체할수록 대중의 의심만 키우게 돼서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매일매일 새롭게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우리도 일을 진행해 나가지요.”

셀리 박사는 웃음을 지었다.


잭이 우리를 찾았다. 몸을 낮춰 셀리펙의 눈을 봤다. 푸른 셀리펙은 잭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이 밝았다. 붉은 캡슐을 깨서 옷에 바르지 않았는데도 셀리펙은 얌전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짐승의 몸에 손을 가져댔다. 푸른 털을 가진 셀리펙은 ‘간지러워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진 동물. 태어날 수 없는 동물이지만 나타나버렸다. 이렇게 숨을 쉬며 소리치고 때로는 화도 내는 짐승. 성기가 없어 스스로 대를 이어갈 수 없는 존재들. 좁은 공간에서 하루하루 적응하며, 세계가 필요할 때 자신의 털을 모두 내놓는 짐승. 사는 동안 따뜻한 곳에서 영양 수치가 맞는 음식을 삼시세끼 공급 받는다. 햇살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그럴까. 결국, 수명이 다하여 구덩이로 사라지는 생명체.

셀리 박사가 잭을 따로 불러 셀리펙 대이동 프로젝트는 본능을 깨우는 일이라고 했다. 아까 셀리펙이 잭에게 대든 것은 그 본능 중에 하나였다. 본능과 욕구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키우며 면역력도 생기게 한다는 이론이다.


이른 아침 살리시스산을 넘는 셀리펙의 이동이 시작됐다. 잭은 벙거지 모자를 쓰고 코튼 재질의 편한 바지에 셀리펙 털로 만든 외투를 걸쳤다.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양어깨로 매는 가방에는 비상용품 등이 들어가 있었지만 무겁지 않았다. 보라, 초록, 빨간, 흰색, 녹색, 주황 등 가지각색의 셀리펙 100마리가 보행을 했다. 갇혀만 있던 셀리펙들 중 몇몇은 얼마를 걷다가 퍽하고 쓰러졌다. 잭이 달려갔을 때 이미 발목 관절이 부러져있었다. 잭은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었다. 셀리 박사는 잭에게 ‘두고 가라’고 했다. 이후 진행팀이 낙오한 셀리펙을, 아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셀리펙을 치울 것이다. 잭은 이들을 버리고 남은 셀리펙을 끌고 산을 올랐다. 두 시간 이동해 평지에 도착했을 때 많은 수의 셀리펙이 사라져 있었다. 숫자를 세어보니 마흔세 마리만이 살아남아 따라왔다. 목초지에서 풀을 뜯어먹기를 기대했지만, 셀리펙은 멍하니 잭만 바라봤다. 연한 잎을 찾아 셀리펙 입에 가져갔다. 질겅질겅 씹었다.

 “옳지, 옳지 그렇게 하는 거야.”

셀리펙 한 마리가 풀을 뜯으니 주위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 잭 주변으로 몰려왔다. 잭의 손을 핥다가 초록빛 잎을 발견하고 입에 가져댔다. 이들 무리들은 어느새 다들 염소처럼 풀을 질겅질겅 씹었다. 잭 역시 풀을 입에 넣었다. 혀로 보드라운 나뭇잎을 굴려 본다. 푸르른 쓴 맛이 났다. 셀리펙처럼 씹다가 삼켜본다. 셀리펙들은 계속 무언가를 먹었다. 땅위에 난 풀들을 모두 먹어치울 기세다.


잭 위로 카메라를 장착한 드론이 나타났다. 잭은 아무 문제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드론은 한가로운 목초지의 풍경을 담는 듯했다. 저 높이에서 이 광경을 본다면 셀리펙이 양떼와 같을 것이다. 그날 밤 셀리펙 중 일부가 입에서 푸른 덩어리들을 게워냈다. 꺼억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잭은 셀리펙들에게 다가갔다. 랜턴을 비추자 붉은 눈이 잭의 눈과 마주쳤다. 겁에 질린 셀리펙은 몸을 바둥거리며 꺼억꺼억거렸다. 푸른 잎을 소화할 능력이 없는지도, 아니면 자연의 독성이 셀리펙의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것인지도 몰랐다. 잭은 셀리펙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절대로 돌보거나 구하지 말라는 것이 원칙 중 하나였다. 다음날 아침 셀리펙 여덟 마리가 꼬꾸라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가까이 가보니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이미 숨이 끊어진 것들도 있었다.


3일 후 이동하라는 셀리 박사의 지시만 없었다면 잭은 이곳을 당장 박차고 나갔을지도 몰랐다. 어떤 환경에서라도 살아남을 강인한 셀리펙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일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 중 하나였다. 낙오한 셀리펙을 돌아보지 않고 내버려 둬야하는 것이 대이동의 원칙이다. 셀리 박사는 강한 종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마치 하나의 사회 법칙인 양 일반화시켰다. 잭은 셀리펙의 이동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정했고, 지금 그 일을 한다. 망치지 않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먹이 사슬에 따라 죽고 죽이는 것을 우리는 좋은 말로 선구조라고 한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진화로 인해 살아남은 종자를 미리 연구해 선취해 강한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자연이 정해준 데로 따르게 되면 불확실한 요소들과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생산성이 떨어진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윈윈 구조를 따라가기 위해 셀리펙은 만들어졌다.


살리시스산에 밤이 찾아왔다. 주위에 형체 가진 개체들이 어둠으로 하나둘 사라져갔다. 멀리 보이던 산과 골짜기를 시작으로 잭 주변에 있는 푸른 나무와 노란 꽃들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검은색 털의 셀리펙이 눈을 뜨고 있지 않는다면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둠은 하얀 셀리펙까지 덮지는 못했다. 잭은 침낭 속에서 잠을 청했다. 바람은 침낭을 쳤지만 찬 기운이 셀리펙 털을 뚫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지퍼를 열고 살짝 하늘을 바라봤다. 총총총 별들이 떠있다. 사자자리, 오리온자리, 북두칠성. 잭은 별 잇기 놀이를 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어디를 비추나

살리시스산 속 셀리펙을 비추지

반짝반짝 작은 별 어디를 비추나

셀리펙 품에 누워있는 잭을 비추지

반짝반짝 작은 별 어디를 비추나

어둠 속에 쓰러진 셀리펙을 비추지

반짝반짝 작은 별 어디를 비추나


잭은 노래를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재 셀리펙이 몇 마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셀리펙이 쓰러졌는지조차도. 셀리펙은 스스로를 돌봤다. 처음 우리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았을까. 닫힌 곳에서 서로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같은 종족이라 같은 핏줄이라 생각했을까. 아닐 것이다. 셀리펙은 존재하지 않았던 동물로 각각이 새로운 개체일 뿐이다. 잭이 첫날 쓰러져 간 셀리펙을 무심하게 바라봤던 것도 이런 탓이었다. 셀리펙은 잭을 따라 무리를 지었다. 잭이 이끄는 데로 붉은 호르몬의 향을 따라 움직였다. 힘에 겨워 주저앉은 셀리펙의 움직임이 기억났다. 밤공기가 찼다. 바람이 불었다. 내일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셀리 박사의 지침이 떨어졌다.


뜨거운 햇볕이 잭의 등 위로 쏟아졌다. 잭은 지치지 않고 걸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잭은 정해진 계획대로 강인한 셀리펙을 위해 쉼 없이 걸었다. 그늘이 없는 흙길로 2시간 이상 걸은 터라 셀리펙들은 힘들어했다. 쓰러졌다 다시 따라오느라 셀리펙의 행렬은 늘어졌다. 윙윙거리며 반짝이는 산 저편에서 드론이 날아와 잭 앞에 멈췄다. 그리고 잭에게 음식과 물이 제공됐다. 쉴 지점이 나오면 거기에 새로운 셀리펙이 있다고 했다. 잠시 물로 목을 축인 잭은 셀리펙을 독려했다.

“자 가자. 저 언덕만 넘으면 쉴 공간이 있다는 구나.”

잭이 발걸음을 재촉하자 셀리펙 무리도 움직였다.


언덕 위에는 셀리 박사가 말한 것처럼 황소만한 황색 셀리펙 한 마리가 있었다. 잭이 끌고 온 셀리펙의 덩치보다 배 이상이 컸다. 잭은 황색 셀리펙에게 다가갔다. 황색 셀리펙은 우물우물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입 주위로 개미들이 가득했고, 긴 혀가 개미를 핥았다. 잭은 주위를 살폈다. 온통 흙만 있을 뿐 풀들이 자라지 않고 있었다. 잭이 이끌고 온 셀리펙들은 워웡워엉 소리를 냈다. 잭은 나뭇가지로 흙을 팠다. 개미굴을 발견했다. 손으로 개미들을 잡아 셀리펙에게 가져갔다. 셀리펙은 생명체의 빠른 움직임에 놀랐는지 고개를 돌렸다. 잭은 집에 가득한 개미들을 자신의 입안으로 가져갔다. 신맛이 났다. 잭은 우물거리며 개미를 먹었다. 그렇게 몇 번에 걸쳐 잭은 개미를 먹었다. 셀리펙들은 잭의 손 주위로 다가왔다. 개미를 핥았다.

“옳거니 그렇게 하는 거야. 먹어야 살아남지.”

 잭은 셀리펙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셀리펙은 이제 앞발로 땅을 파고, 움직이는 것들을 잡았다. 잭은 나무에 묶여 있던 황색 셀리펙을 풀고 무리로 데려왔다. 황색 셀리펙은 하늘을 바라보듯 고개를 들고 휭휭거렸다. 셀리펙들은 큰 몸집을 가진 황색 셀리펙 주위로 몰려들었다. 거대한 놈의 앞발은 두터웠지만 힘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땅을 파기 위해서 앞발이 뾰족하다든지, 아니면 개미를 먹기 위해 주둥이가 길어진다는 진화의 모습은 없었다. 그냥 생긴 대로 땅을 파고 만들어진 대로 개미를 찾아 먹는 것이었다. 뭉툭한 앞발은 얼마나 흙을 헤쳤는지 여기저기에 상처가 보였다. 땅 위와 땅속에 있는 움직이는 곤충들은 셀리펙의 먹이였다. 황색 셀리펙은 계속해 땅을 뒤적거렸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였다. 마치 사막과 같이 햇살이 내리쬐더니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셀리펙의 이동 경로를 따라 쏟아졌다. 잭은 질퍽이는 흙길을 따라 셀리펙을 인도했다. 셀리펙의 털 위로 물방울이 빙그르 미끄러졌다. 비를 맞으면서도 잘 걸었다. 덩치가 큰 황색 셀리펙이 잭 뒤를 바로 쫓아왔고, 그 뒤로 셀리펙 열두 마리가 따라왔다. 잭이 산 중턱에 왔을 때 셀리펙 한 마리가 없었다. 푸른색 셀리펙이 따라오지 못했다. 잭은 황색 셀리펙 목에 줄을 걸고 한 쪽 끝을 나무에 묶었다. 그리고 황색 셀리펙 몸에 입고 있던 조끼를 두른 뒤 끈으로 매듭을 지었다. 열한 마리의 셀리펙이 황색 셀리펙 주위로 몰려들었다. 잭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뛰어갔다. 셀리 박사는 잭의 행동을 스크린으로 지켜봤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뒤뚱거리면서 쫓아왔던 셀리펙.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지만 푸른 셀리펙은 잭을 줄곧 따라왔었다. 잭은 뭐라고 외치며 찾아야 할지 몰랐다. 그동안 편의적으로 종의 이름을 지어왔다. 호랑이, 사자, 토끼, 꾀꼬리 등 생김새와 울음소리가 그 이유였으리라. 하지만 셀리펙은 만든 이의 이름을 딴 것으로 지금 뭐라고 외치며 불러서 찾아야 할지 몰랐다. 잭은 “셀리펙, 셀리펙”이라고 소리쳤다. 비가 내렸지만 산 계곡을 타고 타서 다시 잭의 귀로 “셀리펙, 셀리펙” 하며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잭은 셀리 박사에게 물었다.

 “셀리펙이 어디에 있죠?”

 “잭. 당신은 실수를 하고 있어요. 그냥 돌아가세요.”

 “그럴 수 없어요. 셀리펙을 찾아서 같이 갈 겁니다. 강한 놈을 찾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 아닌가요. 지금까지 그 녀석은 불편하지만 잘 따라왔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한 번 정도 기회를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진정해요, 잭. 이건 단순히 실험일 뿐입니다. 여기에 사적 감정이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사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계약입니다, 계약. 돌아가지 않을 땐 프로젝트에서 빼겠습니다.”

뛰어가는 잭에게 거센 바람과 굵은 빗방울이 몰아쳤다.

 “그만하면 됐어요. 돌아가세요. 잭, 돌아가세요. 남아있는 셀리펙의 안전은 생각해 보셨나요.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요.”

휑휑휑 멀리 셀리펙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잭은 걸음을 멈췄다. 얌전하게 있어야 할 셀리펙이 보내는 신호였다. 잭은 발걸음을 돌렸다. 황색 셀리펙이 묶여 있는 나무로 내달렸다. 잭은 뛰면서 자신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셀리 박사의 얼굴이 상기되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모니터에서 잭이 셀리펙을 향해 뛰는 모습이 나왔다. 셀리 박사는 이들이 다치지 않고, 강인한 생명체로 거듭나기 바랐다. 셀리펙이 얼마나 죽든지 상관이 없었지만 잭은 그렇지 않았다. 셀리펙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양산 배양실에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잭은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돌아온 단 한 명의 인간이었다. 교통사고로 응급실에서 죽은 28세의 필립 스테판. 의사는 과다 출혈로 사망 선고를 했다. 필립 스테판의 육체는 곧바로 셀리 박사의 냉동실로 오게 됐다. 셀리 박사는 시체를 보고 놀랐다. 이번에는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살아있는 세포들을 뜯어내 배양 작업에 들어갔고, 실험을 거쳐 3D프린터로 인공 심장을 만들어 냈고, 투석을 시작했다. 이론적으로 가능했다. 그동안 숨을 불어넣었지만 깨어나지 못하는 절반의 성공을 경험한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수술 후 만 24시간 만에 사람이 눈을 뜬 것이었다. 신체도 움직였다. 언어와 일부 지식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기억하지 못했다. 필립 스테판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도 “내가 누구인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셀리 박사는 필립 스테판에게 당신의 이름은 잭이라고 했다. 셀리 박사는 잭이 회복될 무렵 엉망이 된 얼굴에 칼을 댔다. 또 뇌수술로 기억을 주려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만들어진 기억을 훈련시켰지만 세계사 연대표 수준에 머물렀다. 잭의 육체는 만들어졌다. 그동안 쓰지 않았던 신경이 제대로 힘 받아 몸을 지탱하게 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과 치료가 병행됐다. 셀리 박사는 곁에서 잭의 재활을 지켜봤다. 포크를 제대로 잡았고, 걸을 수도 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잭의 뇌는 논리적인 대화만 할 뿐이다. 셀리는 잭 곁에 앉아 하얀 석회암의 웅장한 파묵칼레 사진을 비롯해 신전과 궁전 슬라이드를 보여줬다. 누드와 사랑의 장면들도, 그리고 살짝 잭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보고, 손을 잡아보기도 했다. 잭은 세계 각지의 영상을 바라봤다.


셀리는 걷기 훈련 중 잭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5년이 지난 지금 셀리보다 나이가 어려진 잭을. 그날은 붉게 물든 둥근 달이 하늘 위에서 셀리와 잭을 비췄다. 달빛 길을 걸으면서 잭과 셀리는 1년 후 신혼여행을, 아니 50년 후 멋지게 늙어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주하는 오토바이가 셀리와 잭을 덮쳤다. 잭은 죽고 셀리는 살았다. 셀리는 자신의 행복을 한꺼번에 앗아간 하늘을 원망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슬픔을 딛고 강해져야 살아남는 곳이 세상이었다.


잭은 언덕으로 달려갔다. 발이 진흙에 미끄러졌다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여러 번. 잭은 셀리펙을 향해 뛰었다. 지켜내야 했다. 비록 잭이 쓰러진다하더라도. 정상에 도착하자 이리들이 이미 셀리펙을 공격하고 있었다. 셀리펙은 도망가지도 않고 나무에 묶여 있던 황색 셀리펙을 중심으로 이리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앞발을 들고 머리로 이리와 부딪쳤다. 이리가 셀리펙의 머리를 물자 털이 붉게 물들었다. 잭이 진압봉을 들고 이리들에게 휘둘렀다. 파직거리는 몽둥이에 이리가 쓰러졌다. 이리는 이제 잭을 놓고 돌아가며 위협했다. 잭은 이리들의 눈을 직시했다. 겁먹은 놈들은 없고 굶주린 눈이다. 한 마리가 뛰어 올라 잭의 머리를 노렸다. 잭은 진압봉을 휘둘렀지만 이리의 머리를 비켜났고, 날카로운 앞발이 잭의 얼굴을 강타했다. 얼굴이 찢겨졌다. 넘어진 잭은 다시 몽둥이를 움켜지고 이리들을 쳐냈다. 어디에서 힘이 솟았는지 잭은 쉼 없이 공격하는 이리들을 하나둘 쳐냈다. 파지직 파지직 사방에서 전기가 튀었고, 지방질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잭을 공격하는 이리와 셀리펙을 먹어치우는 이리. 살리시스산속으로 셀리펙의 울음이 빨려 들어갔다. 잭은 쳐내고 또 쳐냈다. 한쪽에서 이리들은 셀리펙을 먹어 치웠다. 노랑, 파랑, 빨강, 주황색 긴 털이 땅과 하늘 위로 퍼져 나가고 뒤엉켰다. 이리들은 계속해 잭을 향해 몰려왔다. 한 놈을 치고 나면 다른 놈이 달려왔다. 잭은 쓰러졌다. 이리가 잭의 왼팔을 물어뜯어 살점이 뜯겨지자 인조 관절들이 튀어나왔다. 피칠갑된 몸뚱아리를 일으킨 잭은 닥치는 대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시청률은 정점을 찔렀다. 이리들이 물러났다. 셀리펙들은 쓰러져 쌕쌕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묶여있던 황소 셀리펙은 큰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잭은 고함을 질렀다. 눈가에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만신창이가 된 잭은 쓰러진 셀리펙을 바라봤다.

 “유감입니다, 잭.”

셀리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잭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인공 팔뼈로 흙을 팠다.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잭은 셀리펙들과 이리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잭이 쓰러졌다. 땅 아래서 셀리펙이 쌕쌕 숨을 쉬었다.


잭의 심장이 약하게 두근두근거렸다. 찢겨진 팔과 다리는 교체됐다. 잭의 몸은 매끈한 상태로 되돌아왔고, 심장은 새롭게 쿵쿵 뛰었다.

“눈을 떠 보세요, 잭.”

셀리 박사가 잭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잭의 눈에 푸른색 방에서 붉은색 머리를 한 셀리 박사의 얼굴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죠?”

잭이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시청자들이 따라했다.

 “잭의 집이죠.”

셀리 박사가 말했다.

 “수고했어요. 프로젝트는 잘 마쳤습니다. 당신이 셀리펙을 구해냈어요. 인류의 미래를 지켜낸 거죠. 잭, 지도자 모습도 능력도 보여줬어요. 잭, 지난번보다 더 빠르게 몸이 회복되고 있어요. 우리들 역시 당신의 몸에 적응해 있다는 거죠. 사람들도 당신을 좋아해요. 투자자들의 반응도 좋아요. 셀리펙 시즌 2를 기대한다는 군요. 다음은 바닷가 아니 정글이 좋을 것 같네요. 셀리펙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자라나야 하니.”


셀리 박사가 엄지를 들어 치켜세우자 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잭은 기분이 좋아졌다. 잭은 잠시 자신이 잭이 맞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인 것만은 확실했다. 시청자들도 살리시스산에서 살아남은 잭을 보며 마치 자신이 살아남은 것처럼 좋아했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