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순 씨의 가족여행

by 센터 posted Jun 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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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빨리 준비 해야지.”

청량리역에서 큰딸을 만나기로 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씻는다면서 TV만 보고 누워있는 둘째 딸을 보자 덕순 씨는 열불이 났다. 모처럼 들뜬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다시 한 번 타이르듯 둘째 딸을 재촉하고, 이것저것 물건들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정오가 지난 시각임에도 청량리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배낭과 끌끌이 가방을 손에 쥐고 서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큰딸과 밤톨머리 초등학생 손자 녀석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자 둘째 딸이 미리 예매해 둔 좌석을 찾아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 안에는 청춘열차라는 이름에 걸맞게 생기 넘치는 표정의 젊은 연인들과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할머니. 저는 케이텍스 처음 타 봐요.” 하며 밤톨손자가 신기한 듯 창문에 얼굴을 붙였다 뗐다 한다. 덕순 씨가 웃으며 “나도 첨 타본다. 이놈아” 하니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순 씨는 이 순간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일주일에 서너 번 눈도장을 찍는 영선 엄마나 장위동 언니가 ‘며칠 전엔 아들네랑 어딜 갔다 왔네, 저번엔 딸네랑 어딜 갔다 왔네’ 할 때마다 “아휴. 애들이 잘했네. 좋았겠다.”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내심 두 사람이 많이 부러웠다. 계모임에서 조차 계원들이 ‘자식들이랑 강원도를 갔다 왔네, 제주도를 갔다 왔네, 올 여름엔 해외를 가기로 했다네’ 하며 너도나도 경쟁하듯 가족여행 얘길 할라치면 심사가 뒤틀리고, 저절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가끔씩 주말에 오는 자식들에게 “준범이 엄마는 오늘 아저씨랑 준범이랑 고창 청보리밭 축제 간다더라.”, “경님이 엄마는 저번에 딸이랑 진해 군항제에 다녀왔다고 어찌나 자랑을 해 쌌던지···.” 하며 애둘러 얘기를 해봐도, 이놈의 자식들은 눈치는 엿 바꿔먹었는지, 아님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바람 불었는지 둘째 딸이 연휴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만, 일정이 맞지 않는 셋째부터 막내까지는 빼버리고, 단기방학으로 애를 돌볼 수밖에 없는 지 언니랑 떡하니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다. 아마도 다른 자식들보다 집에 자주 오는 둘째 딸이 속내를 알아차린 것이리라.

‘암. 한 놈이라도 말귀를 알아듣는 자식이 있어야지.’

덕순 씨는 가끔 밉상인 둘째 딸이 이럴 땐 예뻐 보였다.

“엄마, 벌써 도착했어?”

큰딸이 내릴 준비를 하자 밤톨손자가 못내 아쉬운 듯 밍기적 밍기적 과자봉지를 들고 일어났다.

 ‘수다 떤 지 몇 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거 머시기 케텍스가 빠르긴 빠르군.’

덕순 씨도 아쉽게 가방을 챙겨들었다.


가평역까진 빨리 도착했으나, 그 다음 목적지인 남이섬까지 가는 덴 우여곡절이 제법 많았다. 20여 분 넘게 줄서 기다린 택시는 남이섬 선착장까지의 긴 차량 행렬로 인해 아예 운행을 하지 않았다. 이에 인도보다 빠른 지름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밭두렁 사이를 줄 지어 걸어가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또 남이섬 부근에 도착하면 묵을 방 하나 정도는 있겠거니 했던 두 딸의 빗나간 예상 덕분에 덕순 씨와 밤톨손자는 하릴없이 두 사람을 기다려야했다. 결국 두 딸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 나타나서야 작은방 하나를 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착장에서 30여 분을 기다려 겨우 도착한 남이섬에는 전국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남이섬으로 여행을 왔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넘쳐났다. 노란 깃발을 손에 든 중국 관광객들까지 가세하여 그야말로 남이섬은 인산인해였다. 덕순 씨는 두 딸을 따라 시원하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기도 하고, 극중 유진과 준상이의 첫 키스 장소라는 곳에서 밤톨손자랑 뽀뽀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하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살랑거리는 강바람을 맞으며 큰딸과 밤톨손자가 운전하는 오리배를 타고 있으니,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영선 엄마랑 장위동 언니를 만나면 메콰타이어··· 메타세콰이아··· 음··· 배용준이 나왔던 남이섬에 갔다 왔다고 꼭 얘기 해야지.’

어둑해진 섬을 빠져나오면서 덕순 씨는 잘 떠오르지 않은 메타세쿼이아 나무 이름을 여러 번 읊조리며 생각했다.


그날 저녁,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덕순 씨였지만 들뜬 기분에 두 딸이 따라주는 가평 잣막걸리를 두 잔이나 비웠다. 얼콰한 기분으로 민박집에 들어와 넷이 방에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옛 추억을 떠올리니 옛 동무들과 여행 온 것 마냥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뚱맞은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한창 피우던 이야기꽃도 어느덧 새벽녘이 되면서 시들해졌고, 일찌감치 곯아떨어진 밤톨손자의 새근대는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음 달에도 여행가자는 큰딸의 목소리가 눈꺼풀이 자꾸 감기는 덕순 씨의 귓가에서 맴맴 돌았다. 덕순 씨의 꿈속에서 가족들이 탄 하얀 비행기가 구름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글 | 김현하

누구나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나 소설을 좋아하고, 한번 시도한 단편소설의 호평에 힘입어 착각의 늪을 헤엄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상상은 나의 힘! 공공운수노조·연맹에서 일하며, ‘화초(花草)’를 무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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