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목 잡는 트라우마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유재형 쉼표하나 회원



2015년 6월 8일 오후 1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졸업장이 같은 친구의 차를 타고 수원을 출발했다. 4시가 넘어서 여수에 있는 대형 병원에 들러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가 대략 오후 6시 정도였다. 필요한 용품들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짐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대형 마트로 향했다. 친구는 지방 생활 경험이 많아 세심하게 여러 가지를 샀다. 결국 9시가 다되어서야 대형 마트 푸드코트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이곳에서 묵고 있던 형님들을 소개받고 함께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마셨다. 한참 소주와 삼겹살로 어색함을 씻어내고 있을 때 형님 한 분이 “내일 혈압 측정하려면 술 그만 먹고 일찍 자야 할 텐데.”라는 것이다. 어리둥절한 나는 그 말을 무심결에 넘기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2시가 넘었고 그제야 잠자리에 들었다.


“우르릉 꾸우웅~ 허어그으으윽~ 구르릉 쿠우우.”

어려서부터 축농증이 있는 친구는 잠을 자면서 전쟁놀이를 한다. 전투기가 날아가며 폭격을 하고 탱크가 굴러가고, 들판에 유혈이 낭자한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 새벽 5시 20분 뻑뻑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세면을 하고 밥을 먹었다. 숙취와 불면 때문에 입은 거칠고 머리는 뻐근했다, 이런 컨디션으로 처음 해보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승용차로 약 20분을 달려 여수산업단지 내에 있는 앤씨씨(NCC) 화학공장에 도착했다. 이 공장 일부 라인 가동을 중단시켜 놓고 그 파이프라인에 ‘보온’을 다시 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나는 그 ‘보온’이라는 걸 난생 처음 시작하려는 것이다.


건설 현장에 신규 출근하면 첫날 현장에 투입되기 전에 안전교육을 먼저 받아야 한다. 그때 혈압을 측정하는데 최고 혈압 커트라인이 140인 곳이 있고 많이 봐주는 곳은 159까지인 곳도 있다. 현장마다 혹은 회사마다 다르다.


교육 시작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았다. 친구는 전부터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신규자라 교육을 받기 위해 혼자 교육장에 남았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셨다. 정신이 맑아지는 게 아니라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다.


드디어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안전교육. 안전화에 각반을 매고 안전띠를 착용한 담당자가 자기소개와 회사 소개를 했다. 연이여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 말을 한참 하더니 끔찍한 영상물을 보여준다. 안전사고로 인해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한 내용이다. 이렇게 교육은 거의 끝나고 마지막으로 담당자가 한마디한다.

“자, 이제부터 혈압 측정을 하겠습니다. 호명하면 한 분 한 분 앞으로 나와 주세요. 참고로 저희 회사는 150까지입니다. 150이 넘으면 집으로 가셔야 합니다.”


교육장 맨 앞 열 책상에 자동 혈압 측정기가 두 대 놓여 있고, 담당자가 혈압을 측정하는 노동자들의 측정 결과를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다. 나는 불안했다. 신경이 날카롭고 심장 박동이 몸을 흔들 정도였다.

“유재형 반장님, 측정결과 156입니다.”

반장님? 나중에 알았는데 건설 현장에서는 처음 보는 남자를 다들 이렇게 부른다.

“반장님은 물 한 잔 마시고 잠시 쉬셨다가 다시 한 번 측정하세요.”

찬물을 연거푸 세 잔을 마셨지만 진정은커녕 심장은 아예 나를 잡아먹으려는 듯 으르렁댄다. 누가 들을까 민망할 정도다. 


2차 측정 결과 160. 아~ 망했다! 내 표정은 아마 거의 울상이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안전교육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유재형 반장님만 남으시고 모두들 현장으로 들어가세요.”

안전교육장에 나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담당자가 다시 왔다.

“이리 따라 오세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에게 직접 측정해 봅시다.”

“팔 걷으시고 숨 편히 쉬시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의사는 한손에 쥔 고무 튜브로 바람을 불어넣었다.

“어이구, 165나 나왔네. 너무 높네요. 낮은 쪽도 90이 넘는 걸로 봐서 고혈압이 틀림없네요.”


순간 나는 거의 필사적이었다. 여기가 어딘가. 서울에서 4시간이나 차를 타고 온 여수다. 이 먼 곳까지 와서 혈압 측정 몇 번하고 되돌아가다니. 처자식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

“선생님 제가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먹고살자고 처음으로 이 일을 하러 그 먼 길을 왔는데 이렇게 돌아가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담당자도 난처한 표정이다.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기록에 남는 거라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뭡니까?”

나는 심장이라도 꺼내줄 표정으로 물었다.

외부 병원에 가서 평소에는 고혈압이 아니라는 의사소견서를 받아오시면 됩니다.”


콜택시를 불러 타고 여수 시내에 있는 종합병원 내과를찾아갔다. 그곳에는 이미 작업복 차림 노동자들 여남은 명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두 번을 측정한 후에야 겨우 142라고 찍힌 혈압 기록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소견서를 작성하기 위해 의사와 간단한 상담을 했다.

“평소에 혈압이 높은 편이세요?”

“아니요. 어제 서울에서 4시간 동안 차 타고 내려오느라 피곤한데다가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그랬더니 신경이 곤두서서 혈압이 높게 나온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130정도 나옵니다.”

나는 변명이라도 늘어놓듯 하소연하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혈압 측정하기 전에 커피도 마셨나요?”

“예.”

그제야 의사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소견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저녁 음주부터 아침에 커피를 마신 것까지 모두가 혈압 측정을 앞두고는 피해야 하는데 별 생각 없이 했던 것이다. 의사는 혈압이 다소 있기는 하나 작업에 지장을 줄 만큼 고혈압은 아니므로 작업에 투입해도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소견서를 이만 사천 원을 받고 내게 주었다.


그 사건이 트라우마가 돼서 병원에서는 정상 혈압이 측정되는데 현장에만 가면 혈압이 높게 나온다. 그래서 어느 때는 청심환도 먹어보고, 가능하면 동료에게 부탁해서 대리 측정을 시키기도 한다. 요즘은 아예 혈압약을 처방받아 집에 두고 신규 현장 가기 며칠 전부터 안전교육 받는 날까지 복용한다. 아직 혈압 때문에 현장에 들어가지 못한 적은 없지만 이 트라우마가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