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안국역에서

by 센터 posted Apr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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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하 쉼표하나 2기 회원



“이번역은 안국역. 안국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전철 문이 열리자마자 벌어진 문 사이로 크고 작은 태극기를 둘둘 말아 쥔 노인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나도 집회 예정시간 보다 조금 늦은 탓에 그들과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나처럼 노란리본을 가방에 달고 있는 사람들보다 몇 곱절은 많아 보이는 태극기부대와 같이 개찰구를 나오자 벽면에 두 개의 화살표가 친절하게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상국민행동은 파란색, 탄기국은 빨간색. 각각 표시되어 있는 화살표가 바쁜 걸음에도 웃음이 절로 삐져나오게 했다.

‘탄기국 집회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니···. 흐흐흐.’

작은 태극기가 박음질 되어 있는 빨간 모자에 군복을 입은 사람, 태극기를 꽂은 배낭을 맨 사람, 온 몸을 태극기로 휘감은 사람, 양손에 태극기와 현수막을 든 사람 등 수많은 태극기부대 틈 속에서 난 역사를 무사히(?) 탈출하였다. 몇 번 두리번거리자 보이는 대오 깃발을 찾아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이 많이 따뜻해졌다고는 하나 아침의 쌀쌀한 공기는 여전히 빈속인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배낭에 넣어 온 긴 머플러를 꺼내 목과 얼굴을 칭칭 두르고 손에는 장갑까지 꼈다. 따뜻한 기운이 몸에 감돌면서 안정감이 찾아왔다.


무대 위에서는 한창 발언을 마친 사회자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탄핵을 인용하라! 박근혜를 감옥으로!”  

“탄핵을 인용하라! 박근혜를 감옥으로!”

구호를 따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서 사뭇 비장한 결기가 느껴진다. 몇몇 연설자들의 발언이 이어지고, 뒤이어 구호 여러 개가 연달아 뿌연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며 안국역 언저리에서 흩어졌다.


오전 11시가 가까워 올 무렵.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탄핵심판 시간이 거의 다되어 가는데 스크린 화면이 나오지 않자 재촉하는 소리였다. 뒤이어 스피커가 작동되지 않아 잠시 고치고 있다는 사회자의 안내 멘트가 따라붙었다. 그 와중에 안국역사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선 탄기국 집회에서 틀어 놓은 군가가 서늘한 바람을 타고 이쪽 편으로 흘러 들어왔다. 몇 번의 같은, 근처 장소의 집회를 통해 흥얼거리게 되는 알 듯 말 듯한 노래였다.


오전 11시. 기억될 만한 역사적 심판의 시간. 안국역 주변과 바닥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긴장된 눈이 모두 스크린으로 쏠렸다. 마침 스크린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스크린 화면에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가 판결을 받는 것도 아닌데 입술이 바싹 마르고, 저절로 침이 꼴딱 넘어갔다. 이정미 권한대행의 얼굴 표정 하나,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온 몸의 신경세포들이 모두 일어서 있었다. 이정미 권한대행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매우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먼저 그동안의 진행 경과와 탄핵의 적법성 등을 설명하고 나서, 탄핵 사유와 관련한 선고가 시작되었다. ‘문체부 사직 종용은 임면권 남용 인정이 어렵고, 세계일보 인사 개입도 구체적 압력 행사가 분명하지 않습니다’라는 선고문을 낭독했을 때 사람들의 입에선 아쉬움이 섞인 한숨이 간간이 새어 나왔다. 이어서 세월호 참사 관련한 얘기가 나오자 안국역 주변은 쥐 죽은 듯 더 조용해졌다.

“어떠한 말로도 희생자 위로가 어려우나 국민생명 위협 상황이 생겨도 구체적 행위 의무가 없고, 정치적 무능력 등이 직접적 탄핵사유가 된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 숨죽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선고는 냉엄하다 못해 처참했다. 난 당연히 탄핵 사유로 인정될 줄 알았기에 잘못 들었나 하고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러다 탄핵 기각되는 거 아냐?”,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과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걸 보면서 세월호 참사가 인정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무대 앞에 자리한 세월호 유가족들의 갈기갈기 찢긴 가슴이 또 한 번 찢기며 무너져 내렸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선고가 아닐 수 없다. 잠깐 동안의 웅성거림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스크린 속 이정미 권한대행의 입을 향했다.

 “피청구인의 행위는 최서원의 이익을 위해 권한을 남용하고, 이권 개입을 직·간접적으로 도왔습니다. 또한 최서원의 국정 개입을 철저히 숨겼으며, 사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를 단속하였습니다.”

낯선 최순실의 개명한 이름과 함께 피청구인인 박근혜 대통령의 범죄 사실이 조목조목 나열될 때마다 환호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잠깐도 이정미 권한대행의 입은 쉬지 않았다. 한 시간을 염두해 둔 선고 시간이 빠르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고 느낄 때였다.

“피청구인의 파면으로 얻는 헌법 수호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이정미 권한대행의 마지막인 듯 단호한 목소리가 순간 안국역 주변을 긴장시켰다.

“피_청_구_인  대_통_령  박_근_혜_를  파_면_한_다!”


술래가 와서 손으로 치려는 순간 ‘얼음’을 외친 아이처럼 모든 게 일순간 정지되었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박근혜를 파면한다. 파면한다···.’

‘박근혜를 파면한다’가 돌림노래처럼 귓가에 메아리치면서 다시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무대 앞에는 ‘대통령 박근혜 파면’이란 자막이 멀리서도 뚜렷하게 잘 보일 정도로 스크린을 꽉 채우고 있었다. 

‘아! 결국···.’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가 해냈다는 것을. 만감이 교차하며 몇 개월간의 광화문 촛불집회 잔상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아빠 목말을 탄 어린아이의 촛불, 머리에 세월의 눈이 내린 할아버지가 든 피켓, 재치 넘치고 아이디어 기발한 청년들의 퍼포먼스. 광장의 환경미화원이 되어 쓰레기를 줍던 시민들. 그리고 그들이 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과 함께 수없이 목 놓아 외쳤던 ‘민주주의’와 ‘정의’ 그리고 ‘헌법조항’. 책속의 활자로나 볼 수 있었던 민주주의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낸, 끝이 보이지 않던 생생한 촛불 물결 등. 인공눈물을 달고 사는 뻑뻑한 눈이 오랜만에 자연스럽게 촉촉해졌다. 계속 된 패배 끝에  찾아온 승리가 낯설지만 눈물겹게 값지다는 것을, 꼬깃꼬깃 쓰레기통 맨 밑바닥에나 처박혀 있을 줄만 알았던 ‘정의’라는 단어가 아직 소각장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것을 가슴깊이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사람들, 가지고 온 깃발을 힘차게 흔드는 사람들, 일어서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들,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는 사람들, 무심히 자리에 앉아 울음을 삼키는 사람들. 피켓을 들고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흥분과 감격이 뒤섞인 인파 사이로 바닥에 떨어진 피켓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박근혜 없는 3월, 그래야 봄이다.’

3월 10일. 안국역에 먼저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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