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녀의 관계_고현종

by 편집국 posted Mar 0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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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하세요 홍00입니다.” 예쁘게 생긴 여인이 인사를 한다.

선배가 말을 덧붙인다. “서울대 치대 85학번이야.”

선배의 애인이었다.

 

22년 전 일이었다. 사00 활동을 했던 선배가 애인이라며 한 여인을 소개 시켜 주었다. 그 여자가 홍00이다. 이 여자를 그 후로 한 번 정도 봤을 뿐인데,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 있다. 인상이 깊은 이유는 얼굴이 엄청 이쁘다는 것과 서울대 치대출신 엘리트라는 것, 거기에 노동운동까지. 더불어 부잣집 딸 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피부와 옷차림. 이런 여자가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고졸 출신에다가 대기업 노동자도 아닌 전체 직원 10명의 작은 회사 해고노동자 출신인 난 여러모로 위축됐다. 이 때 만큼 가난과 짧은 가방끈, 영세사업장 노동자라는 것이 창피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숨기고 싶은 현실이었다.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를 애인으로 둔 선배역시 부러웠다. 끼리끼리 논다고 했나. 선배도 서울대 출신이다.

 

오늘 그녀를 만나러 간다. 큰 딸 치아교정을 위해서 병원을 알아보다가, 언젠가 신문에서 치과의사로 활동 중인 그녀를 떠 올린 것이다. 그녀가 일하는 치과와 우리 집은 1시간 거리에 있다. 딸아이는 “왜 이렇게 먼 곳 까지 가야 해?”라며 투덜거린다.

 

“치료 받을 땐 의사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이 선생님은 내가 좀 아는 분인데 진짜 좋은 분이야, 절대 바가지 씌우지도 않고!” 라며 큰 딸을 다독였다.

“의사 선생님도 아빨 잘 알아?” 생각지 않는 질문에 당황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병원을 가기 두 시간 전부터 방안을 서성이고 있다. 그녀가 날 알 수 있도록 할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그녀는 날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에게 난 그저 평범한 노동자 중 하나로 기억됐을 터이기에. “00이형 후배입니다”라고 한때 그녀 애인이었지만 지금은 국회의원 남편이 된 선배 이름을 팔까? 뭔지 모르는 감정이지만 그녀가 날 알아주었으면 했다.

 

망설여진다. 간호사가 내민 카드에는 이 병원을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를 체크하게 되어 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녀와 나의 관계가 설정 될 것이다. 아주 오래된 옛 동지 관계냐 의사와 환자 보호자 관계냐 설정하는 갈림길이다. 결국 어떤 것에도 체크하지 않았다.

 

딸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진료실에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많이 늙어 있었다. 과거의 세련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수수한 맘 좋은 이웃집 아줌마 이미지가 대신하고 있었다.

 

난 포기했다. 그녀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을. 어쩌면 00선배와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 한 게 그녀에게는 아픔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냥 의사와 환자 보호자 관계로 맺어 가기로 결심했다.

22년 전 그녀와 만남은 나만 기억하는 만남이었다.

22년 후 그녀와 만남은 서로가 기억하는 만남이 되었다. 관계가 발전한(?) 것이다.

2013년 새해에 새로운 소망 하나가 추가 되었다.

그녀가 토요일 이면 지역에 어려운 이웃에게 틀니, 임플란트, 구강진료를 해 주는 좋은 의사로서 계속 남아주길 바란다. 난 노인운동을 하는 진보정치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련다.

 

글 │ 고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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