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피어난 인문학 잔치_푸르게

by 편집국 posted Mar 0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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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마지막 2주간, 내 마음은 엉망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마음먹은 대로 정리되지 않은 되다가 12월19일 선거 결과는 설상가상이었다. 자연스레 마음도 더 움츠려들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신문도, TV도 아예 보기 싫었다. 그렇게 한동안 우울한 시간을 보내다 훌쩍 버스에 몸을 실었다. 문득 내 고향집 아랫목이 그립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폭설은 서울과 수도권에만 내린 것이 아니었다. 버스 창가로 보이는 고속도로 주변, 충청과 경상지역도 온통 눈이었다.

 

마침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열리는 인문학 강좌도 같은 날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집안 아제 뻘 되는 분이 지난해부터 진행하고 있는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 요즘 인문학이 유행처럼 회자되고 있지만, 정작 지방 작은 시골에서 정기 강좌를 진행한다는 건 처음 접했다. 진행자의 대단한 열정이 느껴졌다. 나는 작년 5월에 열린 강좌에 한 번 참석했었다. 당시 강의는 <한겨레> 편집국장을 하셨던 언론계 원로 성유보 선생이 하셨다. 당시 서울에서 내려가는 시간이 늦어져 직접 강의를 듣지는 못하고 후에 강의자료를 열심히 읽은 기억이 있다. 뒷풀이 자리에서 그 분을 만나 인사드릴 수 있었는데, 대학에서 언론학을 공부했던 나로서는 무척 영광스런 기회였다.

 

이번 강좌는‘문학자 매천 황현(1855∼1910)의 역사가로서의 지성(부제 1910년, 매천이 목격한 조선)’을 주제로 한 부산대 한문학과 김승룡 교수의 강의였다. 마침 방학 중인 대학생 조카와 같이 참석했다.

황현! 한일합방 소식에 자결한 선비. 아스라한 기억 속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들은 이 한 줄이 사실 내가 아는 전부였다. 긴 설명보다는 아래 그의 절명시(絶命詩) 일부와 강의자료 뒷부분에 김교수가 정리한 내용을 옮기는 게 좋겠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헤아리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1910년 조선의 풍경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외세에 굴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고자 저항하던 의병이 하나둘 씩 스러져가고 끝내 신화적 세계로 산화하며, 수백 년동안 조선을 이끌어왔던 지식인, 양반들은 전통과 개화, 조선과 외세 사이에서 정체성에 균열이 생기고, 자의식이 부서지는 정신분열을 앓으며 더이상 엘리트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며, 근대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건설과 전통의 파괴는 기실 제국주의에 편입되어 가는 슬픈 식민지의 모습에 다름 아닐 뿐 아니라 주체가 없는 건설로 인하여 끝내 자기 파멸로 가고야 말 것이었다.”

 

강의 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강연을 들으니 꼭 『매천야록』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맙습니다. 저는 강의를 들은 소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장 와 닿는 부분은 『매천야록』의 내용을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한 내용 중 첫번째 ‘의병의 최후’에 대한 것입니다. 1910년 망국 과정에서 끝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항쟁한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중, 이름 모를 백성들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당시 왕실과 권력자들이 일본에 항복하거나 적극적으로 친일했지 않습니까. 결국 나라와 역사를 지키는 것은 평범한 백성이라는 사실이지요. 말씀드리다 보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떠오릅니다. 당시 힘없는 농민들의 투쟁을 청나라나 일본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진압했던 아픈 역사 아닙니까. 또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안중근 선생님과 『1984년』과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도 생각납니다. 제가 몇 달 전 조지 오웰에 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후략)”

 

강연 이후 이틀간 고향 집에서 꿀맛 같은 휴식을 즐겼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못다 읽은 강연자료와 관련 책을 펼쳤다. 마침 읽어보려던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의 책 『근대를 말하다』에 황현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아니 안타까웠던 것은 책에 실린 초라한 사진 한 장이었다. 평범하다 못해 빛바래 스러져가는 묘지 사진 아래 한 줄 설명이 나를 꾸짖었다.“황현의 묘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퇴락한 무덤이 이 시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는 너무 지난 시대를, 의롭게 살다간 수많은 애국지사를 소홀히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지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결국 시간은 뒤풀이되고, 지난 시절의 모습을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올바른 인간의 삶이자 역사 아닐까 싶다. 이번 강좌는 흐트러진 나를 다시 바로세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더욱 역사 공부에 매진하리라 생각해본다.

 

글 │ 푸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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