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골이 된 운하산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조주호 ‘2019 삶의 기록과 치유를 위한 글쓰기’ 수강생



운하산은 우리 마을의 상징이었다. 주변에서 제일 높았고 아름다웠다. 동네에서 보면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초등학교 소풍 장소 1순위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았고, 산 밑을 휘감아 흐르는 유등천과 어울려 풍광도 아름다웠다. 널찍하게 펼쳐진 자갈밭은 어린학생들이 한나절 정도 도시락을 까먹고 안전하게 뛰노는 장소로 제격이었다. 


노다지를 캐겠다며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운하산과 마을 모습은 조금씩 변해갔다. 운하산은 예부터 구리가 매장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역 국회의원 아들이 이를 확인하고 광산을 시작했다. 1969년 초등학교 2학년 때다. 광산 개발은 다이너마이트 폭음소리부터 시작됐다. 굴착기로 자그마한 구멍을 뚫고 그곳에 뇌관이 달린 다이너마이트를 넣는다. 도전선을 연결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기스위치를 연결하면 다이너마이트가 폭파되면서 바위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부서진 바위 조각을 긁어내고 굴(터널)을 파고 들어갔다. 굴이 깊어지면서 광차들이 오갈 수 있는 레일이 깔렸다. 처음에는 산의 측면에서 횡 방향으로 굴을 뚫어갔지만 더 많은 광석을 캐내기 위해 땅 밑으로도 파고 들었다. 유등천 수면 100미터 아래까지 파고 들어갔다고 한다.


운하산 북쪽으로 선광장이 들어섰다. 구리가 박혀있는 광석을 잘게 부수고 구리를 추출하는 시설이다. 태어나 처음 본 공장이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고 함석으로 지붕을 덮었다. 광석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 광석을 잘게 부수는 분쇄 시설, 밀가루와 같이 잘게 부순 돌가루 속에서 구리를 추출하는 선광 시설을 운하산 경사면을 따라 설치했다.  


광산업자에게 필요한 건 구리뿐! 가치 없는 돌가루와 분쇄 및 선광 과정에 사용했던 많은 화학약품은 모조리 유등천으로 흘러들었다. 환경보호라는 단어조차 들어보지 못한 시절이었으니 정화시설이 있었을 리 없고 관공서와 마을의 요구도 없었다. 선광장에서 쓸모없는 돌가루가 화학약품과 뒤범벅된 채 유등천으로 유입되기 시작된 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생명력이 강하거나 적응력이 뛰어난 물고기가 살아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등천 건너 양지바른 언덕엔 광산 사람들이 사는 사택이 생겼다. 광산 운영에 필요한 기술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노동력을 제공하는 광부가 살았다. 광산이 성황이었을 때는 광산촌 사람이 원주민보다 많을 정도였다. 광산 월급날, 양조장이 있는 주막거리는 대목을 맞은 장터처럼 북적였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고기 안주가 등장했고 주점 매상은 올랐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오랜만에 만난 이웃사촌끼리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모습은 사라졌다. 만취한 사람끼리, 힘자랑을 하는 사람끼리, 또는 원주민과 이방인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운하산이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 흉물처럼 보이는 게 가장 가슴 아팠다. 이곳저곳 뚫어놓은 굴 입구는 커다란 눈구멍이 파여 있는 해골바가지 같았다. 굴을 뚫으며 파낸 돌무더기는 푸른 계곡을 채워서 햇빛에 반사될 때면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듯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계곡물처럼 보인 돌무더기가 운하산이 흘리는 눈물이었다는 것을. 내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운하산이 어떻게 견뎠는지, 오랜 세월 안고 있던 구리 광석들이 부서지고 짓이겨지는 아픔을 엄마 운하산이 어떻게 참고 버텼는지 알지 못했다. 


광산 덕분에(?) 인근 마을 중에서 제일 먼저 전기가 들어왔다. 호롱불보다 밝았던 남포등만으로도 만족하며 살던 때다. 남포등보다 훨씬 밝고 깨끗한 백열등이 밤을 밝히는 순간 동네사람 모두가 박수를 치며 신기해했다. ‘마이카시대’를 미리부터 누리던 광산 사장의 코로나 자동차를 본 적도 있지만 마이카는 나와는 거리가 먼 남의 나라 이야기라 생각했다.


광산 사장은 마을 외곽에 널찍한 저택을 지었다. 금산군에서 가장 크고 멋진 정원을 갖춘 집이었을 것이다. 저택에는 우리가 처음 보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가끔씩 사장이 없을 때 관리인이 잔디밭에서 텔레비전을 보여줬다.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 선수의 레슬링, 〈의리의 사나이 돌쇠〉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운하산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었다. 


한때 운하산에서 금맥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장은 운하산 땅속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금광을 찾았다. 결국 실핏줄만한 금맥만 확인했고 구리 광산마저 채산성이 떨어져 1979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광산은 문을 닫았다. 금맥이 발견되지 않아서 운하산의 아픔이 커지진 않았고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운하산은 지금도 해골 같은 모습이다. 해골을 다시 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