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삶의 한 자락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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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훈 쉼표하나 회원을 만나다


김현하 쉼표하나 2기 회원



“2년제 전문대를 나왔어요. 관광학과를 졸업했지요.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IMF가 터졌는데, 왠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관광학과를 나오면 기대하는 직업들이 있잖아요. 호텔리어나 관광가이드 등···. 전부터 저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직업훈련소에서 산업디자인 6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고민하다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리고 서울에서 인쇄편집학원을 10개월 정도 다녔어요. 원래는 글을 쓰고 싶었죠. 글쓰기가 좋아서 방송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갔고, 거기서 동아리모임 활동을 했는데 글 쓰는 게 정말 재밌었어요. 책도 좀 읽고, 글도 쓰면서 책을 만지면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이나 감촉, 디자인 편집 등 다른 부분들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글과 관련된 일을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합정동에 있는 소규모 기획사에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노동 강도가 아주 심하고 매일 늦게 끝나는 거예요. 매일 야근의 연속이었죠. 집이 인천이었는데 합정동에서 늦게 끝나다보면 친구들 만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일은 힘들고, 친구들 만나기도 쉽지 않고, 스트레스는 쌓이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있더군요. 확진을 받은 건 않았지만···.


인쇄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라도 한 듯 깡마른 외모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로 그는 덤덤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내가 이야기를 경청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탓인지 그의 그런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결국 그 기획사를 그만두고, 다른 기획사에서 1년, 또 다른 기획사에서 2년, 이렇게 몇 군데를 전전하다 을지로에 있는 기획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인쇄 쪽 일이 작업 환경이나 노동 조건이 매우 열악해서 직원들의 이직률이 원래 좀 높은 직종이죠. 을지로 인쇄 골목은 분위기가 왠지 좋았어요. 원래 잉크 냄새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그 골목 분위기가 저랑 좀 맞았다고나 할까? 디자인과 여러 가지 인쇄물 작업을 하는 성진애드컴이라는 합판집인데, 온라인화되면서 전국의 일을 모아서 하는 회사였어요. 저는 인쇄물 접수받는 일을 했어요. 처음엔 저 말고 70~80여 명이 수기로 전국의 온라인을 통해 접수 받았는데 대부분이 인건비가 저렴한 나이 어린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중 제가 나이가 많은 편이였죠. 그런데 이 회사가 참 나쁜 회사인 게 주변 인쇄소 등에 낮은 단가로 하청을 주고, 대금을 잘 지불하지 않는 거예요. 하청에 지불할 돈으로 사업 투자나 땅 매입을 했죠. 그리고 접수받는 일을 자동화시스템으로 바꾸고 난 후 직원을 해고하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악랄하게 직원들을 괴롭혀서 스스로 그만두게 말이죠. 나이 어린 직원들에게 사장 아들이라는 관리자가 이 새끼 저 새끼하며 불러댔고 지 맘에 안 드는 일들이 생기면 험악한 얼굴로 윽박지르며 접수받는 직원을 생판 일해본 적도 없는 출고실로 보내버린다거나 하는 일들이 자주 있었어요. 접수 일을 하다가 전혀 해보지 않은 출고실 일을 하기란 쉽지 않거든요.”


그의 이야기에 문득 왜 전태일 열사와 평화시장 골목의 어린 여공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나이 어린 친구들이 많았다는 대목에서인 것 같다. 허리 한번 펴기도 힘들었던 먼지투성이 속 작업장과 졸린 눈으로 작업 물량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미싱을 돌렸던 어린 여공들. 작업장 환경은 물론이고 인권마저 유린당하며 아스라이 청계천 골목 어딘가로 사라져간 이름 모를 어린 노동자들과 전태일 열사.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책속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청계천 평화시장의 열악한 작업 환경과 노동 여건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그가 말하고 있는 인쇄 골목으로 고스란히 옮겨와 현재 진행 중인 것이다. 


“갑질하는 회사도 그렇고, 바뀌는 구조들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졌어요. 그리고 친한 친구가 전혀 말도 되지 않는 오해를 받고 출고실로 가게 됐어요. 사장 아들이 친구가 하지도 않은 일을 엮어서 했다며 다그치며 몰고 갔죠. 전 그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친구는 가만있는데 오히려 그 말을 듣던 내가, 더 이상 이런 회사에 다닐 수 없겠다 싶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들고 집에 와버렸어요. 근무 시간이었는데 말이죠. 그 회사에 들어간 지 한 4~5개월쯤 되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집에 오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그 회사를 이대로 그만둔다는 게 분해서, 계속 그렇게 직원들을 노예 부리듯 대할 것이 또 속 터져서 그만둘 수 없었어요.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의기투합할 수 있는 몇몇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 후에 어떻게 노동조합 설립을 해야 되는지 몰라 무작정 서울지방노동청에 찾아갔죠.” 


내가 노동조합에 적을 두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노동조합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사뭇 궁금했다. 어지간한 중학생 이상만 되어도 민주노총이란 조직을 알 텐테, 조합원들도 잘 알지 못하는 서울지방노동청을 찾아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수긍하게 된 것을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부터였다. 


“서울지방노동청에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인쇄노조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 딴에는 이 조직의 활동 부분도 잘 모르겠고, 장소도 눈에 띄지 않게 비밀스럽게 있는 거예요. 혹시 사측 편이 아닌가 의심했어요. 그래서 서울지방노동청으로 먼저 찾아간 거죠.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노동청에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두 군데를 알려주더군요. 민주노총에 전화를 했더니 언론노조로, 언론노조에선 인쇄노조로 가라고 했어요. 제가 바로 의심했던 그 인쇄노조로요. 인쇄노조 사무장이 오히려 저를 이상하다는 듯 의심의 눈초리로 봤어요. 서로 오해를 풀고 노동조합을 같이 할 사람들을 먼저 조직해보라는 조언을 듣고 왔어요. 우선 제가 있는 접수실 먼저 조직하기 시작해서 20여 명가량 조직했어요. 그러나 사장 아들이 상주하고 있는 출고실은 접근하기 힘들었어요. 이래저래 우여곡절 끝에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마쳤어요. 노동조합 설립을 하고 나서 처음 교섭을 하는데 무척이나 떨리더군요. 일단 근로기준법부터 잘 지키는 걸로 접근을 했죠. 그러나 만만치 않았어요. 사측과 여러 차례 교섭을 진행했는데도 교섭이 지지부진 잘 풀리지 않았어요. 끝내 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신청을 하고 파업을 결정했어요. 노동조합이 생겼다는 사실을 회사가 알고 난 후 탈퇴하는 조합원이 생겼고, 파업을 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탈퇴자들이 생겼어요. 생활이 어려운 직원들이 많았거든요. 어떤 직원은 회사에서 빚을 얻어 갚고 있는 사람도 있었죠. 10~15명까지 줄어든 조합원들을 데리고 사측과 싸우긴 쉽지 않았어요. 부분파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쟁의 행위를 했어요. 외부 투쟁사업장 연대도 다니며 투쟁을 이어 나갔어요. 사측에선 전담노무사와 용역업체 직원들을 고용해서 어떻게든 파업을 막으려고 했어요. 머리를 삭발하고 천막 농성 등 파업 투쟁을 1년 가까이 계속 했죠. 2005년 말, 겨울이라 너무 추웠어요. 그때 당시 남은 조합원은 저 포함 7~8명이었는데, 이러다간 투쟁도 끝나기 전에 얼어 죽을 것만 같았죠. 결단을 내려야 했어요. 계속 이렇게 투쟁을 하는 게 맞는지 잘 판단이 서질 않았어요. 천막 투쟁을 접고 회사 건물 점거를 시작했어요. 40일 가까이 점거 농성을 끝내고 타결 아닌 타결을 했죠. 타결을 하는데 상급단체 지도부 의견도 그렇고 조합원들 의견도 분분해서 쉽지 않았어요. 근로기준법 준수, 노동조합 인정, 사장 아들의 갑질 문제 해결 등을 내걸고 투쟁을 했는데, 결국 아무 소득이 없었어요. 끝까지 남은 사람들과 노동조합이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나싶어 복귀를 했어요.” 


난 복귀 후 사측의 태도가 궁금했다. 예전의 내 경험에 의하면 그 뒤에는 숙청의 칼바람이 불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사측은 호락호락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요. 사장아들 대신 전문경영인을 고용하더니 노동조합을 압박하기 시작했어요.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들을 ‘업무 실적이 낮다거나, 합의 내용을 지키지 않는다는 식으로 괴롭혔어요. 이미 회사는 자동화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노동조합을 없애고, 구조조정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파업이 끝났고 회사의 일상 업무에 복귀했으니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집행부 선출을 얘기했죠. 충분히 연임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게 선뜻 다시 하겠다고 나서지지가 않는 거예요. 파업 후에 피로감이 한층 더했거든요. 을지로 인쇄골에 디자이너 모임을 조직한다는 핑계로 분회장을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렇게 차기 집행부가 들어서고 신임 집행부에 힘을 실어줘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그러는 사이 사측은 이미 잘 작성된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자동화 시스템 개발로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으니 먼저 희망퇴직자를 받겠다는 공고가 붙었어요. 비조합원과 조합원 누구도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회사는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 여섯 명 정도 되는 노동조합원 모두와 그 외 파업 투쟁 당시 새로 뽑았던 직원을 대상으로 구조조정 하겠다고 했어요. 복귀한 지 두세 달 정도 지났을 때였죠. 이제 막 일상 업무에 복귀했지만 적응할 시간도 없이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하니, 조합원들은 다시 싸움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하기 힘들었던 거죠. 결국 사측이 제시한 석 달 정도 임금의 위로금과 퇴직금을 받고 회사를 나오기로 결정했어요. 저도 그때 회사를 나왔습니다.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고통스러운 날들이었어요. 어디 연대단위에 가서 할 말이 없었어요. 노동절에도 혼자 동네를 떠돌아 다녔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왜 좀 더 잘 싸울 순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연대 단위에 가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노동절에도 혼자서 동네를 방황하고 다녔다는 그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야기를 풀어놓은 그도 회상을 하면서 가슴에 맺혔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의 삶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기간이었기에 그만큼의 큰 상흔이 저 몸속 어딘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느끼게 되는 자책감과 남은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은 어느 누구보다 더 클 것이기에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져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말한 아쉬움까지도. 그 아쉬움이 이번 인터뷰를 통해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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