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과 실천, 낭만의 안산노동대학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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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희  안산노동대학 운영위원장



2018년 최고의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애신’과 ‘유진초이’의 클로즈업 화면에서 예상치 못했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애신 : 새로운 노동운동이 무엇이오? 

유진 :   혼자서는 못하오. 안산노동대학에 입학하면 제일 좋소. 10강을 모두 들어야 하고            미션도 해야 하오. 뜨겁고 열정이 있어야 하오.

애신 : 꽤 어렵구려. 그러나 일단 입학은 해봐야겠소.


진지하게 시청하던 수강생들이 빵 터진다. 대사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애신과 유진의 얼굴에 수강생의 목소리가 더빙되었기 때문이다. 배우 이병헌의 중저음을 기대했던 수강생들은 배꼽을 잡았다. 다음 장면에서는 지난 석 달 동안 배웠던 강의 내용이 이어진다. 추노꾼이 남북평화를 이야기하고, 함안댁이 열공을 부추기고, 장 포수가 청년 세대의 안녕을 이야기한다. ‘아, 맞다. 저런 내용이 있었지.’ 모두 뭉클한 느낌으로 사회연대 투쟁을 기억 속에 저장했다.강의 시간에 졸던 장면, 뒤풀이에서 수줍게 소개하던 장면, 지리산 역사기행의 뜨거웠던 밤이 흘러간다. 이걸로 끝이라니 아쉽다. 2018년 6기 안산노동대학 수료식 풍경이다.


안산지역 노동학교의 출발


성공회대학교와 함께하는 안산노동대학(이하 안산노동대학)은 2013년부터 시작된 안산·시흥지역의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이다. 해마다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 동안 매주 수요일 저녁에 강의가 진행된다. 전국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반월·시화공단에서 그나마 잔업을 거절할 수 있는 유일한 요일이 수요일인데, 그 귀한 시간에 공부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있다. 누가 시켜서 온 것도 아니다. 무료도 아니다. 제 돈 내고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안산지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노동학교가 있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20년 넘게 운영되었던 노동학교에서 안산노동대학의 포맷을 따왔다. 매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강의, 조 편성과 조 모임, 1박 2일의 수련회, 배운 내용을 극으로 발표하는 것까지 똑같다.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들불처럼 생겨나던 노동조합들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 노동학교가 만들어졌다. 먼저 생긴 노동조합이 뒤따라오는 다른 노동조합을 응원하고, 이제 막 생긴 노동조합에서는 부담을 덜어낼 수 있는 교류의 장이 노동학교였다. 노동자의 철학, 노동 정세, 한미FTA 같은 것들이 단골 강의였는데 강의가 끝나면 안산역 앞 원곡동 거리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어깨를 걸고 노래를 불렀다. 노동학교는 2006년 즈음인가 문을 닫았다. 산별노조들이 만들어지고 총연맹 자체의 교육역량이 쌓이면서 외부 교육 지원이 더는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역사회의 노동자 교육이 다시 필요해진 건 우리 지역의 현실 때문이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전국적으로 10% 안팎이라지만, 반월·시화공단은 2% 남짓하다. 워낙 대기업 하나 없는 공단인 데다 2차 3차 하청업체에 비정규 영세사업장이 모여 있는 곳이라 노동조합은 언감생심 엄두를 못 내는 분위기였다. 미조직 노동자를 묶어 세우기 위해 많은 활동가가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2012년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가 만들어졌고, 옛날의 노동학교는 안산노동대학으로 업그레이드되어 부활했다. 2013년 10월 16일. 안산노동대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2.역사기행.JPG

2018년 역사기행, 지리산 빗점골에서


안산노동대학에서 만난 사람들


지난 8년 동안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있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 데모하는 사람들은 다 ‘빨갱이’인 줄 알았다던 어떤 언니는 “내 인생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 내용을 배울 줄은 몰랐다.”라고 했다. 그 사업장에 얼마 전 노동조합이 생겼고, 언니는 선전부장을 맡았다.


뒤풀이 자리에서 소감을 발표하는 게 정말 괴로웠다던 또 다른 언니는 이제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한다. 회사의 부당한 처사를 꾹 참고 버텨야 하는 줄만 알았는데 어느덧 ‘저항’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의 ‘간덩이’를 키운 것은 안산노동대학”이라고 말한다. 한 고등학교 선생님은 “젊은 날에 만났던 맑은 눈빛들이 여기 살아 있었네.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여전한 사람들이 있었다니.”라며 두 손을 모았다.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선생님이 우리와 같은 노동자라니, 나와 같이 공부를 한다니!’ 다른 수강생들도 감격스러워 했다. 백발이 성성한 63세의 어르신도 잊을 수 없다. 일자리 알선 교육인 줄 알고 신청하셨다던 그분은 그런 교육이 아닌 걸 알고도 끝까지 수강했다. 그리고 한동안 소식이 끊겼나 싶었는데 7년이 지난 올해 70세 나이로 복학생이 되어 돌아오셨다.


우리 수업이 교실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동학 농민이 죽창을 들고 봉기했던 언덕에서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을 직접 느껴보기도 하고, 사북탄광의 컴컴한 갱도에서 산업 역군의 이름 아래 쓰러졌던 노동자들의 삶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 옛날 ‘1,500만 원’의 거금을 뿌리친 덕에 양심의 거리낌 없이 평생을 살 수 있었다던 사북탄좌 전 위원장 할아버지의 말씀도 가슴에 새겼다. 노근리 평화공원의 쌍굴다리 총알 자국마다 추모의 꽃을 만들어 달기도 했고, 비무장지대에서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기도 했다. 철원에서는 철원군 농민회 형님들과 새벽까지 해방춤을 추며 기차놀이를 했다.


순천이 고향이라던 한 언니는 “내 고향 순천에 여순항쟁이 있었다는 걸 태어나 처음 들었다.”라고 했다. 전국 곳곳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가 있었고, 선배 노동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배움이 연대와 실천으로 이어져


배움의 최고 형태는 실천, 그리고 연대라고 했던가.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교육 기간이 아닌 때에도 무언가를 하기 위해 꾸준히 모였다.


첫 실천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위한 활동이었다. 우리의 이웃이 참사의 당사자들이었다. 틈틈이 모여서 노란 리본을 만들고 서명판을 들고 전철역과 번화가로 나갔다. 우리만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딜까 고민하다가 수리산과 관악산에 올랐다. 연주암에 서명대를 펼치니 등산객들이 ‘이걸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냐’면서 너도나도 서명에 참여해주던 기억이 난다.


수강생 중에 대기업의 사내하청에서 일하는 언니들이 있었다. 오른쪽 라인에서는 원청회사 직원이 일하고, 왼쪽 라인에서는 다른 하청업체 직원이 일한다. 원하청 계약 종료를 앞두고 해고 위기에 놓인 수강생들이 주축이 되어 원청에 ‘직고용’을 요구하며 싸웠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싸움은 이겼다. 안산노동대학에서의 배움이 아니었다면 소위 ‘주동자’들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안산노동대학을 거쳐 간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도 뭔가 달랐다. 자신들이 수많은 미조직 노동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시절을 잊지 않는다. 2018년 설립된 한국와이퍼 노동조합은 첫 단체교섭에서 사회연대기금을 요구하고 따냈다. 규모가 크지 않은 노동조합이지만 집행부서에 공단 미조직사업부가 따로 있다. 이들은 지역의 노동자 공동체인 ‘좋은이웃’과 함께 사회연대 기금으로 산재 처리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미조직 노동자들을 위해 생활비를 지원하고, 저금리의 소액대출 사업을 한다.


낭만과 여유, 누구나 선생인 곳


게다가 안산노동대학에는 낭만과 여유가 있다. 10강을 모두 마치고 수료장을 받는 날엔 초등학교 학예회 같은 조별 발표회가 진행된다. 무대에 서는 것이 부담된다며 고개를 흔들던 사람들은 막상 수료식 날이 가까워지면 눈에 불을 켠다. 누군가 헬멧, 목장갑, 안전 조끼들로 의상을 제공하고 노래방에서다 같이 녹음한 개사곡에 맞춰 크레용팝의 ‘빠빠빠’ 가락으로 ‘빠빠빠 노동대학’ 율동을 한다. 노동대학이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런 춤을 춰보겠냐며 은근히 신이 난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고 평생 잔업 철야에 뼈 빠지게 일만 해봤지 학사모는 처음 써 본다.”라는 중년의 노동자. “좋은 사람들 속에 있으니나도 덩달아 좋은 사람대접을 받는데,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라던 나직한 고백. 3년 동안 함께 적금을 부어 백두산으로 졸업여행을가던 날, “못난 남편과 30년 동안 사느라 고생했소.”라며 아내에게 반지를 끼워주던 로맨티시스트도 있었다. 최저임금 노동자가 다수인 수강생들을 위해뒤풀이에 달려와 술값을 보태고 가는 안정된 노동조합 동지들의 마음 씀이 있고, 때론 수업에서 불편한 질문이 오가더라도 웃으며 들어주는 열린 마음이 있다. ‘주장’보다 ‘사람’에 대한 따뜻함을 먼저 보여주는 사람들. 그 넉넉함과 낭만에 중독이 되는 것 같다. 


2.졸업식.jpg

2018년 3회 졸업식


지금 한창 8기 수업이 진행 중이다. 아쉽게도 아직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인해 ZOOM 화상 수업으로 진행되는데, 스태프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한다. 어떻게 하면 화면으로만 맺어지는 관계를 조금 더 끈끈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쾌적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할까, 어떻게 하면 사각의 모니터 안에서도 감동하게 할까, 수강생들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스태프들의 쉼 없는 애씀이 안산노동대학을 뭉클하게 하는 밑거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안산노동대학은 누군가는 가르치고 누군가는 배우는 관계가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영향받는 살아 있는 학교다. 모두가 선생이다. 

“나, 안산노동대학 다녔어.”라는 말이 우리의 자부심이 되도록, 오늘도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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