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피비린내 나는 ILO 기본협약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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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는 노동자 민중의 피와 땀이 잔뜩 묻어 있다. 1919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창립대회를 하고 출범한 국제노동기구는 1914년에 일어나 1918년 끝난 1차 세계대전과 1917년 11월 일어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결과였다. 1919년 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파리강화회의는 베르사유 조약을 채택했고, 그중 13장은 국제노동기구의 역할과 기능을 못박았다. 1919년 가을 워싱턴 창립대회에서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라는 문구가 국제노동기구 헌장에 박히게 된 데는 전쟁 없는 평화에 대한 염원과 함께 노동자를 위한 정의 실현을 통한 ‘산업평화industrial peace’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국제노동기구가 회원국 노사정 3자 합의로 채택하는 국제노동법인 협약은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서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인류가 서로를 살육하는 전쟁의 재발을 막고 당시 세계 곳곳을 집어삼킬 듯 거세게 타오르던 공산주의 혁명을 예방하겠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일의 세계에 필요한 정의는 일하는 조건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서 출발한다는 믿음 속에서 국제노동기구 창립대회가 채택한 1호 협약은 공장에 적용되는 일의 시간hours of work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1810년대 박애주의 공장주였던 로버트 오언(1771~1858)이 제기했던 하루 8시간이 백 년이 지난 1919년 국제법이라는 형태를 통해 인류 문명의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호 협약은 하루 8시간에 더해 주 48시간을 못박고 있는데, 아직도 영세사업장에서는 68시간이 합법으로 간주되는 대한민국은 조선이 식민지였던 시절에 만들어진 1호 협약을 비준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가야 원래 그렇고 정부는 자본가와 같은 편이라 1호 협약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쳐도, 입만 열면 2천만 노동계급 운운하는 노동운동조차 1호 협약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현실에 대해 ‘자뻑complacency’이라는 말 말고 달리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국제노동기구 창립대회는 실업자와 여성 보호, 밤일과 아동노동 규제와 관련해 6개 협약을 채택하고 폐회했다. 


1920년대 활활 타올랐던 세계 경제의 호황은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이 폭락하면서 막을 내렸다. 1920년대는 극우 정치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1922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1883~1945)가 주도하는 파시스트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1926년 일본에서 히로히토(1901~1989) 천황이 권력을 잡으면서 ‘다이쇼 민주주의’가 막을 내리고 극우세력과 군부의 입김이 커졌다. 1933년 1월 독일에서는 민주적 선거를 거쳐 히틀러(1889~1945)가 이끄는 나치(국민사회주의노동자당)가 권력을 잡았다. 정권을 거머쥔 극우 정치 세력의 첫 조치는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과 단체교섭의 해체였다. 대신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는 노동자 단체가 등장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전선German Labour Front이 만들어졌고 일본에서는 산업보국회가 조직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조합이 해산당하지는 않았으나 국가를 등에 업은 어용단체와 경쟁을 벌여야 했다. 어용단체는 ‘저녁이 있는 삶After Work’ 같은 복지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을 포섭했다. 


1929년 가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으로 번졌다.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붕괴하였고 세계 각국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다 보호무역주의와 군비 경쟁으로 치달았다. 1933년 3월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뉴딜New Deal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이는 미국 국내 사정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조차도 보호무역주의와 자국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누구도 국제적 수준의 뉴딜을 제안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인류는 1930년대 내내 전쟁 소식을 듣게 된다. 1935년 10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1936년 7월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장군(1892~1975)이 이끄는 군대가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시키려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1937년 7월 일본군이 중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 전투기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공습을 가했다. 


노동조합을 불법화하고 일터의 조건을 국가가 결정할 수 있게 된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에서 노동자는 경제적 목적과 군사적 목표를 위해 자유롭게 동원될 수 있었고, 이런 사정으로 극우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은 이 세 나라는 이른바 ‘추축국the Axis powers’이 되어 세계 전쟁에 나설 수 있었다. 


섬나라 영국을 뺀 유럽 전역을 석권하고 소련을 침략한 독일군은 1942년 8월 시작되어 1943년 2월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 전세는 역전되어 독일군은 후퇴를 거듭해야 했고, 소련군은 베를린을 향한 진격을 계속했다. 1944년 5월 소련군은 크리미아와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고 루마니아에 진입했다. 스탈린(1878~1953)이 지휘하는 적군이 동유럽을 휩쓸면서 유럽의 전황이 연합국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자 미국과 영국은 마침내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세계 전쟁이 추축국의 패배와 연합국의 승리로 마무리될 것임이 분명해지던 1944년 4월과 5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국제노동기구 총회가 열렸다. 당시 국제노동기구는 노동 문제가 무역 및 금융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전쟁이 끝난 후 평화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제노동기구 자신이 노동 기준만이 아니라 무역 기준과 금융 기준까지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1919년과 비슷한 희망찬 분위기에 한껏 고무된 국제노동기구는 파시즘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 국제 질서를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열띠게 논의했다. 그 결과 1919년 채택된 헌장에 담긴 문구인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에 버금가는 문구를 헌장에 삽입하게 된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Labour is not a commodity’라는 명언이 그것이다. 


식민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이 노동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취급한 결과 인류가 서로를 살육하는 세계 전쟁이 일어났다는 반성이 총회장을 압도했다. 노동이 상품으로 취급되지 않는 질서, 다시 말해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 히로히토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않게 하기 위한 국제 기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 완전고용과 사회보장, 그리고 단체교섭권의 중요성을 담은 ‘필라델피아 선언’이 1944년 5월 10일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자 히틀러는 자살했고 독일군은 항복했다. 그해 8월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을 침공하자 소련군의 도쿄 점령과 일본 열도의 분단, 그리고 천황제 폐지에 겁을 먹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1944년 봄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시작된 국제노동기구 논의는 1948년 7월 9일 노동자단체 설립과 활동에 대한 국가 개입을 금지한 87호 ‘결사의 자유와 조직할 권리 보호 협약’ 채택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극우 파시즘 체제에서 자행되던 국가에 의한 노동조합 활동 간섭을 용인하면 안 된다는 국제 기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 년 후인 1949년 7월 1일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반(反)노조 차별 행위acts of anti-union discrimination’, 즉 부당노동행위를 하도록 허용해선 안 된다는 98호 ‘조직할 권리와 단체교섭 협약’이 채택되었다. 이로써 단체교섭은 노동자의 권리인 동시에 사용자의 의무라는 원칙이 국제법으로 확립되었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은 국제노동기구엔 활기찰 때였으나, 국제 정치적으로는 우울한 시기였다. 1945년 4월 루스벨트가 임기 중 사망하면서 등장한 트루먼(1884~1972) 행정부는 소련 봉쇄 정책을 개시했고 이는 냉전을 촉발했다. 미국에 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반공주의 광풍이 불었고 이를 계기로 미국 민주주의도 후퇴했다. 그 결과 미국이 주도한 국제노동기구 협약 87호와 98호는 역설적으로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고, 이 두 협약은 아직도 미국이 비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한미동맹은 정치와 군사 영역뿐만 아니라 노동 문제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남한에 드리웠고, 그 결과 2020년이 지나가도록 대한민국 역시 국제노동기구 87호와 98호 협약을 비준하지 못하고 있다. 


한미동맹으로 살아남은 조선총독부 체제가 지금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노동자를 위한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보장을 훼방하면서 오늘까지도 명줄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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