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불빛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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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승범  休서울이동노동자합정쉼터 사무장



“1970년 10월 7일, 그는 모처럼 만에 세상의 무관심의 벽 일각을 뚫는 데 성공했다. 그는 새로운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 희망은 잠시 반짝이다가 다시 사라지려 하였다. 신문 보도로 인해 잠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상에 관심을 가지는 듯했던 사회여론은 다시 잠잠해지려 하고 있었다. 잠시 동요되었던 노동청과 기업주들은 몇 차례 노동자들을 속이며 시간을 끌다가 사회의 관심이 멀어지자 다시 배짱을 내밀었다.” 


《전태일 평전》의 한 대목이다. 이를 다시 써 보았다. 


“2020년 7월 17일,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조합원들은 1년 하고도 63일 만에 노동조합 필증을 교부받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새로운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 희망은 잠시 반짝이다가 다시 사라지려 하였다. 필증 발급 소식으로 잠시 대리운전 노동자들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는 듯했던 사회여론은 다시 잠잠해지려 하고 있었다. 잠시 동요되었던 노동청과 카카오모빌리티는 몇 차례 노동자들을 속이며 시간을 끌다가 사회의 관심이 멀어지자 다시 배짱을 내밀었다.”


1.집회.jpg

서울고용노동청 앞 투쟁문화제


그렇다. 3일 안에 발급해야 하는 노조 필증을 428일을 끌다 뒤늦게 내준 고용노동부나, 법외 노조 딱지를 떼고 처음으로 한 교섭 요구에 단체교섭 거부 공문을 보낸 카카오모빌리티를 보고 있노라면,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사회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 그뿐인가 자본가들은 그전에 없던 특수고용형태 노동과 플랫폼 노동을 만들어내며 책임을 회피하고 알고리즘 뒤에 숨기까지 하였으니, 전태일 열사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근로기준법에 더해 IT 공부까지 해야 할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노동자들은 바보회와 삼동회보다 조직화한 전국규모 산별 단위 노동조합을 만들어냈고, 힘이 약한 특수고용직 노동자들도 연대와 공동행동으로 몸집을 키우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0월 7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는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지부, 아시아나케이오지부의 농성 천막이 어깨동무하듯 나란히 서 있다. 또 곳곳에서 벌어지는 투쟁문화제에는 퀵서비스노조, 라이더유니온, 방과후강사노조 등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연대와 격려 방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3년 전부터 이어진 플랫폼 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조사·연구도 한층 복잡해진 디지털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조건 개선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작년과 재작년 노동계, 시민사회, 국회, 연구기관 등에서 플랫폼 노동을 주제로 한 토론회가 줄을 이었다. 언론과 방송의 기사 생산도 계속되고 있다. 일례로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MBC 〈스트레이트〉는 지난 7월에 플랫폼 노동을 2회로 나누어 편성하면서 기자 두 명이 각자 배민 커넥터와 쿠팡이츠 쿠리어에 등록하여 일주일간 배달 노동을 경험하기도 했다. 방송은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노동자를 쥐어짜는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고 플랫폼 업체의 횡포와 플랫폼 노동의 위험성을 폭로했다. 9월 3일 방영한 EBS 〈다큐 잇it〉에서는 대리운전 노동자의 일과를 동행 취재하는 방식으로 플랫폼 노동의 현실을 보도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과 일명 ‘숙제’를 통해 노동자에게 직접 지휘·감독에 버금가는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처럼 언론의 조명을 받고, 국정감사장에서 플랫폼 노동이 의제가 될 정도로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지만, 정부의 대응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스타트업 기업의 수적 증가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사고와 사망이 끊이지 않는 저임금·무대책 플랫폼 노동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9월 3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이하 환노위) 소속 정의당 강은미 의원이 공개한 근로복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대리운전 노동자 중 산재보험 적용 가능 노동자는 3명뿐이다. 전속성 기준으로 가입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가입하더라도 적용 제외 신청이 가능해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현재 국회 환노위에서 논의 중인 특수고용 노동자 고용보험 적용 방식도 마찬가지다. 이 글이 활자화될 시점에 논의가 어떻게 흐를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만약 산재보험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경우, 고용보험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는 노동자는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업체의 대응은 더 가관이다. 대리운전업체인 카카오모빌리티는 고용노동부의 노동조합 필증 발급으로 대리운전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문제 삼을 수 없게 되자, 이제는 사용자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대리운전 중개 플랫폼으로서, 당사가 단체 협약을 체결할 수 있는 지위가 있는지 불분명하다는 법률검토 의견”을 내세우며 중개 플랫폼의 지위와 알고리즘의 장막 뒤로 숨어버렸다. 


1.선전전.jpg

피켓 시위 중인 김주환 위원장. 오른쪽으로 농성 천막 세 동이 보인다. 


이에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조합원들은 노조법 2조 개정을 통한 사용자·노동자 범위 확대와 산재보험·고용보험 전면 적용을 위한 전속성 기준 폐지를 주장하며 80일 넘도록 노숙 농성을 이어갔다.


투쟁을 이끄는 김주환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위원장은 고민이 많다. 공장 시대에 만들어진 노동법을 플랫폼 노동 시대에 맞게 바꾸는 일부터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공동소집권자로서 비정규직(특수고용직) 노동조합 간 연대에 이르기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책적 현안보다 더 큰 고민은 노동자 조직화다. 하루아침에 노동자 수십 명이 조합에 가입하는 날도 있지만,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울 때면 탈퇴하는 조합원 수도 적잖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가 흔들리지 않는 까닭은 내가 본 희망을 그도 보았기 때문이리라. 전국 각지에서 헌신하고 있는 대리운전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들, 그대들은 승리의 증거이자 희망의 불빛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 박노해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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