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의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프로젝트

by 센터 posted Aug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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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서로돌봄연대은행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처장



전태일 열사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 무슨 일을 할까? 나이는 73세일 테고, 권영길 대표처럼 정치를 하다 은퇴하고 원로로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심상정 의원처럼 정치를 계속하고 있을까? 단병호 위원장처럼 노동운동 교육단체를 만들고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할까? 아마도 전태일 열사는 시대가 요구하는 운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60~70년대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자신과 자신보다 더 어린 노동자를 위해 나섰듯이 노인인 자신과 고령화된 사회, 노인 빈곤, 세대 갈등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계’를 살리는 당사자 운동을 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전태일 열사가 살아보지 못한 노년, 노년 활동을 하고 싶어도 못 했던 활동, 노년유니온 어르신들이 전태일 정신 계승 프로젝트를 만들어 ‘관계’를 중요시하고 살리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노인은 외롭다, 그리고 쓸모없는 사람이다

“누군가와 밥을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강병학(가명. 73) 어르신은 외출을 잘 하지 않는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말에 어르신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나가면 다 돈이잖아.”라며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텔레비전을 볼 때 밥 먹는 장면에 관심이 간다고 한다.
“외로운 노인네들이 주로 혼자 밥 먹어. 그걸 보면 동병상련을 느끼지.”
어르신은 은평구에 있는 고시원에서 혼자 산다. 젊은 시절엔 건축 현장 소장으로 일하며 자기 이름으로 된 2층짜리 단독 주택에서 살았다.
“말년에 고시원에서 살리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질 않았는데 인생이 어쩌다 이리됐는지···.”
한숨과 함께 탄식을 길게 뿜는 어르신. 

생활이 어려워진 건 55세에 퇴직하면서다. 아내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쓰러지고 거기에 아들까지 우울증을 얻으면서 병원비 부담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10여 년에 걸친 병치레 끝에 아내가 사망하고, 아들은 그날로 집을 나가서 지금껏 소식이 없다. 그 사이 어르신은 아내와 아들 병시중으로 집을 팔고 고시원을 전전하게 되었다.
지금 어르신 수입은 52만 원이다. 기초연금 25만 원, 노인 일자리 급여 27만 원. 고시원 월세 25만 원, 약값 15만 원을 제하면 12만 원으로 한 달을 산다. 될 수 있으면 외출하지 않는 이유를 알 만하다. 
“난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야. 세상에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나를 찾는 사람도 없고.”
강병학 어르신은 지금 생각해 보니 아내와 아들 병구완을 할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자부심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공동체가 지속 가능하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어려울 땐 도움을 받는 것이 공동체 형성의 기초이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가장 작은 행동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내가 김치를 담그는데 고춧가루가 부족하다. 부족한 고춧가루를 마트에 가서 돈 주고 산다. 이러한 거래에서는 나도 마트 점원도 다음에 상대방에게 무엇을 주거나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받으리라는 기대가 없다. 돈을 통한 교환은 그 자체로 완결된다. 이렇게 되어서는 공동체가 창조되지 않는다.

다른 가정을 해보자. 고춧가루를 사러 밖으로 나간다. 나가다가 옆집 할머니를 만난다. “어디 가?”라는 할머니 말에 고춧가루 사러 마트에 간다고 대답한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고춧가루가 많다며 가져가라고 한다. 돈을 드리려고 해도 받질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물질적인 관점에서 볼 때 두 경우 모두 나는 고춧가루를 가지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는 다른 어떤 것이 덩달아 생겨났다. 내가 옆집 할머니를 다시 만날 때 반갑게 인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집 안에 짐을 옮겨 달라고 하면 기꺼이 해 드릴 것이다. 고춧가루 하나가 호혜적인 선물이 됨으로써 조직 형성의 기초가 된 것이다. 조직이란 서로 주고받는 선물 교환의 결과로서 오랫동안 형성되어 왔다. 반대로 조직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형성의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된다. 금전적 교환이 호혜적인 선물 교환을 대체할 때 공동체가 붕괴한다. 이런 방식의 공동체   (조직) 운영은 조합비를 운영, 관리, 조합원 복리 후생에 쓸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면 조합비는 어디에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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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서로돌봄연대은행은 지역사회 취약계층 어르신들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노년유니온)

조합비 전액은 연대 사업으로 사용

노년유니온 어르신들은 조합비 전액을 세대 간 연대사업과 취약계층 지원 사업에 사용한다. 시민이 자발적으로 출자해서 모은 기금을 청년 전세보증금으로 조성하는 ‘터무늬있는집’에 900만 원 출자했다. 단순한 공간을 넘어 노인과 시민, 청년이 함께 재능을 공유하며 관계를 맺는 세대 협력형 공유주택 운동이다. 이를 계기로 청년들과 관계가 만들어지고 세대 간 이해가 넓어지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가난한 노인이 청년 주거 문제에 연대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또한 지역에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노인, 노숙인, 장애인을 위해 공공병원인 동부시립병원에 어르신들이 2019년부터 지금까지 약 1,500만 원을 지원했다.
어르신들은 이런 운동이 ‘노인’이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노인 서로돌봄연대은행’이라고 불렀다.

노인 서로돌봄연대은행의 네 가지 가치

노인 서로돌봄연대은행은 하나의 복지 프로그램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고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는 연대 운동이다. 이 운동이 추구하는 네 가지 가치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첫째는 사회적 자산이다. “이 사회의 진정한 재산은 사람이며, 모든 사람은 나누고 줄 것이 있다.” 우리는 모두 나누고 줄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자신이 불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주 작은 힘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위하여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가는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노동의 정의이다.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가치를 생산해주는 모든 활동은 노동이다.” 현대 사회는 돈을 버는 것만을 일이라고 규정한다. 시장 경제는 비시장 경제의 토대 위에 있다. 비시장 경제가 없으면 시장 경제는 존재할 수 없다. 아이를 기르고, 가족을 지키고, 이웃을 안전하고 활력 있게 만들고, 약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며, 불의를 고쳐나가며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데 드는 노력이 포함되도록 노동을 새로이 정의해야 한다.

셋째는 호혜성이다. “내가 누군가를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며, 도움을 받는 것은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주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받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 없다. 내가 도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도움을 받음으로써 모든 회원이 평등한 위치에 서게 한다. 이렇게 도움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서로 돕고 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끌어낼 수 있는 ‘서로 돕는 지역의 그물망’을 만들 수 있다.

넷째는 사회적 자본이다. ‘나’와 ‘너’를 ‘우리’로 연결하여 서로 돕고 나누는 지역 공동체를 형성한다. 시장 경제에서는 서비스나 물품을 주고받을 때 돈을 사용한다. 그러나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랑과 정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서비스를 주고받는 시간은 모여서 공동체의 자본이 된다. 이 사회적 자본은 ‘나’와 ‘너’를 ‘우리’로 연결하여 사랑과 정이 넘치는 건전한 지역사회를 만들어간다.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 지 50년 되는 해이다.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고 연대를 이루는 방식을 노인들은 ‘노인 서로돌봄연대은행’이라는 운동으로 실험에 나서고 있다. 50년이라는 시간은 그동안의 조직대상, 활동, 조합비의 운영에 대한 새로운 상상과 전환을 고민할 때다. 민주노총, 한국노총도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청년, 노동시장에서 강제로 은퇴한 노년에 대한 조직화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예산 편성 등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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