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디폴트값의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

by 센터 posted Aug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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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



전 세계 사람의 10% 정도는 왼손잡이라는 통계가 있다. 왼손잡이들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불편을 겪는다. 모든 환경이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키보드 숫자 패드는 오른쪽에 위치해 있고, 강의실 1인용 책상은 오른쪽에 필기를 위한 팔걸이가 놓여 있다. 오른손잡이용 가위는 왼손잡이가 사용하면 손가락이 아파진다. 지하철 게이트도 카드단말기는 오른쪽에 있다. 페트병, 볼륨 손잡이 방향도 모두 왼손잡이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오른손잡이들은 왼손잡이의 불편을 모른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 인구의 50%는 여성이지만 세상은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특히 미리 직업 세계를 선점한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맞게 세상을 구성해 놓았다. 최근 발간된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 저자는 남성 디폴트값의 세상에 관한 통계들을 모아 문제제기하고 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여름철 사무실 온도는 여성들에게는 5도가량 낮다. 공장 작업대는 여성들에게 높다. 화학약품은 같은 용량에 노출되어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위험하지만 기준이 남성이어서 여성에겐 위험해도 기준치 이내로 인식된다. 남성과 다른 체형을 가진 여성을 위한 방탄복이 없어 가슴은 조이고 밑은 들린다. 작업에 필요한 각종 도구는 남성의 손 크기와 악력에 맞추어 설계되어 여성에게 너무 크거나 무겁다. 기존에 연구된 샘플과 다른 여성들의 경험은 오염변수로 취급되어 삭제되어 왔다. 


서울산재판정위원회의 2018년 심의 현황을 살펴보면 남성의 심의 건수는 2,180건이고, 여성은 553건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기 때문일까? 한국에서의 산업재해는 남성 중심의 물리적, 화학적 유해인자에서 비롯한 재해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남성들의 작업장 환경에서의 위해 요인을 중점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반면 여성들이 겪는 작업장 내 폭력과 성폭력, 반복적 작업에서 오는 만성질환, 생식 문제에서 오는 질환 등이 제외된다. 


보육교사들이 아이들을 들어 올리면서 발생하는 근골격계 질환이 산업재해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일이다. 아이들이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는 중량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산재판정위원회에서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남성위원이 아이들이 무겁더라는 증언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는 경험은 여성만의 것이었고, 남성이 기준값인 세상에서 아이들이 무겁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들을 출산했는데 산재를 인정받기까지 10년이 걸렸다. 2010년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역학조사를 거쳐 대법 결정까지 10년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다. 산업재해로부터 보호해야 할 노동자의 기준에는 몸속에 아이를 잉태하고 키울 수 있다는 설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피해는 여성들의 경험이 중심이 된다. 때문에 그 경험은 삭제되고 무시되기 일쑤였다. 박원순 전 시장의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신상을 공개하고 피해 사실을 낱낱이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는 그 자체로 2차 가해를 조장하는 일이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조치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조사한 사람, 조사 내용을 보고 받은 사람 또는 그 밖에 조사 과정에 참여한 사람은 해당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피해 근로자 등의 의사에 반하여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나마 이 조항은 여성들이 끈질기게 싸워 최근에야 비로소 획득한 것이다. 피해 경험이 대중들에게 회자되는 것은 피해자에게 불법 촬영물이 도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이 역시 기준값의 남성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피해자 입장에 서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은 지독한 노동권 침해이자 여성 노동자에게 심대한 건강상 위협이며 매우 빈번한 일이지만 아직도 한국의 산업재해 항목에는 등재되지 않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이 산재 항목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게 담당 공무원은 한 회의 석상에서 남녀고용평등법에도 있고 형법에도 있는데 왜 산재에서까지 이를 다루어야 하냐고 되물었다. 


남성 디폴트값의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는 일상의 불편과 보장받지 못하는 권리, 삶의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남성 중심 세상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는 세상의 기준은 이미 평등하고 공평하며 정의롭기 때문이다. 오른손잡이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여성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 커져야 하고 여성의 경험은 더 많이 연구되어 데이터로 축적되고 활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기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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