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비정규노동센터 신입 상근자의 한마디

by 센터 posted Jun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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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찬 (1).JPG

2020년 5월 20일,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이하 비정규센터)에 큰 변화가 있었다. 10여 년 동안 비정규센터와 함께한 이남신 소장이 서울노동권익센터(이하 권익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그 빈자리에 인터뷰 주인공인 문종찬 회원이 왔다. 그가 권익센터 소장으로 있을 때부터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는 항상 에너지가 넘쳤다. ‘활동가’라는 말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비정규센터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을지 궁금했다. 비정규센터에 속한 나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법 사사로운, 그러면서도 공적인 인터뷰를 진행했다. 


행정보다는 활동


인터뷰 당시 문종찬 소장은 휴가 중이었다. 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 자주 사무실에 일하러 나왔다. 그에게 워커홀릭이 아니냐고 물으니, “역량이 모자라서 남들보다 일을 더 한다.”고 장난스럽게 답했다. 인터뷰하는 내내 그의 얼굴은 밝았다. 그는 비정규센터 소장으로 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직접 만날 일을 고대했다. 


그가 권익센터에 있을 때도 현장을 멀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약이 있었다. 권익센터는 비정규센터보다 규모가 크고, 행정 업무 비중이 꽤나 높다. 그는 결재하기에도 바빴다. 현장으로 눈을 돌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권익센터는 직접적으로 조직화를 이끌기보다는 지원하는 조직에 가깝다.  그는 비정규센터에서 행정 업무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길 기대했다. 그리고 아파트 경비 노동자, 봉제 공제회 등 조직화 사업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쓸 것이라고 덧붙였다.


왜 그 노동자는 울고 있었을까?


그는 노동 현장 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곱 살이었을 무렵, 개신교 목사인 그의 아버지는 인천 4공단 근처로 집을 옮겼다. 공장 사역을 해보길 원했기 때문이다. 공단이 조성된 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중에는 이제 막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온 여성 노동자도 있었다. 그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야간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를 자주 들락날락거렸다. 인생 상담도 받고, 사람도 만나고, 전화도 쓰고. (당시에 전화 보급률이 낮았다. 그래서 교회에서 종종 빌려 썼다.) 교회는 일종의 사랑방이었다. 


어린아이였던 그가 이해하기 힘든 의문이 있었다. “사람들은 왜 저렇게 예쁘고, 착하고, 명랑한 누나들을 공순이라고 멸시할까? 왜 학교 가면서 돈도 버는데 우는 거지?” 그 답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과학 독서모임에 가입했고,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 눈을 떴다. 교회에 찾아온 노동자들이 왜 울었으며, 그들이 누구에게, 어떻게 핍박받았는지 조금씩 깨달았다. 게다가 1986년 독일에서 국내로 광주항쟁을 기록한 영상이 들어왔다. 광주의 진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군대를 다녀온 뒤 대학을 자퇴하고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더 작은 사업장으로 


당시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이 으레 그랬듯 그도 공장에 들어갔다. 용역회사를 통해 인쇄소에 비정규 노동자로 입사한 것이다. 1년 1개월이 흐르고 정규직이 되었지만, 두 달이 더 지나 대학을 다닌 전력이 들통나면서 해고당했다. 그러나 그가 들어갈 인쇄소는 많았다. 당시 큰 인쇄소에는 한국노총 소속 노조가 있었다. 그는 한국노총 조합원으로 활동하면서 제법 개혁적인 위원장을 만났다. 위원장은 그를 아꼈다. 최연소 교섭위원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인쇄소를 떠나게 되었다. 그가 활동했던 구로공단의 한 단체가 이적단체라는 멍에를 썼기 때문이다. 인쇄소를 나오고 작은 사업장 운동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외환위기가 끝나고 ‘비정규직’이라는 용어가 생소하지만 쓰이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사내하청 문제는 노조가 단일화되어 금방 해결되리라고 판단했다. (물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는 오판이다.) 대신 작은 사업장 문제가 대두될 것이라고 봤다. 그는 을지로에 적을 두다가 성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동은 구로, 문래를 제외하고 서울에서 제조업이 가장 밀집된 지역이었다. 인쇄뿐만 아니라 봉제, 제화 등 조직할 작은 사업장이 많았다. 


그 당시, 마침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등장했다. 당은 비정규철폐운동본부를 만들고 비정규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전국 4개 지역(서울, 안산, 광주, 부산)에 센터 설립 계획을 내놨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제안한 안이 공모 심사에서 채택되었고, 성동에 서울동부비정규노동센터가 세워졌다. 이렇게 그는 더 작은 사업장으로, 지역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두 가지 과제


현재 그가 생각하는 비정규 노동 운동 과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작은 사업장, 특수고용 문제다. 사용자가 비정규 노동자를 고용하는 이유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민간의 상시지속업무 등이 그렇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으로는 작은 사업장·특수고용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작은 사업장은 대기업의 하청 구조 바깥에 있다. 그리고 너무 영세해 사용자 책임을 묻기 힘들다. 또한 단위 사업장 노조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 사업자로 간주되어 노동 3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이들을 위해 노동복지, 사회 안전망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시기에 주목받고 있는 전 국민 고용보험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작은 사업장 운동을 하면서 이를 몸으로 직접 깨우쳤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가야 할 길


그렇다면 비정규센터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비정규센터처럼 노동조합이 아닌 노동단체의 역할을 크게 세 가지 개념으로 요약했다. 서비스, 이해 대변, 조직화가 바로 그것이다. 


서비스에는 노동 상담, 권리구제, 교육 등이 해당된다. 이를 비정규센터에서 직접 하는 건 무리다. 많은 자본과 인력이 소모된다. 현재 서울노동권익센터와 같은 지자체 센터들이 서비스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이해 대변과 조직화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사건이 터지거나 사안이 닥쳐서, 혹은 연대 요청이 와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 비정규센터가 가진 네트워크(한국비정규직노동단체네트워크, 비정규센터 내 현장위원회 등)를 잘 활용해야 한다. 


네트워크와 더불어 비정규센터가 가진 큰 자산은 정책 역량이다. 우수한 연구진과 오랜 기간 축적된 연구 노하우가  있다. 그는 비정규센터가 앞으로 보다 더 현장과 밀접한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정규노조는 자체적으로 노사교섭 요구안을 만들기 어렵다. 현안을 조사하고 연구할 역량이 부족하다. 비정규 노동자를 위해 투쟁을 지원해줄 조직은 있으나 정책 지원을 해주는 조직은 거의 전무하다. 비정규센터가 해야 할 일이다. 비정규노조의 노사 교섭을 지원하고,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의 목소리가 잘 규합될 수 있도록 의제를 개발해야 한다. 


배병길 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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