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죽음은 어디서 비롯됐습니까?

by 센터 posted Apr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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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균  청주노동인권센터 운영위원, 충북인뉴스 편집국장



2월 4일 청주방송에서 14여 년간 일했던 이재학 피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 (중략)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고 이재학 피디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그의 죽음을 접하면서 핏줄이 살갗을 뚫고 피를 튕기듯 또 다른 죽음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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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방송 이재학 피디 사망사건 대책위에서 4월 1일 상암 MBC 앞에서 진행한 선전전 


청주방송 젊은 프리랜서의 죽음


죽음의 주인은 당시 27세 청년 고 이윤재. 2012년 4월 1일, 이윤재 씨는 새벽 5시 10분경 회사를 떠났습니다. 밤샘 작업 후 퇴근이었습니다. 직장 동료들과 미리 약속된 축구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8시 30분경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풋살 경기 시작 10분 후에 그는 쓰러졌습니다. 고인의 사인은 과로로 인한 심인성 쇼크. 2011년 7월 입사한 뒤 채 10개월이 되기도 전에 27세 청년은 만우절에 거짓말 같이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이윤재 씨의 근무 환경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2012년 1월 15일 그는 자신의 SNS 계정에 “32시간 동안의 편집. 드디어 끝났다. 새 코너에 새로운 편집. 빡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1월 31일에는 “아! 드디어 스페셜 특집 편집 끝. 이제 잠 못 자고 밤새는 건 일도 아닌 듯. 36시간의 밤샘 편집과 촬영. 그저 웃지요.”라고 썼습니다.


2011년 7월 14일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 씨는 청주방송과 조연출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담당 PD, 그처럼 프리랜서로 계약된 작가와 한 팀이 돼 촬영과 영상 편집 업무를 수행합니다. 일주일에 3일 정도 촬영이 끝나면 나머지 3일 동안 편집 업무를 수행합니다. 비정규직인 그에게 주간 시간대에 방송국 편집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편집 업무는 정규직원이 퇴근한 뒤인 밤에 진행됐습니다.


그들이 받는 것은 급여가 아닌 ‘제작비’


고 이윤재 씨는 당시 청주방송으로부터 한 편당 25만 원을 받았습니다. 월로 환산하면 100만 원에서 최대 125만 원입니다. 그러나 이 씨가 청주방송으로부터 받은 것은 월급이 아니었습니다. 정규직 직원들의 급여는 인건비로 책정되지만, 이 씨와 같은 프리랜서 급여는 제작비에 포함됐습니다. 프리랜서란 이유로 4대 보험도 가입돼 있지 않았습니다. 주당 60~70시간 월 260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대한 보상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8년이 지나 또 다른 이윤재인 고 이재학 피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언론 보도를 통해 공개된 이재학 피디의 노동 조건은 8년 전 고 이윤재 씨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 그리고 구성원들의 ‘침묵’


변하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청주방송의 대응 논리입니다. 이윤재 씨 유족들에 따르면 2012년 이윤재 씨가 사망하자 청주방송은 어떤 금전적 보상도 하지 않습니다. 그때 내세운 사유는 이윤재 씨가 노동자가 아니라 ‘프리랜서’라는 것입니다. 지난 2월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재학 피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는 고 이재학 피디가 제기한 소송에서 일관되게 같은 논리를 폈습니다. 회사 주장에 맞서기 위해 고 이재학 피디와 이윤재 씨 유족에게 필요한 것은 ‘증언’이었습니다. 회사의 관리·감독 하에 업무를 했다는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현행 법률에선 법적인 고용 관계가 성립된 노동자가 아니면 산업재해 보상도, 부당해고도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 이재학 피디의 경우 소송을 제기한 이래 청주방송의 지휘 감독 하에서 업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맡은 조연출·연출 등 프로그램 제작 업무를 비롯해 지방자치단체 보조금을 받은 사업 관련 업무까지 했다고 말입니다. 이재학 피디의 비정규직 동료들이 작성한 진술서에 따르면 이재학 피디는 사업계획서, 보조금 협의 관련 문서, 보조금 신청 문서, 정산 및 증빙서류 등 결재 문서를 기안했고 다시 회사의 결재 라인을 따라 처리됐습니다. 고 이재학 피디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결재나 보고를 하지 않으면 담당 국장에게 혼난 적도 있다고 진술합니다. 그러나 정작 고 이재학 피디와 업무 관계를 맺었던 정규직 구성원들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않습니다. 고 이윤재 씨의 경우도 그랬고 이재학 피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름다운 연대’를 만들었던 청주방송 노조


1997년 10월에 개국한 청주방송의 역사는 ‘정리해고’라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출발합니다. 개국과 더불어 몰아친 IMF 경제 한파 속에 청주방송은 1998년 대규모 정리해고를 발표합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회사는 계속해서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해고가 빈번하게 진행됩니다. 


당시 노동조합은 ‘정리해고’를 극복하기 위해 출발합니다. 1998년 노동자들은 청주방송의 정리해고에 맞서 전국언론노동조합 청주방송지부(이하 청주방송노조)를 설립합니다. 기자와 피디, 기술국 직원들이 참여해 53일이라는 장기파업을 진행했습니다. 청주방송노조가 파업을 시작하자 충북지역 노동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도 아낌없이 연대합니다. 투쟁의 결과는 노동자들의 승리. 정리해고는 철회됐고 대신 ‘1년 무급휴직 후 원직복직’이라는 결론으로 끝이 났습니다.


1998년 이후 벌써 22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시 파업 투쟁을 승리로 이끈 ‘아름다운 연대’ 주역들도 이제는 어느새 이 회사의 중견간부가 됐고 핵심 간부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012년 고 이윤재 씨, 2020년의 고 이재학 피디와 직간접으로 업무와 관련된 분들도 있습니다. 법원에선 고 이재학 피디와 관련해 제출된 비정규직 동료들의 진술서를 배제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재학 피디와 업무상 관계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1998년 ‘아름다운 연대’로 만들어진 청주방송노조의 주역들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27세와 38세. 꽃다운 청년들의 죽음 앞에서 그들이 분개하며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청주방송에서 유독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 ‘프리랜서냐, 아니면 노동자냐’, ‘정당한 구조조정이냐, 아니면 부당한 해고냐’란 논란도 사치스럽습니다. 27세와 38세 꽃다운 청춘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 ‘아름다운 연대’의 주역들은 답해야 합니다. 이 죽음은 과연 어디서 비롯됐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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