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와 주 40시간 근무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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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희 학생



특별히 내세울 만한 취미는 없지만,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 읽기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도 시집이라면 왠지 모르게 거리감을 표하는 탓에 누군가와 좋아하는 시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교류할 기회는 별로 없다. 하지만 마음을 두드리는 시를 만나면 그 시인이 쓴 시집들을 기억해두었다가 중요한 일을 끝마쳤을 때나 생일과 같이 특별한 날에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한 권 두 권 시집을 사 모으는 게 나만의 소소한 일상의 기쁨이다. 


시의 매력에 처음 눈을 뜬 건 고등학교 2학년 국어수업 시간,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을 읽게 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노동 문제에 관심이 있었냐 하면, 그러기에 나는 입시에 찌들어있던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노동 문학의 상징이 된 이 시가 1980년대 민주항쟁에 미친 영향력을 설파하던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건조한 태도로 시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래 구절이 나를 잡아끌었다. 


··· 아 그러나 /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 이 질긴 목숨을, / 가난의 멍에를, /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고된 작업을 마치고,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새벽같이 일을 하러 나아가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절망. 그 슬픔과 고통을 달래기 위해 “쓰린 가슴에 차거운 소주를 ‘붓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구절이다.


위 문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문득 지난밤 술 한잔을 나누고 계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를 읽고 80년대 대학생들처럼 혹독한 노동 현실에 충격을 받고 각성하게 되었다기보다는, 소주 한잔으로 고된 하루를 정리하려는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부모님의 그런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지난밤의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소환된 기억에 수업시간 내내 이 구절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던 기억이 난다. 나의 세계를 넓혀 나와 타인을 잇는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시의 매력을 알게 된 날이었다. 


그 뒤로 조금씩 시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고3 시절에는 나희덕 시인의 〈속리산에서〉를 외우다시피 되뇌며 위로받았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청춘의 통과의례라고도 불리는 기형도 시인의 시를, 허수경, 황인숙, 심보선, 이제니 시인 등 여러 시인의 시집을 붙들고 고민 많은 밤을 보냈다. 최근에는 박서영 시인에 빠져있다.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읽다 보면 잔잔해질 수 없을 것처럼 요동치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지는 느낌을 받는다. 시인들은 사랑에 대해, 타인과 세상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아픔을 정직하게 꼭 그만큼만 내어놓는다. 치장하지 않은 꼭 그 무게만큼의 고통이 시가 되어 나왔을 때 그 시를 읽는 이에게 진실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시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고통에만 과도하게 몰입해있던 건 아닌지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나의 아픔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될 때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마음이 생긴다. 내 안의 세계를 넓히며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사유로 나아가는 소중한 경험이 시를 통해 가능해진다. 


내게는 시가 그런 존재이지만, 시뿐만 아니라 독서 자체가 각자가 짊어진 고민을 보다 현명하게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른 것들만큼이나 삶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밥을 먹거나 잠을 자고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크고 작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일 자체에 포함되는 그런 일. 


얼마 전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주 52시간 근로제가 과도하다”며 “대한민국은 좀 더 일해야 하는 나라”라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멕시코와 매년 OECD 최장 노동시간 1위를 치열하게 다투는 이 나라에서 ‘더 일해야 한다’는 발언을 듣고 있어야 한다니.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장시간 근로 관행을 타파하고자 표방했던 ‘주 40시간 근로’가 연장근로 12시간은 필수적이라는 듯 ‘주 52시간 근로’를 두고 논쟁하는 프레임으로 바뀌더니 “애 키우고 돈 쓸 데 많으니 일 더 해야 하는데 주 52시간제가 막는다.”는 발언이 나온 것이다.


N포세대 출산율이 0퍼센트로 수렴해나가는 이유가 그의 말대로 ‘애 키우고 돈 쓸 데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할 사회안전망 부재와 현재를 살기에도 빠듯한 수준인 노동 소득만으로 미래까지 설계해야 하는 현실 때문임을 외면한 무책임한 발언이다. 과로사가 끊이지 않는 이 나라에서 손쉽게 “한국은 좀 더 일해야 하는 나라”라고 내뱉는 발언은 논란이 될 게 아니라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문제가 된 발언을 한 강연에서 청년수당에 대해서도 “청년수당을 생활비로 써버리거나 심지어는 밥 사 먹는 데 쓰거나 하는데 그것은 있으나 마나 한 복지”라고 말해 함께 비판이 일었는데 청년수당으로 나처럼 책을 샀다간 작정한 비난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녁이 있는 삶’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정부는 주 52시간제 연기에 대한 기업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지난달 기업 규모에 상관없이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특별연장근로는 제도 자체가 노동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연재해나 재난에 준하는 사고가 있는 경우 노동자 동의를 받아 고용노동부 장관이 인가해주는 엄격한 절차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별연장근로제도를 ‘경영상 필요’를 이유로 허용하겠다는 방침은 사실상 마음만 먹으면 무제한 연장노동을 합법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자연재해와 회사의 업무량 증가를 동급으로 취급하다니, 저녁이 있는 삶이란 공약은 실현되기도 전에 빛이 바래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뭘까요?” 하고 물으면 저마다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시간을 내어 시집을 읽을 여유가 없을 때일수록 시집을 펼쳐 들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나의 경우엔 마음 놓고 시집 읽을 수 있을 시간이 있는 삶. 퇴근 후 서점에 들러 좋아하는 시집을 마음껏 읽다 집에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생활.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노동시간 단축은 단순히 물리적 휴식시간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상화된 과로 속에서 타인은커녕 자기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불안과 불신이 서로에게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냉혹한 무관심과 반지성적인 혐오로 표출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장시간 노동체제의 유산이기도 하다. 주 40시간 노동은 일로 빼곡한 생활에 인간적 틈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우리 모두에게 쉴 틈, 생각할 틈을! 나에게도 마음 놓고 시를 읽을 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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