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초심으로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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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신 센터 이사



촛불항쟁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신임 대통령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선언과 2018년 최저임금 16.4퍼센트 인상으로 시작은 기대할 만했다. 노동존중사회와 소득주도 성장 청사진이 새로운 노동 문제 해결의 활로를 여는 듯했다. 하지만 공공부문 각 기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난항을 거듭하면서 기대했던 정부 노동 정책 여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성패가 걸린 핵심 부문이었던 학교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실패한 이후 최근의 톨게이트 사례에 이르기까지 하향 평준화로 치달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야심찬 공약인 사회적 대화도 난관에 부딪혔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 기구를 표방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탄력근로 확대를 안건으로 올리는 잘못된 무리수를 두면서 늪에 빠졌다.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사안을 중심에 두고 운영해야 했지만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단기 성과에 집착한 정치적 계산과 무력한 조직 노동의 대응 속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대표 노동 공약인 최저임금 대폭 인상은 총자본과 보수언론의 총공세 속에서 죄인으로 전락했다. 현 정부 노동 정책의 후퇴를 방증하는 결정적 장면은 경사노위 여성/청년/비정규직 계층별 대표 해촉과 2020년 최저임금 2.87퍼센트 인상이었다. 한계에 부닥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사회적 대화 무산, 2020년까지 최저임금 시급 1만 원 달성 공약 파기가 연이어지면서 노정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비정규 노동 관련 공약의 유실이다. 비정규직 규모를 줄이고 차별을 해소하는 법제도 개선 대원칙인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은 논의 자체가 온데간데 없어졌다. 선결 과제인 원청 사용자 사용자성 인정과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도 미진하다. 특히 태안화력발전소 외주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김용균 씨처럼 매일 중대산재로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할 법제도 개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위험의 외주화를 막기 위해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가 권고한 직접고용 정규직화조차 이행하지 않고 있다. 전형적인 정치 권력의 직무유기다.


나는 지난 3년간 최저임금위원회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여러 비정규직 정규직화 심의위원회 위원으로 두루 참여하며 문재인 정부 노동 정책이 좌초하는 현장 곳곳에서 온몸으로 몸살을 앓았다. 한국 사회 최대 사회 현안인 비정규 노동 문제가 왜 이렇게 힘겨운 난제인지 다시 한번 절감하는 과정이었다. 노조조차 만들지 못한 채 노동 인권 사각지대로 내몰린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현실의 벽은 대단히 높았다. 노사정 모두 역부족인 데다 불평등 양극화 노동 현실 개선 의지는 생각보다 박약했다. 촛불정부를 자임했던 대통령의 노동 公約은 어느새 空約으로 시들어가고 있다. 나아진 점이 있지만 1천만 명이 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일상은 여전히 고단하고 절망적이다. 촛불항쟁은 불의한 권력자를 응징했지만 그 자체로 노동 현실을 바꾸는 현금자판기가 아니었다.


2020년 새해에 촛불항쟁 정신을 비정규 노동 현실 개선으로 어떻게 이어갈지 고심이 크다. 한국 최초의 비정규 노동 전문단체로 창립 20주년을 맞는 센터는 어느 방향으로, 어떤 과제를 중심으로 활동해야 할지 생각의 갈래가 잘 정리되지 않는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는 그람시의 경구를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결국 세상 모든 일이, 특히 자본주의 체제 아래 놓인 노동 현실은 내가 선 곳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바뀔 수 있음을 촛불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매일 확인해오지 않았던가. 이런 시기엔 근본적인 목표를 앞세운 거창한 밑그림도 중요하지만, 현실 조건을 염두에 두고 굳이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할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기준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노동 현실은 ∙ 1천만이 넘는 비정규직 규모 ∙ 임금 격차를 중심으로 돌이킬 수 없는 양상으로 점증해온 차별 실태 ∙ 급증하고 있는 특수고용 비정규직과 초단시간 노동 ∙ 개선되지 않고 있는 죽음의 외주화 ∙ 2퍼센트 내외 미약한 비정규직 노동조합 조직률 ∙ 공문구로 전락한 헌법 33조 노동 3권 ∙ 정규직/비정규직, 남성/여성, 대기업/중소기업, 공공부문/민간부문, 유노조/무노조 사업장 등 전방위 노동 양극화 심화 확대로 여전히 암울하다. 그나마 비정규 노조 조직률은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진전되고 있지만 핵심인 민간부문에선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비정규 노동 해법은 대다수 비정규 노동자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채 구두선에 머물러있고, 대법원 판결조차 무시하고 법 위에 군림해온 재벌 자본과 비정규 노동 문제를 해결할 역량과 정치적 의지 부족이 드러난 현 정부에 맞서 쟁취할 수 있는 요구가 무엇일지 장담하기 어렵다.


2012년 한국비정규직노동단체네트워크를 창립할 때 확인했던 소중한 원칙을 새삼 되새겨본다, “하나, 우리는 강력하고 건강하게 도약해야 할 비정규 노동 운동의 밀알이 된다. 하나, 우리는 한국 사회 변혁의 기치 아래 노동 운동의 재기와 활성화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나, 우리는 비정규직 문제를 실사구시 정신으로 개선하고 해결하는데 앞장선다. 하나,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억압받고 착취받는 민중과 연대하고 협력한다. 하나, 우리는 화합하고 단결하여 사업장과 지역을 넘어선 연대 운동의 모범을 만들어나간다. 하나, 우리는 비정규직 관련 개인과 단체를 최대한 아우를 수 있도록 열린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비정규 운동의 실천 속에서 확인된 이 원칙을 바탕으로 할 때 센터의 올해 활동 전망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20여 년 역사가 된 비정규 노동 운동도 되돌아본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과 차별 해소를 당면목표로, 다종다기한 불안정 고용 형태 근절을 최종 목표로 하면서 총자본에 맞선 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평등세상 건설 열망을 가장 착취 받고 억압 받는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는 운동으로부터 실현해내자는 비정규 노동 운동의 목표가 얼마만큼 이뤄졌는지 가감 없이 평가해야 할 때다. 그 평가를 토대로 위기에 처한 정규직 중심 민주노조 운동에 경종을 울리며 혁신의 계기를 만들어온 비정규 노동 운동이 어떤 성과와 한계를 남겼는지 되짚어보면서 근본적 문제의식이 깃든 긴 안목으로 반성적 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광장의 촛불을 일터와 골목으로 확산시켜 진정한 노동존중사회, 아니 노동자가 주인인 사회를 만들어가자고 목소리 높인 만큼 일터에서 차별받고 고통받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일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고 힘써야 한다. 한국 사회 최대 사회적 약자이자 취약계층 노동자 집단인 5인 미만 사업장을 비롯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여성 노동자, 청년 노동자, 노인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이주 노동자, 장애인 노동자 등 다양한 노동 문제 개선을 위해 활동 폭도 넓혀야 한다. 올해 센터는 현장연대와 정책연대, 사회연대를 기본 축으로 전국노동단체네트워크 활성화를 비롯한 주요 과제를 이런 문제의식에 터 잡고 내실있게 수행해갈 것이다. 희미한 기억으로 남은 내 사랑 민주노조가 간절했던 그 시절 그 첫 마음으로 설레는 올 한 해 센터 활동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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