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감귤밭에서 일하다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요 하지만 울지는 않았어요 작은언니 중학교 졸업식날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구나, 말하며 울었지만요
아버지는 내일도 다시 입을 작업복을 공장에 걸라고 하셨지요 새 옷과 겹치지 말아야 하는 먼지 묻은 옷이 걸려 있던, 공장은 벽에 못 하나를 박아 만든 아버지 혼자만의 장롱이었지요
바람이 지나가는 구멍을 가진 제주 돌담은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들은 허기진 구멍을 가지고 있어요 굶주리면 흙이라도 풀이라도 입 속에 넣어야지요 허기처럼 쉽게 사라지는 우리들은 새 달력에 죽음을 먼저 기록하지요
새 달력을 앞에 두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새 달력에 나의 공장이 두 개, 심장처럼 두 개, 심장에 박힌 못에 걸어 둘 민호와 고래,
민호는 음료수 공장에서 사라진 학생, 태평양 고래들도 해파리 대신 비닐을 삼키며 사라져 갑니다 무릎을 꿇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열아홉 민호는 젊기도 전에 사라졌고,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고래들도 텅 빈 뱃속 채우다 사라져 갑니다
민호가 없는 텅 빈 하루를, 허기로 가득 찬 고래 배를, 손가락 하나 없는 손으로 단추를 채워 나갔을 아버지는 몇 번이나 울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다시 새 달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두 개의 울음을 공장에 겁니다
새 달력에는 이미 무릎을 꿇고 박은 투명한 두 개의 못이 박혀 있으니까요
*선반 같은 것이 없는 작은 벽에 못을 박아 옷을 걸어두게 한 자리를 제주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공장이라 불렀다. 그것은 허공에 둔 장롱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김신숙 시인
2012년 《제주작가》, 2015년 《발견》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발간.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59 | 출근길 | 센터 | 2014.10.21 | 3147 |
58 | 엄지손가락 | 센터 | 2015.07.24 | 2268 |
57 | 우리는 다 배우다 | 센터 | 2014.08.18 | 2166 |
56 | 비정규직 노동자, 세월호여! | 센터 | 2014.07.01 | 1846 |
55 | 밀양 | 센터 | 2014.04.23 | 1837 |
54 | 부서진 사월 | 센터 | 2015.10.05 | 1773 |
53 | 그리고 나는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 센터 | 2016.03.14 | 1747 |
52 | 연대 | 센터 | 2014.03.20 | 1717 |
51 | 생활 | 센터 | 2014.12.22 | 1710 |
50 | 바닥은 쉽사리 바닥을 놓아주지 않는다 | 센터 | 2016.08.24 | 1696 |
49 | 알 수 없는 것들 | 센터 | 2015.03.03 | 1677 |
48 | 보호는 좋은 것입니까? | 센터 | 2016.06.30 | 1664 |
47 | 울타리 밖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이편과 저편 | 센터 | 2016.10.31 | 1663 |
46 | 리어카의 무게 | 센터 | 2016.04.28 | 1630 |
45 | 시작 | 센터 | 2018.12.26 | 1618 |
44 | 굴뚝 | 센터 | 2018.04.26 | 1615 |
43 | 역사는 당신의 개인수첩이 아니다 | 센터 | 2015.12.07 | 1589 |
42 | 천국의 경비원 | 센터 | 2017.04.27 | 1562 |
41 | 빛의 탄생 | 센터 | 2019.04.29 | 1562 |
40 | 제주 예멘 | 센터 | 2019.02.25 | 1520 |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