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노동과 노동자들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 혹은 에도 시대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는 독특한 모양의 상투를 튼 사무라이들을 떠올리곤 한다. 일본의 중세 역시 농업사회, 더욱이 소농사회였고 농민과 하층민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잘 남아있지 않다 보니 쇼군이나 다이묘, 그에 속한 무사들을 우선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에도 시대 일본에는 에도와 오사카 같은 거대 도시들이 존재했고, 거기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전국시대의 오랜 전쟁 끝에 급속한 인구 증가를 맞았다. 에도 시대 초기 일본 인구는 약 1천 2백만 명이었는데, 100여 년 뒤에는 3천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농업 경작면적 또한 같은 기간 동안 두 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이후 에도 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구 증가도 정체되었고 경작지도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다. 다만 에도 시대 후기에는 농업생산성이 고도화되었다. 그리고 부분적인 농업기술 발달과 더불어 이른바 ‘근면혁명’이 일어났다. 경작지 개발이 한계에 이르렀기에 노동력의 집중적 투입 등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농민에 대한 세금 인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수익 증대의 동기 부여가 강화된 점도 작용하였다. 근면혁명이라고는 하지만, 근대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형태의 근면성이나 시간관념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19세기 후반 일본에 머물렀던 많은 서구의 관찰자들은 일본 농민과 노동자들의 ‘나태함’을 지적하곤 했다.


다만 주목할 지점은 에도 시대 중기 이후 상업 발달과 도시화 속에서 상품작물 재배가 증가하고 수공업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농민층이 양극화되기 시작하였고, 몰락한 농민들은 도시로 흘러들어가 하층 노동자가 되었다. 상공업 발달 이면에는 비대해진 무사 계급의 하층 무사들이 봉록만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서 부업을 해야 했던 사정도 있었다. 상공업은 기본적으로 중앙 정부와 지방 영주, 즉 막부나 다이묘의 통제를 받았다.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신분제 질서에도 틈새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상인이나 농민도 돈을 주고 무사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무사가 될 수 있었다.


에도와 같은 대도시는 목조주택이 밀집되어 있었고, 그만큼 ‘직인’으로 불리는 노동자들 가운데 목수가 많았다. 목수는 여타 직인들과 마찬가지로 도제 제도를 통해 양성되었다. 수년간의 도제 생활을 거쳐야 목수가 될 수 있었다. 목수들은 점심시간을 포함해 하루 세 번 휴식시간을 누렸고 실제 노동시간은 네다섯 시간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도제 기간에 젊은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혹한 노동을 견뎌내야 했다. 그래도 이들은 잘만 견뎌내고 기술을 몸에 익히면 숙련 노동자인 직인이 될 수 있었다. 관리자급 이상인 장인들은 나까마(仲間)라는 조합을 결성하여 제한적으로나마 입직 규제, 가격 통제, 급료 인상 등을 도모하였지만, 직인과 도제들은 이로부터도 배제되어 있었다. 직인들도 조합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하기 시작한 것은 에도 말기에나 이르러서였다.


전근대 사회인 에도 시대의 진정한 취약계층 노동자들은 따로 있었다. 아동 노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도시 하층민 가정의 어린이들은 열 살이 넘으면 상점이나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곤 했는데, 이들에게는 입을 옷과 부실한 식사가 제공되는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과로로 쓰러지거나 병을 앓게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집단생활을 해야 했고 통행도 제한되어 마음대로 근무지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눈 밖에 났다가는 해고당할 수도 있었기에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 상점에서 일하는 경우 8년간 견습을 거치면 3개월 휴가를 받은 뒤 점원이 될 수 있었다. 거기서 다시 12년을 버텨내야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편, 우리가 흔히 ‘비정규 노동’이라 이야기하는 노동 형태는 정규 고용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고, 그러한 정규 고용관계는 노동법에 의한 규율과 노사관계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노동관계 속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근대 사회였던 중세 일본에도 비정규 노동과 유사한 노동이 존재했다. 에도 시대 노동자들은 히토야도(人宿)라는 일종의 파견업체를 통해 무사 계급 가문에 봉공하기도 하였다. 물론 에도 시대에는 봉공 제도라는 신분 제도가 노동관계 기본 틀을 이루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무사 계급에 대해 신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하인이었고, 계약 해지 권리는 고용주인 주인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나 상공업과 도시 발달은 유동적인 노동력 수요 증대로 이어졌다. 근본적으로는 농업사회였던 중세사회에서 상공업 역시 계절적 순환이나 작황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에도 시대의 독특한 정치체제 역시 이와 관련된다. 도쿠가와 막부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로 하여금 중앙인 에도에 인척과 가신들의 일부를 머물게 하고 정기적인 ‘참근교대’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러한 제도는 감시 및 견제 역할을 함으로써 막부로 하여금 분권적 성격이 강한 지방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고 에도를 거대 도시로 성장시켰다. 여기에 쇄국정책이 더해져 에도 막부는 250여 년 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런데 참근교대를 비롯한 각종 행사들에는 상당한 규모의 임시적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막부에 의해 인신매매가 금지되었고 봉공 제도가 존재했음에도 그 틈새에서 일종의 인력 파견업이 성행했던 것이다. 18세기 초에 이르면 이미 에도는 100만, 오사카와 교토는 40만에 이르는 인구 규모를 지닐 정도로 대도시가 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400여 개 파견업체가 성행하였다. 말이 좋아 파견이지 인신매매적 성격도 적지 않았는데, 대부분 스무 살 미만의 청소년들이 파견 노동자가 되었다. 지방 농가에 필요한 노동력은 한정되어 있었고, 최소한의 보호 받을 나이가 지났는데 집에서는 밥만 축내는 존재가 되기 시작하면 도시로 나가 벌어먹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일자리 중개가 성사되면 이들 업체는 사용자와 봉공 계약을 체결하고 수수료를 받았다. 계약 당사자는 노동자, 노동자의 부모, 사용자, 파견업체였지만, 실질적인 계약 주체는 파견업체와 사용자였다. 계약서에는 급여와 더불어 봉공 기간이 명기되어 있었다. 시용 기간도 있어 보통 삼일 간 일을 시켜 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노동자를 교체할 수 있었다. 노동자가 도망가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파견업체가 배상해야 했다. 에도 시대 파견 노동자들은 사용자와 파견업체 양자로부터 신분적인 구속을 받았음은 물론 급료의 20~30퍼센트를 뜯기곤 했다. 그러다보니 에도 시대 많은 기록물에서 이들 파견업체에 대한 비난이 자주 등장한다.


에도 시대 관청인 봉행소奉行所는 파견업체들로 하여금 조합을 조직하게 했고, 이 조합을 통해 관리 감독했다. 물론 과도한 수수료에 대한 단속도 이루어졌지만, 노동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인 만큼 관리 감독의 기본적인 초점은 사용자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파견 노동자들의 처우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는데, 한편에서는 막부의 재정 압박으로 인해 하층 무사 계급의 녹봉이 오르지 않은 반면, 물가는 상승하였고 도시로 유입되는 노동자들의 수는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 후기부터는 무사 계급의 하층 무사들이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봉공 기간이 단축됨은 물론 신분적 주종관계도 약화되었고, 막부 말기 시대에 이르면 근대적 형태의 임노동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히토야도를 통한 파견 노동은 이러한 변화의 과도기에 나타난 일종의 비정규 노동이었던 것이다.


봉공 관계라는 신분제적 노동관계 하에서 노동자들의 고통은 인적 종속이나 낮은 수준의 급료에 따른 것만이 아니었다. 에도 시대 지배계급인 무사들, 급속히 성장한 상공인들은 노동자 또는 하층민들의 건강과 안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본에서도 체계적인 보건 개념은 근대화 이후에나 등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에도 시대는 난학 등 서양 학문의 유입과 유행으로 인해 의술이 급속히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소한 노동력 관리를 위해서라도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과 보건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고 관련된 기록도 좀처럼 남아 있지 않다.


안전보건은 그 개념조차 없었다. <양생훈>이라는 저서를 남긴 에도 시대 초기 사상가 카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의 양생 개념이 있었지만 유교적 윤리에 가까운 것이었고, 식생활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가 양생의 가치를 널리 설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과 건강에까지 그 사상이 미치고 있지는 못하다. 그의 ‘노동’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자신의 신체에 적합한 노동을 통해 몸을 움직여야 몸이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광산 노동자들의 중금속 중독이나 진폐, 가부키 배우들의 분칠에 따른 납중독, 에도 시대 이전이기는 하지만 불상 도금 직인들의 중금속 중독 등에 대한 기록이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이다.


에도 시대 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842년 한 은광에서는 진폐 예방을 위해 매실을 준 기록이 있다. 수년 뒤 같은 은광의 기록을 보면 갱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십대 후반에 일을 시작하여 보통 서른 살이 넘으면 죽고, 마흔 살까지 사는 일은 많지 않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광산 노동자들의 환경은 열악했다. 물론 이 시기 광산 노동자들은 다른 도시 노동자들과 달리 죄인 등이 노예 노동 형태로 동원되어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찍이 기호학자인 움베르트 에코는 오늘날 우리가 새로운 중세에 살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그 일차적인 근거는 새롭게 지배적으로 등장한 철학사조가 중세의 스콜라 철학처럼 반역사적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밖에도 불안이라는 정서의 확산, 환경 파괴로 인한 재앙, 교통통신의 발달로 인한 일상생활의 유목화, 산업공동화로 인한 대규모 슬럼화, 새로운 종교와도 같은 소비주의의 융성 등을 증거로 들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현 시대를 ‘새로운 중세’로 실감하는 이유는 불안정 노동의 증대가 새로운 신분적 질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사례이긴 하지만 중세 시대 노동과 노동자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오늘날의 비정규 노동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일 듯싶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