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에서 시작된 길_임종린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파리바게뜨 지회장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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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동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빵집이지만 파리바게뜨 정규직화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 전까지는 그 속까진 잘 알지 못했다. 동네 빵집을 문 닫게 만드는 프랜차이즈 업체라는 정도 수준이랄까. 파리바게뜨 본사에서는 제빵기사를 책임지지 않고, 협력사 직원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됐다. 파리바게뜨에 노조 깃발을 꽂은 임종린 지회장은 어찌하다 보니 제빵기사를 하게 됐고, 또 어찌하다 보니 노동조합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회사에 충성할 만큼 정말 열심히 일했다. 무던했던 성격이었는데 5만 원을 받아내기 위해 시작된 그이의 삶이 예상치 못했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 이야기를 세 시간에 걸쳐 들어보았다. 


인터뷰·정리 : 강인수 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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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상주로, 그리고 다시 인천으로


인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아버지 고향인 상주로 내려갔어요. 그러곤 고등학교 1학년 때 경기도 시흥으로 올라왔다 다시 인천에서 자리 잡았죠. 고등학교를 세 군데 옮겨 다녀서 친구가 별로 없어요. 상주에선 대구까지 가서 승마를 배울 정도로 집안 형편이 꽤 좋았어요. 그런데 IMF 때 아버지 사업이 잘 안 되면서 가족들은 시흥으로 올라가고, 나만 학교 옆 사립 기숙사에서 지내게 됐습니다. 하꼬방 같은 곳이었는데 처음엔 혼자 지내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막상 지내다 보니 외롭기도 했고, 생각보다 돈도 많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무방비 상태인 게 제일 걸리더라고요. 한번은 친구가 다쳤는데 어른들한테 연락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가족이 멀리 있으니 물리적으로 도움 받기도 어렵고. 그때 부모님 곁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인천에서 학교 다니면서 주말에는 엄마가 일하는 식당에서 설거지 알바도 하곤 했지요. 집안 형편이 계속 안 좋았거든요. 하루하루 살기 바쁘니까 사춘기 겪을 새도 없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 가는 거라고만 생각해서 가긴 했는데 뭘 가르치는 지도 모르겠더라고요. 딱히 꿈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계속 다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일 년 쉬고 복학할 생각으로 한 학기 다니고 휴학했는데 그만둬버렸죠. 지금 생각해보면 친한 친구라도 있었으면 계속 다녔을 거 같긴 해요. 


다단계 전과 후로 달라진 삶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캐릭터 공부를 해볼까 했는데 돈이 많이 들더라고요. 유학도 다녀와야 하고. 그래서 생각만 하다 말았어요. 계속 아르바이트하면서 살았죠. 유치원 수련회 도우미도 하고, 호프집 아르바이트도 오래 했죠. 

그러다 취직을 해야겠다 싶어서 홈플러스 가전제품 판매 매장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도 불법파견이었어요. 업무 지시는 홈플러스에서 하고 계약은 용역업체랑 했거든요. 목표 달성 금액을 채우지 못하면 퇴근도 안 시켜줬어요. 처음으로 전화기 판매했던 날 기분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일 년 정도 일하다 관두고 국토 배낭여행을 해보고 싶어서 별 계획 없이 완행열차 타고 목포로 갔어요. 보성, 해남, 진주, 포항 지역을 다니면서 찜질방에서 자기도 했죠. 그러다 사촌형부가 초등학교 과학실에 자리가 있다며 연락이 와서 바로 올라왔어요. 출산휴가 들어간 분 대체하는 자리였죠. 임시직이어서 3개월만 하고 다시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게임회사에 입사를 했는데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으니 해볼 생각 없냐며 연락을 했어요. 재미있을 거 같기도 해서 그러겠다고 하고 갔습니다. 친한 친구였어요. 그런데 다단계 회사였어요. 친한 친구였어요. 제발 3일만이라도 교육만 들어 달라고, 그러면 자기가 왜 그러는지 알게 될 거라고 사정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강의 들으면서 ‘아니 불’자만 계속 쓰면서 언제 끝나나 하고 있었죠. 그런데 강사 한 분이 “여기부터 저기까지 가는데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는데 왜 걸어 가냐.”고 하는데, 그 말에 딱 꽂힌 거예요. 그러면서 마음을 달리 먹게 됐죠. 


반지하에서 숙소 생활하면서 먹고 자고 한 방에서 20명이 24시간을 같이 보냈어요. 몰래 도망가거나 통화할까봐 화장실도 같이 가고, 주말 나들이도 다 같이 가야 했죠. 어떻게 보면 감금된 상태였습니다. 거기 모토가 ‘콩 한 쪽도 나눠 먹자’여서 먹을 거 하나 있으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20명이 똑같이 나눠 먹었어요. 오뎅 하나도 콩알만 하게 잘라서. 니 물건 내 물건 없이 다 같이 사용해야 하고. 동년배끼리 위계질서 따지고, 초코바 하나를 사도 20개로 나눠서 먹어야 하니까 화장실에서 몰래 먹게 되고. 친구한테 돈 빌려서 물품도 구입하고.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면서 이해도 안 되고, 빚도 지게 되고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몰래 빠져나왔어요. 잠수를 탄 거죠. 휴대폰 번호도 바꾸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관계 맺었던 사람들하고도 연락이 끊기고, 식탐이 생기면서 살도 엄청 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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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열린 파리바게뜨 불법파견 법적 쟁점과 해결 방안 기자 간담회(@파리바게뜨지회)


등 떠밀려 가게 된 파리바게뜨


제 생활이 답답해보였던지 돈 빌려줬던 친한 친구가 운동하자고 불러내서 줄넘기 하고 등산도 가고 그랬어요. 그러다 그 친구가 일본 유학을 갈 거라며 빌려간 돈을 일해서 갚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일을 잘 안 알아보고 있으니까 동네 파리바게뜨 매장에 붙여진 ‘알바 구함’ 광고를 보고 “야, 너 저기 가서 일해.”한 거죠. 별로 하고 싶진 않았는데 돈을 갚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어요. 


2005~6년 즈음이었는데 시급 3천 원이었던 것 같아요. 점주가 아침 7시에 모닝콜을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알람 맞추면 되지 왜 나한테 전화하라고 그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 출근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하려고 매장 전화기로 전화하라고 시킨 거 같았어요. 하루는 제빵기사님이 일 잘한다며 기사해 볼 생각 없냐며 이력서 넣어보라고 하더라고요. 아예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아아~~ 모르겠어요.” 했는데 계속 권유를 해서 알았다고 건성으로 얘기했죠. 그런데 회사에서 연락왔냐며 자꾸 확인을 하는 거예요. 사실 이력서도 보내지 않았거든요. 기사님이 본사에 확인 전화까지 하는 바람에 더 이상 거짓말 할 수도 없어서 이력서 들고 면접 보러 갔습니다. 그때는 파리바게뜨 매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때라 일할 사람이 한창 부족할 때였어요. 그래서 면접 보면 바로 입사할 수 있었어요. 운 좋게 일주일 뒤에 교육이 바로 잡혀서 12주 교육 받았죠. 교육생 열두 명이 똘똘 뭉쳐서 친하게 지냈어요.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가서 하니 재미있더라고요. 


모범사원으로 뽑히다


지금은 직영점과 가맹점이 분리돼있어 직영점은 본사, 가맹점은 협력사 사람들만 일할 수 있는데, 당시엔 혼재돼있어서 협력사 직원도 직영점에서 일할 수 있었어요. 교육 받고 인천엔 자리가 없어서 종로 직영점 복수기사(일종의 보조기사)로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지역에서 가맹점 메인기사 자리가 있다며 연락이 와서 옮기게 됐어요. 점주가 취미 삼아 운영하던 매장이라 잘 나오지도 않고 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죠. 물량도 많지 않아 편하게 일할 수 있어서 오래 다녔어요. 그때는 1년 정도 일하면 진급도 할 수 있었는데 매장을 옮기고 싶지 않아서 진급하지 않고 3년 동안 메인기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점주가 가게를 접으면서 다른 매장으로 이동하게 됐죠. 처음 아르바이트 했던 곳이었어요. 규모도 크고 물량도 많아 힘들었어요. 1년쯤 일하니 지원기사로 진급을 하게 됐죠. 


저는 무던하고 순종적이어서 회사가 시키는 거 다했어요. 나름 인정받는 느낌도 들어서 애사심도 생기고, 파리바게뜨는 내가 지켜야지 뭐 이런 생각까지 했죠. 모범사원으로 뽑혀서 해외연수도 다녀왔어요. 그러다보니 교육지원기사로도 뽑혔죠. 교육생들을 교육하는 제빵기사를 교육지원기사라고 하는데 매장에서 직접 빵 만들 일은 없었어요. 한마디로 교육 관리직이 된 거죠. 조장과 교육지원기사를 겸하면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너, 조장하지 마!”


그런데 어느 날 관리자가 회사에서 조장이랑 교육지원기사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다며 조장을 내려놓으라는 거예요. 자세한 설명도 없이 “다음 달부터 조장하지 마!” 이런 식인 거죠. 카톡으로 “괜찮지?” 이러는데 안 괜찮다고 했죠. 그랬더니 당황하더라고요. 내가 순순히 알겠다고 할 줄 알았던 거죠. 너무 화가 나서 일하는데 눈물이 났어요. 저랑 같은 일을 겪은 여자 기사도 있었어요. 그분은 교육지원기사는 아니고 조장만 하고 있었는데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한 거예요. 알고 봤더니 그분이 담당하던, 능력도 안 되는 다른 남자 기사를 조장시키려고 했던 거죠. 어이가 없었어요. 본사 관리자 만나서 “이 회사는 남자들만 진급시키는데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내리는 거냐. 내가 남자였어도 이랬겠냐.”며 막 따졌더니 해결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관리자는 해결도 안 해주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버렸어요. 


다음 관리자가 본사에 중간 관리자 자리가 났으니 면접을 보라고 했어요. 기회 있을 때 뭐든지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면접 봤는데 “우리 팀은 술도 잘 마셔야 한다.”는 둥 얼토당토않은 말만 하더라고요. 결국 연락이 없었어요. 어느 날 단체 카톡방에 본사 지원기사가 슝 들어오더니 “제가 여러분을 담당할 본사 관리자입니다.” 하는 거죠. 어차피 본사 사람 올릴 건데 협력사 너희들도 기회 있어 이러려고 들러리 세운 거였어요. 너무 화가 나기도 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본사로 갈 수 없는 들러리구나 싶어 회사에 대한 정나미가 똑 떨어지기 시작했죠. 


예전에는 본사 전환 시험을 보면 본사로 갈 수 있었습니다. 매장에 본사 직원이랑 협력사 직원이 같이 일하는 경우가 있는데 차별이 확연히 드러나죠. 같은 일을 하는데 본사 직원은 월급도 더 많이 받고 명절에도 쉬는데, 협력사 직원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문제가 있을 때 우리도 본사 직원이랑 똑같이 해줘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나도 본사 직원이 돼야지 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본사 전환 시험도 어느 순간 말없이 없애버렸죠. 지금은 진입이 막혔어요. 협력사 직원은 10년을 일해도 똑같구나,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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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노동상담소 ‘비상구’에서 상담을 받으면서 시작된 노동조합 활동(@파리바게뜨지회)


“너는 10만 원만 뱉으면 돼.”


신입기사 한 명을 교육시키는데 2주 정도 걸려요. 한 명당 수당 10만 원을 받고요. 저는 한 달에 두 명을 교육하고 있어서 20만 원을 받고 있었어요. 그런데 15개월 전수조사를 해서 3개월 만에 퇴사하거나 다른 점포로 이동한 신입이 있으면 ‘교육 실패’로 보고 한 명당 5만 원을 빼간다는 거예요. 본사에서 교육 시작할 때 5만 원을 주고 끝나면 5만 원을 추가로 주는 걸로 지시했는데 협력사에서 한 번에 10만 원을 다줬다며 정리해야 된다는 거죠. 신입기사들이 적응을 못하는 건 현장 시스템 문제예요. 작업 환경이 좋지 않거나, 점주가 안 좋거나, 일이 힘든 매장에 신입기사들을 보내다 보니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거든요. 심한 경우는 한 매장에 2년 동안 대여섯 명 바뀐 경우도 있어요. 경력이 있는 기사들은 매장 상황을 잘 아니까 안 가려고 하니까. 


관리자가 전화해서 좋은 소식이 있다면서 하는 말이 “조사를 해보니 넌 10만 원만 뱉으면 돼.” 이러는 거예요. 따졌더니 자기한테 말하지 말래요. 자기도 본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고. 너무 화가 나서 울면서 빵을 만들었어요. 그때 그만둘 결심을 했죠. 

너무 화가 나서 친구한테 울면서 말했더니 노무사를 한 번 만나보라고 권하더라고요. 무료 노무 상담 현수막이 걸려있는 곳을 봤다면서. 공짜니까 가보지 싶어 전화해서 찾아갔는데 거기가 정의당 노동상담소인 ‘비상구’였어요.


신고한 게 아니라 상담을 했을 뿐


사정을 얘기하다 보니 우리 구조가 너무 복잡한 거예요. 노동부에 신고하면 5만 원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던 건데 노무사는 본사에서 업무 지시를 어떻게 하는지부터 꼬치꼬치 물어요. 우리는 계속 회사 마음대로 내 돈 5만 원 빼가도 되는지 확인받고 싶은 거고, 노무사님은 근태, 체불임금 자료수집 가능한 지만 계속 확인하고. 제가 듣고 싶은 말은 “5만 원 빼가는 거 불법이야.” 이 한마디였거든요. 그래서 노무사 말에 감흥이 없었어요. 그렇게 서로 다른 얘기하다가 알겠다고, 자료 모아보겠다고 하고 돌아왔죠. 사실 다른 건 관심도 없었어요. 연장수당은 회사가 주는 게 아니라 점주가 주는 거라 받을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거든요. 연장 체크한 적도 없고. 점주가 협력사에 용역비를 보내는데 그 속에 연장수당 항목이 없어요. 연장수당을 포함시키면 용역비가 높아지는데 점주들은 연장 달 거면 우리 매장 오지 마, 하는 식이거든요. 기사들도 점주랑 사이가 좋아야 편하게 일하기 때문에 연장수당을 포기하는 거죠.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고 하다 보니 국회에 들어가 얘기하자고 하더라고요. 정의당 노동 부문 보좌관 만나 설명했더니 문제가 엄청 많다면서 우리한테 “이 지경이 되도록 왜 이러고 있었냐.”며 화를 내는 거예요. 다 이러고 사는데 어째, 하는 심정이었죠. 그때부터 보좌관과 연락하며 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이정미의원실에서 SPC에 불법파견 정황 제보 들어왔다는 내용으로 공문을 보냈죠. SPC가 뒤집혔어요.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죠. 관리자가 전화해서 “신고 들어왔는데 혹시 너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라고 했죠. 왜냐면 난 신고한 게 아니라 상담한 거니까. 보좌관이 당사자가 움직이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난 퇴사할 거여서 하고 싶지 않다고 했죠. 불안해하며 일하고 있는데 파란색 목줄하고 오는 사람만 보면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고요. 어찌어찌 하다 보니 한겨레신문 인터뷰도 하고 기사가 나가면서 빵 터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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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를 파기한 파리바게뜨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2019년 1월 SPC 본사 앞에서 열었다.(@파리바게뜨지회)


우리는 원래 SPC 직원이었다


처음엔 친한 사람 6~7명 모아 설명회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놀란 거예요. 우리가 일하는 곳이 불법적인 요소가 가득한 구조였다니, 우리는 원래 SPC 직원인 게 맞다니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 설명회를 하자고 해서 40여 명을 모았어요. 그 과정에서 관리자랑 통화하면서 내가 신고했다고 실토했죠. 화섬노조(전국민주화학섬유노동조합연맹) 분들도 설명회 자리에서 처음 만났어요. 노조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노조가입서를 돌렸는데 세 명 빼고 다 가입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죠. 그러다 “너 지회장 해.” 해서 얼떨결에 지회장을 맡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큰 뜻을 가지고 한 줄 아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다단계 같은 거예요. 그전에도 워낙 불합리한 일이 많으니까 노조가 없어서 그렇다는 얘기들을 하곤 했어요. 농담 삼아 “너가 총대 매면 내가 가입할게.” 이런 식이었죠. 그런데 그날 노조가 만들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던 거죠. 노조 출범하고 자, 이제 고민해보자 이렇게 된 셈이에요. 


기사들이 전국에 퍼져 있다 보니 건너 건너 연락하는 방식으로 조직했어요. 우리는 소문이 빨리 퍼질 줄 알았어요. 왜냐면 우스갯소리로 ‘소문바게뜨’라고 할 만큼 소문이 빨리 퍼지거든요. 그런데 노조는 아닌 거예요. 듣기만 하고 퍼트리진 않는 거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SNS를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반응이 먼저 오더라고요. 제빵기사들이 자기가 만든 빵 사진을 찍어 올리면서 교류를 하고 있었어요. 여수에서 한 명, 울산에서 한 명, 먼 지역에서 가입을 하기 시작했고 조합원이 모였어요. 전국 간담회 돌고 하면서 노조 설립 4개월 만에 조합원이 800명 됐죠. 언론에서 크게 관심을 가지면서 순조로웠던 거 같아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공항 가서 정규직 전환 얘기하면서 이후 첫 번째 불법파견 사례로 제시되기도 했고. 파리바게뜨라는 브랜드는 시민들 누구나 아는 사업장이기도 해서 관심도가 더 높았던 것 같아요. 운이 좋았죠.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 자회사 


그런데 난관이 참 많았습니다. 2017년 11월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는데 일하는 곳이 모두 떨어져 있다 보니 가짜뉴스가 많이 떠돌았어요. 흘러 다니는 정보가 차고 넘치니까 기사들이 더 혼란스러워했죠. 회사는 직접고용 못하게 하려고 자회사도 아닌 ‘해피파트너즈’라는 상생회사를 만들었어요. SPC 자본이 33퍼센트만 있고 나머진 협력사 자본이었죠. 처음엔 ‘저는 파리크라상의 직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는 문구를 넣은 서약서 같은 걸 받았죠. 노조에서 철회서를 받기 시작했더니 상생회사 근로계약서를 받으면서 한국노총 가입원서도 같이 받는 거예요. 본사 정규직 노조는 한국노총 식품노련 소속인데, 협력사는 한국노총 중부지역 공공산업노조 소속으로 받는 거죠. 11개 협력사별로 노조를 따로 만들어서 강제로 가입시키고 한국노총으로 넘기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러면서 자회사로 가자고 하면서 애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18년 1월 11일, 협력사 배제하고 민주노총 화섬노조와 사측이 만나 자회사로 결정하는 사회적 합의를 했습니다. 협력사는 불법이기 때문에 빠지라고 한 거죠. SPC가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SPC가 51퍼센트, 점주가 49퍼센트 지분을 가진 ‘피비파트너즈’라는 자회사를 만든 거예요. 그런데 웃긴 건 법인 사업자번호를 해피파트너즈 번호 그대로 갖고 온 거예요. 복잡한 얘긴데, 상생회사일 때 기업노조가 만들어졌는데 걔네들이 이젠 또 “우리는 이제 피비파트너즈 노조야.”하면서 들어와 있어요. 자회사 한국노총 소속 노조도 있고, 민주노총 화섬노조 소속인 우리가 있고, 세 개의 노동조합이 함께 있는 구조가 돼버렸죠. 기업노조 만들 때 자기들은 한국노총도 민주노총도 아닌, 정치권과 관계없는 순수한 노조라고 했는데 지금은 본사 노조랑 같은 한국노총 식품노련으로 들어가 있어요. 대부분 관리자들이라 남성들 중심이죠. 지금은 한국노총 노조랑 기업노조가 연합노조가 됐습니다. 협력사 시절에 남성들만 진급시키는 거 때문에 열 받았는데 기득권을 가진 나이 많은 남성들이 노조를 꽉 잡고 우리를 탄압하고 있는 거죠. 결국 우리가 교섭권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쪽이 조합원을 강제가입 시켜서 과반이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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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 패션파이브 앞에서 사회적 합의 이행을 요구하며 조합원들이 선전전을 하고 있다.(@파리바게뜨지회)


해결되지 않는 갈등 속에서


사회적 합의하면서 3년간 본사직과 임금 체계를 맞추기로 했는데 연합노조 쪽 사람들은 우리가 합의한 게 아니다, 3년간 임금 맞추기 하면 회사가 망한다는 입장이에요. 뭘 좀 바꿔보려고 하면 노노 갈등으로 가고, 회사랑도 싸워야 하고, 점주랑도 싸워야 되는 구조가 돼버렸죠. 여름에 회사 유니폼 옷감이 두꺼워서 최대한 비슷한 디자인으로 시원한 걸로 맞춰 조합원들에게 주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난리가 난 거예요. 유니폼 입은 사람 조사하고, 경위서 받고. 알고 보니 한국노총 노조 쪽에서 규정 위반 아니냐며 조사하라고 민원을 넣었더라고요. 유니폼은 현장에서 가장 와 닿는 이슈인데 자기들이 선점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자회사로 전환 결정할 때 반대한 분들도 있습니다. 전날까지도 조합원들에게 연락하면서 근로계약서 안 쓰고, 끝까지 버틴 사람들만 직접고용이다, 자회사 간 사람들은 모른다, 했거든요. 근로계약서도 안 쓰고 버텼는데 결국 해피파트너즈랑 똑같은 데로 간 거 아니냐며 우리가 자회사하려고 싸웠냐며 탈퇴한 분들도 있고. 한국노총 쪽에서도 “결국 너희가 진 거야.” 하면서 조롱하고. 


끝까지 싸우지 그랬어


자회사··· 안 좋죠. 그런데 자회사 만들고 실무교섭하면서 얘기했던 게 본부장, 현장 관리자들 지역 배치 다시 하든지 날릴 사람 날리든지 해달라고 했는데 그쪽 카르텔 때문에 안 됐어요. 중요한 건 직접고용이 되든 자회사로 가든 대립했던 관리자가 그대로면 어디로 가도 힘들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현장에서는 관리자하고만 마주치니까 변화된 걸 잘 못 느껴요. 그래서 강하게 투쟁에 함께했던 분들은 나아진 게 없다며 실망을 많이 하고, 지금도 만나면 “그때 그렇게 합의하면 안 되는 거였어.” 하고 말씀하시죠. 그런데 그때로 돌아가도 자회사를 선택했을 것 같아요. 당시 상황이 회사에서 12월까지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1월부터 상생회사와 협력사 임금 차이가 확 날 거라고 협박을 했거든요. 사람들이 엄청 흔들리더라고요. 노조 집행부는 버틸 수 있는데 조합원들은차이 나는 임금을 받으면서 몇 명이나 버틸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했고요. 조합원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있으니까 혼자서 불안해하거든요. 


직접고용을 일부 포기한 거를 후회할 때도 있는데 그건 지금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인 거 같아요. 우리가 교섭을 할 수 있는 상황이면 모르겠는데 한국노총에게 뺏기니까 솔직히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해볼 걸 하는 후회도 있어요. 현장에서는 너네가 언제까지 노노갈등할 거야, 기득권 싸움이잖아, 너네가 손잡고 회사한테 얘기해야지, 하는데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쪽 위원장이랑 수석부위원장 만나 얘기도 해봤는데 직접고용을 방해하던 그들이 오히려 저희를 비웃더라고요. 너네가 포기한 거잖아, 끝까지 싸우지 그랬어 하면서.


우리에게 교섭권은 없더라도 우리 노조 조합원들은 확실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고, 조직 활동을 계속 해야죠. SNS로 가입해도 소속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쉽게 가입한 만큼 쉽게 탈퇴하고···. 결국엔 직접 만나야 돼요. 

노동조합 활동이란 게 알면 알수록 복잡한 것 같아요. 저는 노동운동하는 사람이야, 라고 하지 않아요. 2년밖에 안 되기도 했고, 계속 공부해나가고 있는 과정이죠. 회사 안에서 아닌 거 아니라고 말하는 정도예요. 그전 같으면 아닌 거 같아도 말할까 말까 고민했을 텐데 이젠 바로 가서 말할 수 있다는 거. 앞으로 살면서 더 그렇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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