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되거나 외면당해온 몸에 관하여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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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노동하는 몸, 사유하는 몸, 질문하는 몸, 가로지르는 몸, 뛰어넘는 몸, 주저앉는 몸, 통곡하는 몸, 침묵하는 몸, 전시되는 몸, 전시하는 몸, 지배당하는 몸, 지배하는 몸···. 무수한 몸들이 있다. 피와 뼈와 살과 근육과 각종 장기가 어우러진 인간의 몸 곳곳에 제각각으로 자리한 희미하거나 선명한, 수많은 선들 사이에서는 땀이며 눈물이 쏟아지기도 한다. 각각의 몸이 몸이라는 장場 안팎에서 벌이는 느슨하거나 치열한 투쟁의 응집물이기도 한 땀과 눈물을 딛고서 몸은 나이 들어간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단위가 되는 몸을 잠시만 들여다봐도 길거나 짧은 세월 동안 나름의 ‘싸움’을 겪고서 현재에 이른 각각의 몸이 서로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제각각이므로 그럴 수 없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이토록 다양한 역사와 맥락을 지닌 저마다의 몸들을 두고 서열을 매기고 위계를 부여하여 차이를 차별로 치환해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여성의 몸이라서 장애인의 몸이라서 피부색이 달라서 나이든 몸이라서 어린 몸이라서 대상화되거나 외면당하거나 비하되거나 터무니없는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랜 세월, 재단하고 구분 짓고 향유하는 주체로 조직되어 온 권력집단의 몸/시선은 그들보다 약자인 몸들을 갖은 방식으로 대상화하여 소유하고 지배해왔다.


대상화되어온 몸의 대표적인 예로 젊은 여성의 몸을 들 수 있다. 예로부터 관에 의해 주도되거나 지원되거나 묵인되는 방식으로 여성들의 몸이 ‘동원’되어 왔다. 이 나라의 역사만 들여다보아도 알 수 있듯이 조공朝貢의 일부로 중국에 ‘바쳐졌던’ 고려와 조선의 공녀貢女들이나 일제강점기에 전쟁터 성노예로 납치되거나 끌려갔던 군위안부,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간 국가의 계획적인 관리 아래 성매매를 해야 했던 미군 기지촌의 여성들은 10대나 20대라는 어리거나 젊은 몸으로 가부장제와 국가, 경우에 따라서는 가부장제 국가와 결탁한 자본주의에 의해 동원되어 왔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의 딸들로 남성 중심, 국가 중심의 체제와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끌려가고 전시되고 지목되고 소비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대가로 알량한 물질과 기이한 명예(?)가 주어지기도 했으나 이것이 동원과 회유와 매매의 혐의와, 그 과정을 겪으며 그 몸들이 평생 짊어졌어야 할 고통의 무게를 상쇄했을 리 만무하다. 관이 주도하거나 지원하여 젊은 여성을 동원해온 역사는 이토록 뿌리가 깊고 넓다. 힘과 돈으로 여성의 몸을 ‘누리는’ 남성 문화는 여전히 광범위하게 이 나라 곳곳, 지구 도처에서 작동 중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매년 7월 말에서 8월 초 무렵, 일주일에 걸쳐 관 주도로 축제가 열린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십여 년째 지속되고 있는 축제 기간 동안 여러 가지 행사가 펼쳐지는데, 그 가운데 ‘(세미)누드 사진 촬영대회’라는 것이 있다. 전국사진작가협회 소속 지부가 관의 지원을 받아 치르는 이 행사에 항의하는 피케팅을 하기 위해 지난 축제 기간에 지인 몇몇과 대회장을 찾았다. 젊은 여성들의 누드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이른 아침, 고급 승용차에 비싼 장비를 싣고 전국 각지에서 행사장을 찾은 이들의 90퍼센트 이상은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피케팅을 하는 우리를 향해 “우린 돈을 주고 여기에 왔다. 예술이 뭔지도 모르는 너희가 왜 여기에 와서 우리의 작품 활동을 방해하느냐.”고 호통을 쳐댔다. 그들이 반말로 하는 ‘요구’를 포즈에 담아내려고 맨몸으로 안간힘을 쓰는 여성들이 어디서 얼마의 돈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그 남성들의 고급 취미를 위해 동원된 여성들로 보였다.


상품과 지역을 홍보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십대 중후반에서 20대 중후반 여성들을 대상으로 전국 곳곳에서 매년 열리는 십수 가지 미인대회라는 것도 얼핏 보면 여성들의 자발적인 참가에 의해 치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결국 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이미 그 관의 인사가 된 지역유지쯤 되는 남성들이 그 영향력을 발판 삼아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자본을 미끼로 자신들의 축제에 젊은 여성들을 동원하는 ‘쇼’에 가깝다. 인천, 대전, 마산 등지에서 수십 년째 관의 지원 아래 치러지고 있는 여성누드사진 촬영대회며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지역 예산이 들어가는 영양고추아가씨니 김천포도아가씨니 춘향선발대회니 미스변산선발대회니 하는 온갖 이름을 단 지역의 미인선발대회가 그렇다. 이 모든 ‘소동’은 가진 자들이 동원의 장을 마련해 정치적·경제적 약자인 여성을 ‘소비’하도록 하고, 젊은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몸(과 성)을 ‘자산’으로 삼도록 부추기는 이 사회의 정치적·문화적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 이런 구조가 남성의 몸은 ‘누리고/요구하고’, 여성의 몸은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이 되어온 구태의 답습을 가능케 해왔다. 깊고 집요하고 광범위한 여성 억압과 성차별이 이런 구조 위에서 반복되어왔음은 말해 무엇하랴.


거듭 말하거니와 갖가지 명분을 내세워보지만 미인선발대회니 누드사진 촬영대회니 하는 행사의 본질은 젊은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데 익숙한 남성 집단의 저열한 문화를 구현하는 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몸들을 ‘동원’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그 몸들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이 건재함을 확인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의 몸이 괜히 ‘전쟁터’가 되어왔겠는가. 약 800년 전 원나라로 끌려가던 공녀들과 80년 전 군위안부로 잡혀가던 조선의 여성들과 현재 온갖 미인대회에 동원되는 여성들의 몸에 얽혀 있는 질긴 연관성을 곰곰이 헤아려보게 되는 까닭이다. 관에서 주도하거나 지원하여 여성의 몸을 도구화·대상화하는 현재의 갖가지 지역 행사들이 사라져야 한다고주장하게 되는 이유다. 이런 터무니없는 행사들이 사라진 이후라야 여성의몸은 이 강고한 남성 중심의 지배 질서에 숨구멍 하나라도 내었다고, 더불어그만큼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약자들의 몸이 해방되는길이라는 건 오랜 세월 동안 일상 속에서 구태의연하게 작동해온 잘못된 관행들을 멈추게 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가부장주의/성차별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와 결탁한 혐오가 낳은 ‘포비아’라는 유령이 공기처럼 떠돌고 있는 현재 속에서 여성의 몸, 정치적 약자들의 몸을 두고 벌어져온 갖가지 현상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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