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면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_강금주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여수지회장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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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태풍 다나스가 여수에 머문 날 돌산대교 인근 카페에서 강금주 지회장을 만났다. 노동조합 활동 시작한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어찌 보면 새내기 활동가다. 여성 대리운전 노동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감정노동이 엄청 심하겠구나’였다. 남성 손님이 대부분일 테고, 게다가 취객을 상대하다 보면 나를 내려놓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견디기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 강 지회장은 자신에게 맞는 일이고, 재밌고 즐겁다고 한다. 노동조합 활동도 우여곡절이 많긴 하지만, 어릴 적부터 바라던 노래와 몸짓패 활동을 함께하면서 즐기면서 하고 있다. 

 인터뷰·정리 : 강인수 센터 상임활동가


도입사진 (2).JPG


복덩이 셋째 딸로 태어나서


꼭지. 외할머니가 지어준 어릴 적 이름이에요. 부모님이 딸만 줄줄이 셋을 낳다보니 딸 그만 낳고 아들 보라고 그렇게 불렸죠. 심지어 엄마는 갓 태어난 내 입에 솜을 넣어서 아랫목에 내버려뒀대요, 죽으라고. 그렇게 반나절을 놔뒀는데도 죽지를 않아 외할머니한테 “나는 쟤를 못 죽이겠으니 나이 먹은 엄마가 어떻게 좀 해봐."라고 했더니 “저년이 나중에 복덩이가 될거다.”라며 죄짓지 말라고 하셨대요. 이후에 낳은 두 동생은 아들이었어요.


외할머니 말대로 내가 태어나고 집안형편이 나아졌대요. 나중엔 땅도 사고 집도사고···. 셋째 딸인데도 집안일은 도맡아했어요. 엄마가 보부상을 해서 집을 잘 비웠는데 큰언니는 밥이 없으면 굶고, 작은언니는 우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래서 일고여덟 살부터 언니가 울고 있으면 내가 밥을 하곤 했어요.


학교 갈 때는 가방을 세 개 들고 다녔어요. 내 책보는 매고 동생들 가방 두 개 들고. 중학교 때는 키가 크다보니 배구, 핸드볼 등 운동도 잘했죠. 노래도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합창부를 했어요. 대학 가서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죠. 그런데 아버지가 연년생인 남동생을 대학 보내야 하고 다섯 명 다 가르치기 힘들다며 상고를 가라고 하셨어요. 그때 많이 울었습니다.


노동운동의 첫 경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아남반도체에 생산직으로 취직했어요. 3교대 근무하며 2~3년 동안 돈 모아서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모은 돈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했더니 남동생이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안 된다 하더라고요. 엄마가 백반집을 하고 있었는데 살림할 사람이 없어 창원 집에서 지내게 됐어요.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있는 일본계열 회사인 수미다전자에 취직을 했죠. 그때가 노동자대투쟁 시기여서 수출자유지역 내 공장마다 노동조합 결성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어요. 공장에 위장취업한 대학생들이 있었지만 나는 별다른 의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데모에 참여하던 분위기였죠. 작은 업체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노동조합 만드는 분위기에다우리도 느끼는 부당한 부분이 많았던 때라쉽게 휩쓸렸던 것 같아요. 최류탄 때문에눈 밑에 치약 바르고 얼굴에 랩 씌우고, 전경들한테도 엄청 두드려 맞으면서 데모하러 다녔죠. 그때는 지나가는 행인도 맞을때였으니까요. 잠깐이지만 노동운동이란 걸 한 때였어요. 그런데 우리 집은 노동운동의 ‘노’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고모 아들이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노동운동하다 교도소에 수감됐거든요. 그래서 이후에 노동운동으로는 눈 뜰 생각을 안 해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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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3일 열린 전국대리운전노조 전남지부 여수지회 설립총회 및 출범식(@여수지회)


서울에서 여수까지…


공장 그만두고 집안일하면서 일여 년 정도 농협에서 생필품 판매를 했습니다. 그런데 작은언니가 많이 아프다고 해서 아기 봐주러 서울로 갔어요. 어느 날 사돈어른이 중매를 서겠다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없어서 선을 봤습니다. 아기 데리고 사돈어른이랑 호텔 커피숍에 갔죠. 나이 든 사돈한테 아기를 맡길 수가 없으니 내가 아기를 업고 기저귀 가방 매고 간 거예요. 그러니 선보러 나온 남자는 처음에 내가 상대 여성이란 걸 생각도 못했죠. 나를 맘에들어 해서 몇 번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일사천리로 진행돼서 6개월 만에 결혼을 하게 됐어요.


남편은 안산 시화공단에서 자동차 금형용접 일을 했습니다. 전라도 광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했는데 얼마 후엔 명예퇴직까지 권유받는 상황이 됐어요. 그때 전남 여수 살던 시누이가 건물을 짓고 있는데 한 층을 임대할 테니 와서 식당하며 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어서 불렀던 거예요. 그 과정에서 남편이랑 많이 싸웠죠. 가기 싫었거든요.


결국은 경험삼아 해본다는 생각으로 여수로 가게 됐습니다. 막상 갔는데 집도 안 지어놔서 이삿짐 둘 곳도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시부모님 댁 방 한 칸에 아이 둘까지 데리고 네 명이 살게 됐죠. 정말 힘들었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 밥하고 빨래하고 나가서 장사하고, 애들 챙기고···. 민물장어집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여수에 민물장어집이 없어서 장사는 잘 됐어요. 돈을 좀 벌면서 대출 받아 전셋집 구해 나왔죠.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시누이가 빚을 졌는데 감당을 못해 건물이 넘어갈 지경에 이른 거죠.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가게를 정리했는데 1억 정도 까먹은 거 같아요. 그때 정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이후엔 지인의 권유로 자동차보험 설계사를 하게 됐어요. 생각보다 보험 일이 재밌더라고요. 영업도 잘해서 신입사원 중에서 실적이 상위권에 속했죠. 먼저 보험 가입해달라고 말해본 적은 없어요. 가족한테는 보험 안 받는다는 영업 철칙도 있었습니다. 영업은 신용도와 맞아떨어지더라고요. 식당 할 때 만난 손님들이 많이 가입해줬어요. 보험하면서 돈도 꽤 벌었지만, 남편이 일을 쉬면서 경제적으로 넉넉지는 않았어요. 낮에는 보험회사 다니고 밤에는 식당 일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놀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더라고요. 삼시세끼 다 해먹이고, 애들 챙기고, 식당 일하고 집에 가서 설거지하고.돈 버는 데만 바빠서 애들도 제대로 못 챙겼어요. 너무 미안했죠.


울 시간도 없이 시작한 대리운전


대리운전을 시작한 건 2003년쯤이었습니다. 보험만 해서는 혼자 아이 둘 교육시키며 살기가 빠듯해서 계속 밤에도 일을했는데 자주 가는 옷가게 언니가 “너 운전잘하잖아. 대리 한 번 해봐.”라고 하더라고요. 그전에 학원 차를 운전한 적도 있거든요. 마침 아는 동생도 대리운전을 하고있었어요. 잘 아는 형이 대리운전업체를차렸는데 여자기사가 없다며 한 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시급제였는데 시급이 5천 원이었어요. 팀플(픽업기사, 운전기사 두 명이 팀으로 같이 움직이는 형태. 교통편이 좋지 않은 지방에서는 대리기사가 외진 마을로 들어가면 타고 나올 차가 없어 픽업기사와 함께 움직인다)로 뛰는데 생각보다 나한테 잘 맞고 재미있더라고요. 보험하면서 영업이 몸에 배어 있기도 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니까. 친구나 가족한테도 못하는 얘기, 술 취한 손님이 울면서 자기 힘든 얘기하는 것도 들어주고···. 때론 험한 사람들도 만나죠. 운전하는데 뒤에서 발로 차고 때리고 욕하고, 맞아서 콧대가 부러진 적도 있으니까. 한 번은 공무원들이 탄 차를 대리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온 손님들이랑 드라이브를 하겠다며 시켜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대리기사가 드라이브해줘야 할 의무 있는가요?” 그랬더니 “내가 누군지나 알고···. 내가 여수시청 누군디 니가···.” 오동도 갔는데 원래는 밤에 못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경비가 싸우기 귀찮은지 열어주더라고요. 오동도 안까지 가서 내렸는데 돈 2만 원을 땅바닥에 탁 던지는 거예요. 내가 그걸 주워서 구긴 다음에 그 인간 얼굴에 확 던져버렸어요. “대리기사가 그리 하찮습니까. 2만 원 없어도 삽니다. 공무원이면 대숩니까. 내가 내일 시청 가서 당신 모가지 자를 수도 있습니다.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서울에서 온 손님이 저한테 미안하다고 엄청 사과했어요. 대리비 만 원 주면서 종부리드끼 부릴라는 게 그렇게 싫더라고요. 내가 빌어묵는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일해서 버는 건데. 그래도 하루 서너 시간 자면서 울 시간도 없이 일했습니다. 나는 우리 새끼들만 보고 살았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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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3일 열린 전국대리운전노조 전남지부 여수지회 설립총회 및 출범식(@여수지회)


노동조합을 알자마자 지회장이 되다


해피콜대리운전 업체에 소속돼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업체가 바뀐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여수에 식스대리운전이 막 생겼을 때 해피콜대리운전 사장이 식스에 팔아버린 거죠. 마지막 날까지 기사들한테 말도 안 하다가 새벽 3시에 퇴근하려니까 식스로 들어간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장한테 따졌죠. “너는 참 못됐다. 기사들이 다른 업체를 가든 안 가든 선택권을 줘야 되지 않냐.”


그러곤 잠깐 대리운전을 쉬다가 잘 아는 사이인 식스대리운전 사무장한테 전화를 한 번 해봤어요. “누나 왜 안 온가?” 하기에 “우리까지 다 싸잡아서 팔았다는디···. 누구누구해서 보낼 테니 내 꺼까지  등록은 해 놔라.” 하고 면허증을 복사해서 보냈습니다. 기사번호 48번을 받고 식스대리운전에 들어갔죠. 식스대리운전이 여수에서 제일 큰 업체거든요.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대리운전노동조합을 처음 안 건 4~5년전 회사 직영 대리기사로 일할 때였어요.콜 뛰면서 노동조합 임원을 알고 있긴 했지만 딱히 노동조합에 가입할 생각은 안해봤습니다. 관심도 없고, 그렇다고 권유하는 사람도 없었죠.


작년에 대리비가 만 원에서 2천 원이 더 오르면서 굉장히 말이 많았습니다. 업체에 내는 수수료도 얼토당토않게 올랐거든요. 그래서 노조에 가입하게 됐어요. 민주노총 여수시지부 가서 가입원서 바로 썼죠. 당시 전남지부장이 조합원 50~100명 데려오면 식스대리를 상대로 싸우겠다고 했거든요. 그때 불만이 많이 쌓인 기사들이 상조회를 만들겠다고 가입 받고 할 때였어요. 나도 노조 가입원서 들고 다니며 법 테두리 안에서 같이 하자고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상조회에 있던 사람들 열 명이 조합원 모임 할 때 와서 가입했죠. 조합원 50명 정도 가입원서 받고 작년 12월 23일 전국대리운전노조 전남지부 여수지회 설립총회 및 출범식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대리운전노조 임원들도 내려오고 전남지부에서도 오고. 나는 조직부장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근데 지회장으로 내정됐던 사람이 안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지회장 할 사람이 없으니 임시로라도 나보고 하라는 거예요. 모인 44명 중에 26명이 찬성해서 지회장을 하게 됐죠. 어안이 벙벙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준비도 돼있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밤 1시에 퇴근하는데 식스대리 사무장 전화가 왔어요. “누나, 누나가 대표됐담서요?”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5분도 안 돼서 다 들어온다는 거예요. “누나한테 충고 한마디하려고 전화했다.”며 “그 사람들한테 이용당하지 말고 하지마소.” 하더라고요. 내가 안 하면 다른 사람이 똑같이 이용당하지 않겠느냐, 누가 당해도 당하는 거면 어차피 내가 대표 맡고 해볼 수 있는 만큼은 해볼란다고 했죠.


출범식과 동시에 콜이 꽉 막혀버렸어요.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이 올라간 거죠. 그전에 순천 연합센터에 가명으로 대리기사 등록을 해뒀어요. 다행이었죠. 어쨌든여수에서는 나를 포함해 네 명이 해고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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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이틀은 천막 선전전을 하면서 조합원들을 만나고 있다.(@여수지회)


연대, 해결해야 할 문제들


매주 월, 화요일 선전전하면서 3월에 계획된 전국단위 여수 집회 연대 요청을다녔어요. 여수산단 노동조합 찾아다니며 대리노조가 아직 힘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했죠. 노조에 가입하면 대리노조만 싸우는 게 아니라 여수산단 노조가 모두 힘을 모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안 좋았어요. 저그들이 우리한테는 한 번도 안 오다 어려우니까 도와달라고 한다는 식이었죠. 그래서 인사하러 가면 항상 혼났어요. 여수에 대리운전노조가 있는 줄도 잘 모르고 있기도 하고요. 이건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텐트 치고 조직 선전전 계속 하면서 조합원을 꾸준히 늘렸습니다. 짧은 시간에 70~80명으로 늘어났죠. 다행히 3월 집회도 평가는 엇갈렸지만 잘 끝났습니다.


집회 끝나고도 계속 선전전하면서 노조 알리고 부당해고에 대한 복직을 요구하며 노동조건에 대한 문제제기를 계속 해왔습니다. 그 와중에 무조건 싸우지만 말고 노사협의체를 구성해보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나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죠. 복직에 대한 회사 측 참여약정서가 왔는데 잘 살펴보면 우리가 말을 잘 안 들으면 다시 자르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거든요. 나는 복직도 중요하지만 수수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기사들이 원하는 게 수수료 문제니까. 그런데 형식적인 거니까 양보할 거 양보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도 받고 해서 협상하자는 주장이 강했어요. 나는 영 내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조직국장 때문에 양보했습니다. 조직국장이 결혼한 지 두 달도 안 돼 잘려서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거든요. 그래도 협약식엔 안 갔어요. 얘기 들어보니 사장도 안 나오고 과장이 대신 나와 도장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기자회견.jpg

지난 1월 17일 여수시청 앞에서 식스대리운전의 부당해고 철회와 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여수지회)


조직 선전전 꾸준히 하고 연대투쟁도 열심히 나가고 있어요.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조합원들과의 약속 때문에 그만두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 쌓여있으니까요.


여수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대리기사가 두 업체에 등록해서 일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순천은 식스대리운전에 대리기사 등록이 되어 있어도 다른 업체 앱을 깔 수 있는데 여수는 같은 식스대리운전인데도 여기에 등록하면 다른 업체 일을 못해요. 깜깜이(고객이 출발하는 장소는 앱에 뜨지만 도착지는 알 수 없는 시스템을 일컫는 말) 문제도 있습니다. 손님을 만나야 도착지를 알 수 있어요. 외곽지 콜을거부하면 회사에서 일을 못하게 정지시키죠. 게다가 여수는 다른 지역과 달리 콜이길어요. 순천이나 광양은 10~15분 안에한 콜을 뛸 수 있는데 여수는 여천에서 돌산까지 가면 30~40분 걸리거든요. 그런데 시간이나 거리 관계없이 대리비는 똑같아요. 업체에 내는 수수료도 29퍼센트나되고 보험료도 사람마다, 업체마다 제각각이어서 단일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민주노총 사무실에 이렇게 자주 다닐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이 많았어요. 그래도 가야 할 목표가 같다면 치고박고 싸우며 서로 부딪끼더라도 안고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조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덜컥 지회장이 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보험 그만두고 대리운전하면서 낮에는 학원 차를 운전했습니다. 그런데 기자회견이며 집회를 잡을 때 내 시간에 맞추다 보면 지장이 있는 거 같아서 3월에 학원차 운전을 그만뒀어요. 이왕 지회장 한 거 어떤 일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죠. 그래서 몸짓패 활동도 시작했어요. 노래분회도 만들어서 얼마 전부터 시작했고요. 어렸을 때 가수가 꿈이었는데 이제 노래를 하게 되네요. 즐겁고 재미있게 하려고 해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잖아요.


몸짓패.jpg

5.18민중항쟁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몸짓패 공연을 하고 있는 강금주 지회장(@여수지회)


대리기사들은 모이기가 참 어려워요. 기사들 많이 모이는 곳에 천막을 치고 일종의 소통방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더라고요. 3개월 정도 하다 말겠지 했던 거죠. 꾸준히 하다 보니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사라지고, 천막에 와서 회사 측에서 들은 얘기도 전해주고, 불만도 편하게 얘기하곤 해요. 지금은 조합원이 80명 정도 되는데 노동조합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믿음이 생긴 거죠. 남은 임기 동안 조합원들한테 지킬 수 있는 건 지키고, 잘하든 못하든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해요. 나한테 맞는 일이고 즐겁고 재미있게 하고 있으니까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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