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권이다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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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대한민국 노동자의 별 전태일.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그의 이야기. 《전태일 평전》을 읽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어린 여공들의 비참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그가 손에 잡고 씨름한 근로기준법 해설서가 온통 한자투성이 대학 교재였는지라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 공부를 도와줄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법률에서 쓰는 용어는 쓸데없이 어렵다. 우리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법인 민법은 1958년에야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는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하던 일본 민법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영향으로 우리 민법에는 일본식 한자말이 꽤나 많고 과거 국한문혼용 문장의 영향 탓에 어려운 한자말이 그득하다. ‘상대방과 짜고 거짓으로 한 의사표시’라고 하면 될 것을 ‘상대방과 통정한 허위의 의사표시(相對方과 通情한 虛僞의 意思表示)’라고 적고 있다. 이런 말들이 이해하기 어려우니 변호사에게 통역료를 내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안전용어.jpg

2017년 10월,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에서 571돌 한글날 행사로 ‘시민들이 뽑은 꼭 바꿔야 할 어려운 안전용어’ 다섯 개를 뽑는 행사를 진행했다.(@한글문화연대)


우리말과 한글의 소중함을 말할 때, 나는 그것이 우리 것이기에 소중하다는 민족주의 정서를 조금 더 넘어서자고 주문한다. 말과 문자는 그저 가치중립적인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권리문제이기도 하다. 알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도 있고 심각하게 침해당할 수도 있다. 특히 정부와 공공기관, 언론, 법률 등에서 사용하는 공공언어가 그렇다. 거기에는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 안전과 재산, 권리와 의무, 기회와 한계 등을 좌우하는 정보와 규정이 언어 형식으로 담겨 있다. 그런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그 때문에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과거에 우리 국민의 알 권리를 위협하던 말은 대개 한자말 용어였고, 읽기와 이해에 걸림돌이 되는 문자 표기는 한자 혼용이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일간신문의 한글 전용이 뿌리내리고, 모든 공문서에서도 한글 전용이 자리를 잡아 문자 표기 문제는 이제 크게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말, 용어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 민법에서 자주 나오는 말 가운데 ‘해태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게을리하다’라는 뜻이다. 둘을 비교하면 어떤가? 물론 모든 한자말을 토박이말로 바꿀 수는 없다. 또한 토박이말이라고 해서 모두 쉬운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같은 말이 있다면 한자말보다는 토박이말이 쉬운 편이므로 토박이말을 쓰는 게 좋다.


대응하는 토박이말이 마땅치 않을 경우에는 그 말보다 더 친숙하고 쉬운 한자말이 없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도무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 사용을 꺼리게 되는 ‘자동제세동기’보다는 ‘자동심장충격기’가 훨씬 더 쉽고 의미가 뚜렷하다. 심장마비에 걸린 사람의 응급 처치에는 일 분 일 초가 소중하다. 낯설고 어려운 이름 때문에 자동심장충격기를 사용하지 못하여 목숨을 건질 기회를 놓친다면 이 얼마나 땅을 칠 노릇이겠는가.


일제에서 해방된 뒤로 어려운 법률 문장과 한자말 용어를 좀 더 쉽게 바꾸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 제법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근로기준법 제14조에 규정된 ‘법령 요지 등의 게시’는 현재 ‘①사용자는 이 법과 이 법에 따른 대통령령의 요지要旨와 취업규칙을 근로자가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장소에 항상 게시하거나 갖추어 두어 근로자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1997년만 해도 ‘①사용자는 이 법과 이 법에 의하여 발하는 대통령령의 요지와 취업규칙을 상시 각 사업장에 게시 또는 비치하여 근로자에게 주지시켜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상시’라는 한자어 대신 ‘항상’이라는 좀 더 친숙한 한자어로, ‘비치하다’ 대신 ‘갖추어두다’로, ‘주지시키다’ 대신 ‘널리 알리다’로 고쳤다. 물론 1997년 것은 주요 한자어는 모두 한자로 쓴 국한문혼용 문장이었다. 법령의 한글화는 2005년 이후에 본격 추진되었다.


한자와 한자말 용어가 줄어든 요즘은 영어와 로마자가 문제다. 시민의 안전을 다루는 말 가운데 싱크홀(땅 꺼짐, 꺼진 구멍), 스크린 도어(안전문), 핸드레일(손잡이), 논 슬립(미끄럼막이), 그린 푸드 존(식품안전구역), 스쿨 존(어린이보호구역), EMERGENCY(비상사태) 등과 같이 영어가 마구 쓰인다. 복지 용어에서도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통합 돌봄), 바우처(이용권), 헬스 케어(건강 관리), 퍼실리테이터(촉진자), 코디네이터(상담사) 등이, 경제를 다루는 말에는 규제 샌드박스     (규제 미룸), 글로벌(세계적), 스타트업(새싹기업), 펀더멘털(기초), 벤치마킹(비교검토) 등이, 민생을 다루는 말에는 보이스 피싱(사기 전화), 골든 타임(금쪽 시간), 디지털 포렌식(디지털 과학수사), 로드 맵(일정 계획), 리스크(위험), 리콜(결함 보상), 젠더(성, 성평등)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어 낱말이 쓰인다. 노동자 주변에서도 거버넌스, 노동 허브, 플랫폼 노동 등 정체를 알아채기 어려운 말들이 돌아다닌다.


세계화 시대를 이끄는 언어가 영어이니만큼 영어의 영향이 강해지는 것은 막기 어렵다. 새로운 개념과 현상과 기술이 미국 등 영어권에서 태어나므로 그것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영어 사용이 늘어나는 게 어쩔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용어가 대개는 우리말로도 표현 가능한 것들을 영어로 표현하면서 우리말을 밀어내고, 그 때문에 영어 능력의 격차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하게 된다는 점이다. 영어 사용 장면에서 쉽게 노출되는 학력 신분은 ‘무식한’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리고, 그 때문에 영어 교육 열병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노동운동계에서도 영어를 쓰지 않으면 촌스럽게 보일까봐 자꾸 영어를 남용하게 되고, 그리하여 영어를 잘 못하는 노동자를 소외시킨다. 그뿐이랴.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남용되는 영어 때문에 우리 노동자들이 민주시민으로서 지니고 키워야 할 통찰력을 봉쇄당한다.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공용어는 한국어, 즉 우리말이다. 우리말만 제대로 할 줄 알면 살아가는 데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나라여야 한다. 국어 사용 권리는 대한민국 헌법에서 보장하는 알 권리와 평등권 측면에서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 기본권이다. 국어 사용 권리는 노동과도 바로 맞닿는다. 우리 헌법 제33조에는 근로의 권리가 규정되어 있다. 근로 계약을 맺을 때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내용을 노동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면, 노동자의 권리는 보장될 수 없다. 그러므로 외국인이 근로 계약 당사자가 아닌 한, 근로 계약, 취업규칙, 사규, 업무 지시 등에 외국어나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면 노동자가 권리를 행사하는데 걸림돌이 되며, 자칫하면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준다.

언어는 단지 국어 점수, 맞춤법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언어는 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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