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가만 단단하게 빛나는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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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서른두 살 그녀는 노래하고 시를 쓴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달과 밤과 새벽의 고요하고 둥근 어둠을 닮아 있되 떠오른 해의 말간 표정 또한 품고 있는 차분한 평화가 조곤조곤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 제천, 광명, 변산 등지에서 살았고 석 달 전쯤부터 전남 장흥에서 살고 있으나 10대는 오롯이 안산에서만 보냈고, 이후에도 이곳저곳을 오가며 수년간 안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 엄마는 십수 년간 당신과 두 딸을 괴롭혀온 전 아빠와 마침내 헤어졌고 몇 년 후에 새아빠를 만났다. 새아빠는 엄마와 더불어 생계를 책임지며 가족의 행복을 도모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새아빠의 권유로 스무 살 무렵 두 차례 인도로 여행을 다녀온 후 세상이 참 넓다는 생각을 했고, 가족들이 있는 안산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되었다. 사이버대학에 등록해 문학 공부를 하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로와 홍대 쪽에서 1년 정도씩 살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가 살아온 집들로 가는 길이 대체로 좁거나 어둡거나 높았던것처럼 깃들여 살던 서울의 거처들 또한 그랬다. 홍대 쪽에서 살 때는 지옥에 사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온몸에 허세와 가식을 마구 두른 사람들이 도처에서 활보했고, 심한 빈부 격차가 무시로 포착되었다. 어릴 적부터 보고 겪어온 부조리와 모순이 그 속에 겹쳐져 꾸역꾸역 자라나고 있었다. 고립감과 무력감에 시달렸고, 사람들 모습이 곧 이 사회의 모습일 것이므로 도무지 이 속에 뒤섞이어 살아갈 자신이 없어 자살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나마 시와 노래라는 도피처가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여기던 때였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곧잘 부르곤 했다. 전 아빠란 이가 부려 놓은 어두운 기억이 너무 깊고 넓은 그늘을 키운 탓인지 학교 친구들 속에 잘 섞이지 못하여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던 그때, 그녀에게 노래하기는 생존수단같은 게 되어주기도 했다. 어쨌든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면 친구들이 몰려들었고, 그 속에서 잠시나마 주목받으며 자신이 반짝반짝 빛난다고 느끼기도 했으므로. 스무 살이 넘어 성인이 되면서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좋은 시인 곧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녀 생각에 좋은 사람이 사는 삶은 아마도 좋은 삶일 것이었다. 삶과 존재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상상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시며 글을 쓰는 행위, 그런 노랫말이 담긴 노래를 부르는 일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일구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글쓰기란 게 자신의 트라우마와 마주해야 하는 일이기도 할 터이니 꾸준히 써가면서 어두운 기억들을 털어내고 자신을 바꿔가다 보면 세상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쓴 시를 노래에 담아내고, 노래를 시에 담아내면서 어떤 쾌감이랄까 해방감을 느꼈다. 하고팠던 말을 노래나 글에 잘 담아내고 나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한편 문학이란 창을 통해 존재와 삶을 들여다보는 공부를 하고 시를 쓰면서 이 이기적인 인류 문명에 회의를 품는 생태문학에 대한 관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회와 환경 문제에 관한 고민이 진전되면서 좋은삶이란 손수 농사지어 먹고 사는 삶, 자연의 일부인 자신이 자연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가며 뭇 존재와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시골로 가서 살아봐야겠다 싶어서 난생처음 도시를 떠나 전북 부안의 한 공동체로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2년 가까이 주로는 농사일을 하고 지내면서 몸 써서 농사짓고 밥 지어 먹는 삶이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걸 알았다. 첫 시골살이였는데 처음부터 강하게 이곳에 끌렸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 공동체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갖가지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 곳이었다. 공동체에 속한 학교에서 보컬동아리와 커피동아리를 꾸려가는 것으로 아이들과 꾸준히 소통했고, 세월호 사고 소식을 듣고 난 후에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면사무소 앞에 노란 천막을 친 후 아이들과 함께 1일 릴레이 단식을 2주 가까이 이어나가기도 했다. 기숙사에서 그녀와 한방을 쓰던 언니를 통해 페미니즘을 비롯한 다양한 논쟁거리며 사회문제에 관해서도 듣고 배웠다. “우리는 이미 누군가가 피땀 흘려 바꿔놓은 법을 누리며 살고 있는 거다.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많다던 그녀의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다. 그녀 덕분에 사회운동에 참여할 용기를 품을 수 있었다


2년간의 첫 시골살이를 접으면서 안게 된 젠더와 생태/환경 문제 등에 대한 고민들을 숙제처럼 짊어지고 안산으로 돌아와 유기농 카페를 꾸려가면서 집회장에 뿌려지는 전단지들을 모아 엮은 후 우편으로 보내는 일을 친구랑 둘이서 하기 시작했다. 큰 목소리를 내기 힘든 소중한 주장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금세 잊히는 게 안타깝고 아까웠다. 처음엔 거리에 뒹구는 전단지들을 여러 장씩 모아서 여기저기로 보냈으나 나중엔 전단지를 낸 단체며 조직에 직접 연락을 해서 전단지들을 받은 후 분류하고 엮어서 서류 봉투에 넣어 보냈다. 이 일을 처음엔 매달, 나중엔 격월간, 더 나중엔 분기별로 2년간 계속했다. 받아 보길 원하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 처음엔 수십 곳에 불과하던 수신지가 나중엔 천 5백 곳에 다다랐다. 일의 양이 많아지고 경제적 압박이 따르면서 2년 만에 접게 되긴 했으나 즐겁고 보람찼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섬세하게 들려주었으나 거칠게 추려서 엮은 그녀의 이야기다. 직접 쓴 글에 곡을 붙여 노래하는 사람,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며 3년 전부터 채식 중인 배지테리언, 페미니스트, 그리고 가해자의 야만을 향하던 분노와 증오를 가까운 이의 끄덕임을 통해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던 성폭력 생존자···. 혼돈과 불안을 디뎌내고서 시나브로 고요하고 묵직한 평화를 품게 된 그녀가 이번엔 혼자서 시골살이를 해보겠다며 낯선 여기로 왔다. “지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나중에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 않도록그녀는 살고 싶다. 미래에 “(현재의) 이게 틀린건 아니었다고, 지금 이것도 중요하지만 과거(가 될 현재)의 그것도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길 바란다.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꼰대가 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아는 유연한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고 싶다. 그러다 보면 그녀가 바라는 “(누군가의) 치기, 분노, 증오도 가만히 웃으면서 들어줄 수 있는” ‘넉넉한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생을 잘 대면해온 단단하게 빛나는 한 존재가 이 땅 어디에선가 가만가만 믿음직한 평화를 일궈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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