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화] 노동운동의 전망 부재가 더 큰 문제다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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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국가는 부르주아들의 집행위원회라는 마르크스의 격언을 가슴속에 품고 산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자체로 달라질 건 없다. 거 봐라 국가는 노동자를 위한 기구가 아니지 않냐? 라고 마크 저커버그가 운영하는 페이스북에 쓴다고 해서 세상은 1도 바뀌지 않는 법이다. 세상에 대한 분석과 통찰을 가지는 것과 우리가 현실에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찾는 것은 다르다. 세상을 제대로 바꾸고자 하는 헌신적인 투쟁과, 조금의 변화라도 이끌어내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 사이에서 일어나는 파열은 세상보다는 운동사회에 더 큰 논란과 변화를 낳았다. 그러나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운동사회 내부 논쟁에 비해서 현실은 초라했다. 변화는 자본과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체제 내화되거나 체제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미비하거나. 최근 사회적 대화 논쟁은 갑자기 벌어진 논쟁도 아닐뿐더러, 사회적 대화 참여에 부정적이자 비판적인 나를 포함해 대화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큰 변화는 없다는 것을 우선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회적 대화 복지국가의 성장과 몰락


국가-자본-노동조합이라는 게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라고 본다면, 이 셋의 상호작용 역시 최근에 벌어진 게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회적 대화는 언제나 자본이 약해지거나 필요할 때 요청됐다. 최초의 사회적 대화와 합의는 전쟁 이후 자본이 복구되어야 할 때였다. 물론 제국주의 시대 팽창주의적 국가와 인종주의, 그리고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국가-자본-노동의 협력이 만들어낸 최초의 합의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혁명적인 운동을 했던 이들은 이들 합의에 파열음을 내고 반전운동과 파업, 차르체제 전복이라는 혁명의 길을 걸었지만, 종전 이후 좌파가 권력을 손에 넣기 시작하면서 급속히 제도화됐다. 권력이란 계급이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쟁취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본 입장에서는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국가의 지원과 노동자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좌파의 국유화 주장은 공교롭게도 자본에게 싼 가격에 생산원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높은 임금은 대량 생산을 감당할 대량 소비의 주체인 대중의 탄생을 만들어냈다. 자본의 입장에서도 감사한 일이었다. 이것은 좌파가 만들어낸 국가-자본-노동의 새로운 합의였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이는 자본의 양보가 아니라 자본의 자신감에 가까웠다. 그 정도의 임금을 충분히 지급하고도, 국가에 많은 세금을 내고도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한편 출근한 노동자들인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좌파정당은 퇴근한 노동자들인 소비자들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성장은 계속될 것 같았고 남성 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 임금 체계와 복지제도는 거의 완벽해보였다. 따라서 이 사회적 합의에는 여성과 자연을 철저하게 배제한 합의였다. 68혁명의 목표는 사회적 합의였고, 대학 강당의 책상을 뒤엎어버린 것은 마치 전후의 사회적 협상 테이블을 뒤집어버리는 모습 같았다.


당연히도 책상을 엎는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세상은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내면서 바뀌는데 이제는 지겹고 식상한 ‘신자유주의’ 역시 자본의 위기가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적 합의 필요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어제의 파트너였던 노동조합은 오늘의 새로운 협상을 위해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국가 간 전쟁 이후 정권을 잡으면서 등장했던 노동자계급은 신자유주의 시대 계급 전쟁 앞에서 초라한 협상 파트너가 됐는데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국민의 지지를 받아서 진압해버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이렇게 보면 노동자들의 정당을 자임하는 정당이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신자유주의체제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대중정당과 노동조합운동의 길은 일치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노동운동은 국가뿐만 아니라 유권자들, 여론과 국민의 눈치를 봐야 했다. 또 산업구조 자체가 바뀌면서 노사 간 협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계속 발생했다. 실물자본을 압도하는 금융자본을 공장의 파업만으로는 규제할 수 없었다. 이외에 만성적인 실업과 사회경제적 변화에 알맞지 않는 복지제도, 그리고 글로벌 이슈와 환경 파괴 등은 노사만의 합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대한민국의 노동시장 양보할게 있나?


한국에서 노동자가 충분한 임금을 보장받고, 임금을 보장받은 가장이 가부장 역할을 했던 시기는 무척이나 짧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시작된 공장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의 임금 및 복지 향상은 97년 IMF를 계기로 브레이크가 걸린다. 문제는 한국이 노동조합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임금을 보장했지만, 조세재정 개혁을 통한 사회적 안정망 구축에는 실패했다는 점이다. 보편적 증세는커녕 부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조차 지우지 못한 나라이다 보니 개별국민이 소득 감소와 해고 등에 대응할 방안이 ‘가족’이외에는 딱히 없다.


그래서 서구 복지국가가 복지 분야에 대한 구조조정 내지 복지 축소를 다루면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간 것과 달리 한국의 노동계는 사회적 대화 또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양보할 게 별로 없다. 협상이라고 하면 이것을 양보하는 대신 저것을 취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내어줄게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적 고임금을 받는 정규직 노동시장이 좁아지고, 이것이 하나의 ‘신분’ 내지 ‘자원’화되면서 협상의 여력은 오히려 더 줄어들었다. 당연히도 이를 ‘정규직 이기주의’라고 노조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국가와 기업은 IMF 경제 위기를 소수의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자원 집중과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활용이라는 노동시장 구조조정을 완수한 바 있다.


이들 정규직 노동자들의 숫자는 소수다. 게다가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더욱 더 소수다. 이들의 양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공익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한국의 사회적 대화가 어려운 것은 강성노조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조합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회적 대화가 어려운 근본적인 어려움이 또 있다.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면 노동계가 상당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의 핵심은 동원능력이다. 잘 조직된 노동조합과 그렇지 못한 노동조합의 단체교섭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네덜란드의 경우 2004년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엎어버리고 독단적으로 조기퇴직 문제를 밀어붙이자(가을협약) 노동조합은 총파업으로 대응해 이를 무산시킨 바 있다.


이보다 더 큰 난관은 대표성의 문제다. 노조 조직률이 10퍼센트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약점은 협상에서 통 큰 결단을 어렵게 하는 한편, 국가 입장에서는 필요할 때는 대표로 인정하고, 중요한 순간에는 모든 노동자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패싱하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사실 노조 혐오가 심한 대한민국 정부는 노동계를 테이블에 앉히지 않고도 얼마든지 정부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는 점잖게 대화하고 토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노조가 딴지 거는 장면으로 연출하기 쉽다.(물론, 이것을 한국만의 특징으로 얘기할 생각은 없다.) 이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소위 깨어있는 시민들과 노동계가 갈라서는 중요한 지점이다. 


기울어지지 않는 협상 테이블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사회적 대화를 자본의 재편에 국가와 노동계가 대응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한국의 사회적 대화 방향 설정을 달리 할 필요가 있다. 후진적인 한국 자본이 노동조합을 사회적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데 더 유리하다는 생각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 제대로 된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충분히 건강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결사를 이루고,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자본에 대한 구조조정을 어떻게 할 거냐가 노동에 대한 구조조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 보다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이는 한국 자본이 얼마나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냐가 더 관건적인 문제다. 과연 자본이 노조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위기상황으로 보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사회적 대화가 난항을 겪는 이유는 사실 자본이 개혁할 의지도, 그렇다고 국가가 새로운 경제구조조정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노동운동이 실제로 자본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국가가 역시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정도의 복지제도를 가지고 있다면 사회적 대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자본을 위협할 정도의 노동운동이 없다는 것, 저들의 대화상대가 아니라는 점이 우리의 뼈아픈 현실이다.


글이 장황하게 길었지만 결론은 허무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 같다. 지금의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해야 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사회적 대화 참여파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든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90퍼센트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 전략과 전망의 부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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