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대책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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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줍는 방식으로 
모처럼의 연휴가 가고 있다
택배 상자를 차곡차곡 접어 내면서
나보다 더 자주 집에 오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과
감쪽같이 사라지는 상자들의 행방에 놀란다

노후대책을 세우려면 좀 아껴야지 않겠냐는 말을 주고
골목에는 당장 오후대책이 
더 급한 이가 있다는 대답을 돌려받는다 

아내는 큰그림을 그리는 사람 
소파와 리모컨과 홈쇼핑 채널이 
오후의 골목에 미치는 영향을 설파하며
끼니도 못 되는 책만 들이는 나를 방으로 돌려보낸다

구천 원을 주고 산 174그램의 시집들이 
빈 밥그릇처럼 가지런히 꽂힌 위에 또 엎어져 있는, 책장
먹지도 못하는 걸 자꾸 사온다는 아내의 핀잔을 
참 많이도 견뎠구나 위로 하다가
불현듯 오후를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 생각이 간다 
 
파지가 키로에 백 원이면 시집 한 권은 17원
삼백 명의 시인이 
오후 난민의 밥 한 그릇 해결하기 벅차다는 사실에
시 쓰는 일 참 부질없다 싶어서
내 시집 몇 권을 섞어 삼백 권 쯤 노끈으로 묶는다
시 쓰는 일도 밥이 된다는 듯이  

다시 아내가 다시 전화를 건다
질세라, 어느 시인에게는 또 미안한 일이지만
서명된 페이지는 오려서 비닐 파일에 넣고
그 위에 내 책을 또 몇 권 보태보는 오후가 저물어 간다


권상진.jpg 권상진 시인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복숭아문학상 대상, 경주문학상 수상.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눈물 이후》 한국작가회의 회원, 문학동인 Volume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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