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정부의 ILO 기본협약 비준 발표에 대한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입장
ILO 기본협약 비준, 다시 시작이다
노동 3권을 보장하는 헌법 33조가 무색하게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보인 날이다. 오늘(5월 22일) 고용노동부는 한국이 비준하지 않은 4개의 ILO(국제노동기구) 기본협약 가운데 3개 협약을 비준하겠다고 밝혔다. 1998년 6월, ILO 제86차 총회에서 ‘노동에서 기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선언’으로 기본협약을 채택한 지 21년 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도 비준 의지를 밝혔고 국내외적으로 약속했지만 그동안 뒷짐만 지고 있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비준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개운하지 않은 점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정부는 결사의 자유(87호·98호)와 강제노동 금지(29호·105호)에 관한 4개 기본협약 중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 금지 29호에 대해서만 비준에 관련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비준을 위해서는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정기국회에 비준 동의안을 제출하겠다는 것이다. 강제노동 금지 105호 협약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형벌체계, 분단국가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일단 제외’했다고 밝혔다.
‘의심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진정성에 의심이 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선입법 후비준’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정부가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EU 자유무역협정(FTA)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유럽연합으로부터 ILO 협약비준 이행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아왔고 FTA 사상 최초로 분쟁 해결 절차에 들어간 상황이다. 신뢰도가 바닥을 드러낼 지경에 이르자 정부는 일단 비준 절차를 밟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법 개정과 관련해 지난 4월 15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 공익위원 안을 포함해 검토하겠다는 것을 보면 제도 개선 의지가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약속을 지켜 비준하면 될 사항을 사회적 대화라는 명목 하에 경사노위로 떠넘겨 차일피일 미루어온 것도 모자라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과 파업 시 직장 점거 규제 권고를 허용하는 공익위원 안을 검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의심을 더 살 뿐이다.
ILO 기본협약 비준은 아무런 조건 없이 실행되어야 한다. 현재 여야가 반목하고 있는 국회 상황을 볼 때 국회 동의를 얻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9월 정기국회가 어떻게 될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비준 발표만 하고 입법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끈다면 노동계뿐만 아니라 국민들은 또다시 분노할 것이다. 최소한의 노동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했던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특수고용·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 든다면 문재인 정부에 대한 그나마 남아있는 신뢰조차 깨질 수밖에 없다. 오늘 발표에서 ‘일단’ 제외한 강제노동 금지 105호 협약도 조속히 비준해야 할 것이다.
다시 시작이다. 정부는 조속히 비준동의안을 마련해 하루라도 빨리 실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국회는 비준동의안을 받는 즉시 입법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특수고용이라는 이유로, 해고자라는 이유로,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모든 노동자들에게 오늘은 작은 희망이라도 엿볼 수 있는 하루였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노조법 개정을 위한 투쟁에 함께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모든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목소리 내고 힘 모아도 불이익 받지 않는 노동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2019년 5월 22일
한국비정규노동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