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행복하자_김병철 청년유니온 위원장

by 센터 posted Apr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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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시대, 비슷한 환경을 살아가는 타인의 역사를 궁금해 한다. 뛰어난 개인, 혹은 ‘잘 나가는’ 개인을 보며, “운이 좋았다” 라거나, “때를 잘 만났다” 혹은 “죽을 만큼 노력해서”라는 이유를 붙이기 위해. 한쪽에는 사회와 구조를 무시한 이기적인 개인의 우월주의와, 다른 한쪽에는 삶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삭막한 구조결정론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 즈음에서 ‘이해’하며 살아간다. 최근 이 바닥의 화제였던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중심에 있던 이를 만났다. 이것은 그 ‘이해’에 관한 이야기다.

인터뷰·정리 : 고명우 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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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학교생활


태어난 곳은 외가댁이 있는 부천이지만, 자라난 고향은 대전이에요. 아버지는 전라도 영광 분인데 열아홉 살에 학교를 졸업하고, 80년대 초반 서울 구로로 올라와 어느 공장에 취업했대요. 그러곤 어쩌다 보니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됐답니다. 어머니는 반대로 대학을 나와 목적의식적으로 노동운동을 한 경우입니다. 당시 소위 ‘위장취업’이라고 하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공장에 취업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는데 어머니 역시 그런 분들 중 한 분이셨죠. 어머니는 대전에서 취업을 했는데, 아버지가 구로에서 일하다가 대전에 있는 공장으로 옮겨가면서 두 분이 만나 그대로 대전에서 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특별할 것 없이 살았어요. 제 성격이 아주 내성적이다 보니(웃음) 학교를 조용조용하게 다녔습니다. 취미는 축구와 야구, 컴퓨터 게임. 그 또래 아이들처럼 정말 평범했죠.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택견을 시켜서 8년간 3단까지 배웠고, 나름 대전 안에 있는 대회에서 수상한 적도 있어요. 택견으로 쭉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했는데 8년을 하다 보니 질리더라고요. 남들과 겨루는 게 성격에 잘 안 맞기도 했고요.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학교에 다니는 게 쉽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중·고등학교 문화가 위계적이고 타이트하고 의자에 앉아있어야 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중3이 되면서부터 고민이 됐어요. ‘아 내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 되나, 이렇게 고3까지 버티는 게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누적되어 온 불만이 쌓여 고등학교에 가기가 너무 싫더라고요. 두발 규제, 교복 규정, 학교 안에 몸이 묶여있어야 하는 점. 물론 하고 싶은 걸 다하고 살 순 없겠지만 수업 시간을 의미 없이 견디는 게 너무 시간 낭비 같았어요. 이런 시간들이 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근본적인 생각을 했어요. 


정리해고의 칼바람 속에서


부모님도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실업계고등학교를 나와서 한국 사회에서 고졸로 사는 것이 굉장한 어려움과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아시니까 아들이 적당히 공부해서 대학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 역시 아들이 명확하게 목표를 가지고 다른 걸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제가 마냥 시간을 허송세월하며 보내는 것을 걱정하셨죠. 


더욱이 중학생 시기에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97년에 정리해고 당하면서 자영업하면서 새벽에는 신문 배달까지 하셨죠. 그런데 준비 없이 시도한 자영업은 망한다는 걸 몸소 체험하면서 집 형편이 특히 안 좋았던 시기에요. 그나마 다행으로 지인들 소개로 아버지는 철도청 수리정비사 계약직으로 입사를 하게 됐고, 어머니는 대전여민회라는 단체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시민단체 상근은 돈벌이가 안 되잖아요. 지금이야 최저임금은 지급해야 된다는 의식이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분위기도 아니어서 정말 적은 돈을 받으면서 일하셨죠. 그래서 어머니도 여민회에 상근하면서 신문배달도 하셨어요. 


학교 끝나면 동생과 저는 여민회로 갔어요. 어머니는 아이 둘만 집에 두는 게 불안하셨나 봐요. 거기서 소위 ‘이모’들이 우리를 돌봐주기도 했고 그분들 사이에서 자랐죠. 어머니가 바쁘면 다른 이모들이 학교 운동회나 학예회에 대신 오기도 했고요. 생각해보니 공동육아였네요? 하하하. 어릴 때부터 어머니나 이모들 하는 일들을 보아왔고, 3월 8일 여성대회도 따라다녔어요. 조기교육 받은 셈이네요. 그래서 사회 활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고, 어른들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도 재밌었어요.


인도 NGO 단체에서의 경험


아무튼 고등학교가 제 길이 아닌 것 같다고, 기술을 배우든가 다른 길을 찾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기술 배워서 먹고 사는 설움, 1년 계약직을 갱신하면서 매년 11월마다 불안함에 시달려야 하는 설움을 경험하다보니 노동운동을 한 분인데도 절대 기술 배울 생각하지마라는 신념이 확고했어요. 그러면서 아버지 지인이 인도 방갈로에서 NGO단체를 운영하는데 1년간 지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죠.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정했어요. 지긋지긋한 이 생활을 탈출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인도 방갈로에 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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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방갈로에서 만난 아이들과 함께. 


인도 방갈로에서는 그 마을이 성장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센터 설립을 위한 건물 짓는 일을 했어요. 아이들 모아 교육도 진행하고. 저는 택견을 가르치기도 하고, 영어를 잘하는 대학생은 영어 수업을 하고 저는 보조를 하고, 같이 놀기도 하고 했죠. 마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다양하게 돕고. 20~30대 자원 활동가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어요. 1년간 같이 생활하면서 많이 배웠죠. 한국과는 완전 다른 문화를 가진 곳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신선했고요. ‘세상은 되게 넓구나. 조그만 한국에서 쓸데없이 깊은 고민 안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욕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 인도도 빈부 격차가 심하고 카스트 제도도 존재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저 마지노선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마주하게 되니까 어린나이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같은 인간인데 왜 소수의 누구는 정말 편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고 대다수의 사람은 인간 대접도 못 받는 거지? 이건 세상이 잘못된 거 아닌가?’


많은 아이들이 어린나이에 다양한 이유로 죽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집도 없이 살아요. 특히 여성들은 13~14세에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결혼해서 살아가는데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많이 울어요. 이 삶이 너무 힘들다고. 폭력도 많이 겪고. 이런 일들을 보면서 불평등한 사회를 어떻게든 바꿔야 될 것 같은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한 시기이기도 했죠. 한국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문제들을, 당사자 입장에서 노동운동의 일원으로 목소리 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에는 인도에서의 경험이 많은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청년유니온을 만나다


그렇게 1년을 지내고 2009년 11월 한국에 돌아와서는 4~5개월 정도 검정고시 준비를 해서 시험을 봤죠.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나니 할 게 없는 거예요. 뭘 해야 하지? 일단은 대전 집에서 독립해서 살고 싶더라고요. 대부분의 지방도시가 그렇겠지만 대전이라는 공간이 인프라가 부족하다 보니까 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려면 서울이 더 낫겠다 싶었죠. 그런데 부모님이 전셋집을 마련해줄 수 있는 사정은 안 돼서 남산 밑에 있는 셰어하우스에서 살기 시작했어요. 


두 살 터울 나는 동생이 대안학교를 다녔어요. 저도 대안학교를 다녀보고 싶어서 마포 월드컵경기장 근처에 새로 생긴 대안학교에 지원을 했죠. 그런데 거기에 전 청년유니온 위원장이었던 김민수 위원장이 선생님으로 있었던 거예요. 그분이 당시 스무 살로 저보다 두 살 많았는데, 청년유니온 창립멤버였어요. 청년유니온 창립한 지 두 달된 시점에 그분의 꼬드김으로 청년유니온을 만나게 됐죠.


대안학교보다 훨씬 더 재밌었어요. 정작 대안학교는 두 달 다니다 그만뒀죠. 학비도 만만치 않고, 그 정도 학비를 내면서까지 다녀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거든요. 청년유니온 활동 초기라 처음 오는 조합원, 사람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분위기였어요. 게다가 열여덟 살짜리 애가 오니까 다들 저를 많이 챙겨주셨죠. 저도 서울에 혼자 올라와서 생활하는 게 힘들고 외로웠기 때문에 나를 챙겨주는 집단에 대한 안정감이 굉장히 컸죠. 서울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라는 느낌이었어요. 하하. 왜 하필 청년유니온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일상의 문제, 일터의 문제를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가장 따듯하게 맞아 주는 곳이었달까요. 우리가 그냥 ‘노조’라고 했을 때, 일반사람들한테는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지잖아요. 특히나 학생운동을 겪어보지 못한 청년일수록 그런 게 거부감이 더 크잖아요. 그런데 청년유니온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어요. 평범한 청년 구직자도 이 운동의 일원으로 함께할 수 있구나, 내가 조합원이 돼서 기여할 수 있고 기회가 되면 같이 참여해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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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과천종합청사 앞에서 청년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30분 배달제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청년유니온)


특히 2010년도 말, 피자 배달 30분 배달제 폐지를 요구하는 활동에 함께하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2010년 12월 연말 한 배달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이 신문에 실렸어요. 알고 보니 그 청년이 사망한 날이 마지막으로 알바를 하는 날이었는데안타까운 변을 당한 것이었죠. 알바를 한 이유가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였는데 위험천만하게 운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도미노피자가 30분 배달제라는 악성 제도를 운영 중이었기 때문이었어요. ‘30분 배달제’라는 것이 주문한 지 30분이 넘으면 반값, 40분 넘으면 무료로 제공해준다는 건데, 이걸 배달 알바 시급에서 빼고 있었던 거예요. 그전까지 배달 알바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라는 것이 ‘위험하게 일하는 날라리들’이었는데, 청년유니온은 이 배달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주목했어요. 본사에 문제제기를 하고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피자업체 3사가 30분 배달제를 폐지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게 만들었죠. 이걸 보면서 ‘이게 진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청년유니온의 역할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욱더 청년유니온에서 활동하고 싶어졌죠.


청년유니온 위원장이 되기까지


20대가 되면서 진로에 대한 불안감과 막막한 점은 있었는데 제 성격이 ‘지금 행복하자’라는 주의여서 큰 걱정은 안 했어요. 그런데 대학은 그래도 가야겠다 싶더라고요. 수능을 통과할 수 있는 실력은 안 되고, 다른 방법으로 수시 전형을 찾다가 성공회대에 NGO전형이 있기에 넣어보려고 했죠. 주변 선배들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소위 운동판도 학벌이 좋아야 잘 풀린다는 걸 아니까, 얘가 졸업장은 있어야 나중에 먹고 살더라도 지장이 없을 텐데 하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성공회대에 가겠다고 하니 도움을 많이 줬죠. 그렇게 어찌어찌 지원을 했는데 생각보다 경쟁률이 엄청 세서 결과적으로 떨어졌어요. 그러고 나니, 일단 일하면서 청년유니온 활동을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카페 알바, 텔레마케터, 사무직 알바, 노점상 등 별의별 일을 다하면서 살았죠. 


그러다 2013년 청년유니온 2기 2년 차에 조직팀장으로 1년간 활동하고, 3기로 바뀌면서 군대를 갔죠. 군 생활은 별 문제 없이 했어요. 그런데 전역을 앞두고 있는데 면회 한 번 안 오던 3기 선배들이 면회를 왔어요. 4기 집행부 구성을 앞두고 저를 꼬드기러 온 거죠. 하하하. 제대 후 4기 집행부 조직팀장과 노동상담팀장을 맡아서 활동했어요. 특히 노동상담팀장을 하면서 많이 배웠죠. 노동관계법 배우면서 교육 나가고. 법 시스템을 알게 되니 그전에 안 보이던 일터 내 모순들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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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일 혜화역 앞에서 고 이한빛 피디를 추모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청년유니온 회원들(@여성신문)


2017년에는 CJ E&M에서 신입 조연출 피디로 일하면서 수많은 부조리와 문제들을 겪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한빛 피디 사건이 있었죠. CJ E&M이라는 거대 기업을 상대로 우리가 문제에 대응한 지 두세 달 만에 공개적인 사과를 받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입장을 발표하게 만들었어요. 워낙 슬픈 사건이긴 하지만, 상암동 CJ E&M 본사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집회하며 목소리를 외치고 함께 울고 하는 과정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거대 기업을 상대로 빠르게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고 그로 인해 한빛센터가 만들어지고, 방송 현장 스태프들이 같이 공감하기 시작했고, 이런 현장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운동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뿌듯했죠.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덧 4기가 끝나고 5기로 넘어가게 되는데 2017년 연말에 모여 누가 5기를 책임질 것인가에 대해서 2박 3일간 끝장토론을 했어요. 토론 결과 청년유니온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과정을 지켜봐오기도 했고, 20대로 젊기도 한 제가 해보는 게 어떻겠냐 하는 것이 합의가 돼서 이 자리에 있게 됐죠. 근데 저도고민이 많이 됐죠. 이 자리가 쉽지 않은 자리인데, 어린나이에 무거운 자리를 잘 맡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저나 선배들이나 많이 있었던 거죠. 결과적으로는 동료들이 같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이렇게 위원장이 됐는데, 정말 힘들더군요. 하하.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 


특히 최근에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있었잖아요? 근 10년 활동하면서 올해 처음으로 대전 집에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상황이 너무 어려우니까 참 답답하더라고요. 이러저러한 배경들과 논쟁거리, 수많은 이야기들이 다 저에게 집중되는데 너무 많이, 빠르게 지나갔어요. 일차적으로 이 선택을 같이 책임져야 할 상임위원들, 집행위원들한테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그거 자체가 물리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조합원들과도 소통하고 토론해야 하는데 같이 책임질 수 있는 인력은한정적이고, 외부 시각은 청년유니온과 두 단위(전국여성노조,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참여할 거냐 말 거냐의 프레임으로고정되어 버리니까 정신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였어요. 


특히나 제도적 협상 테이블을 거부한 것이 청년유니온 역사에서는 최초였어요. 청년유니온이 사회적 노동조합으로서 제도권 내에서 협상도 하고, 기업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으면 이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창구에 하나라도 더 개입하려 하고 권한을 활용하려 하는 것이 모토였어요. 그래서 정부가 새롭게 바뀌면서 만들어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본위원으로서 역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경사노위의 불합리한 운영 방식과 탄력근로제 문제 등으로 2, 3차 본위원회 회의를 앞두고 참석이냐, 불참이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청년유니온이 고립되거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게 제일 힘들더라고요.


활동하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면, 기성단체들과 같이 행사를 할 때 “청년유니온에는 청년이 많으니 많이 데리고 오면 되겠네?” 이런 말씀들을 하세요. 거절하면 “청년유니온은 자기들끼리만 하네.” 이런 시각도 있고요. 청년을 동원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입니다. 사업을 할 때 같은 운동의 주체로서 어떻게 잘해볼지, 토론과 고민을 통해 청년유니온의 역할이 보이는 것인데 그런 것 없이 동원의 대상으로만 보면 청년유니온 입장에서도 같이하기 어렵죠. 왜 청년들이 기성운동에 참여하지 않는지 이제는 좀 섬세한 고민과 진지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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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총회에서 당선된 김병철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청년유니온) 


활동가의 삶 이어가고 싶어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계속 활동해갈 수 있는 원동력은 아무래도 활동가라는 게 일한 만큼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구조이니 만큼, 같이 일하는 동료로부터 나오는 거 같아요. 그래서 동료로부터 받는 에너지들, 그리고 선배들로부터 받는 에너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선배들의 에너지에 감동을 많이 받아요. 이로부터 느끼는 안정감이랄까, 이렇게 좋은 토양을 가진 청년유니온에서 우리가 더 해나갈 수 있는 게 많겠구나 하고요. 


미래의 나에 대해서는 여전히 별 생각 안 하고 살고 있지만, 최근에 집행부를 새롭게 꾸려 새 멤버들이 와서 활기도 생겼어요. 그래서 지금 있는 동료들과 5기 잘 마무리하고 즐겁게 활동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입니다. 내년에 청년유니온 창립 10주년인데 앞으로는 무엇을 해나갈 것인지 토론과 새로운 시도들을 잘 모색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 부조리한 문제들, 노동과 불평등 격차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활동가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임기가 끝나고 난 뒤에는 현장에서 청년들의 삶을 외치고 더 나은 노동운동을 위해 현장에서 발로 뛰는 활동가로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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