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함께하는 노동 운동_홍춘기 대전시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 센터장

by 센터 posted Feb 2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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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홍춘기 센터장을 마주하고 있으면 자분자분한 말투와 그 속에 어린 진정성이 느껴진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았고,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는데 삶의 여정을 보면 꼭 그런 거 같지도 않다. 현장으로 가기 위해 참사랑일꾼회에 들어갔고, 지금껏 그때 만난 동지들과의 인연도 이어지고 있다.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현장과의 끈을 놓지 않았고, 그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몸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일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다. 그래도 누가 와서 “같이 해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면 거절을 못한다.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갈등해결사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 듯하다. 그이의 속 깊은 마음을 글로 고스란히 표현하지 못했다.

인터뷰·정리 : 강인수 센터 상임활동가

 

도입사진2.JPG

 

조용한 아이의 의문

 

말수가 적고 조용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국민학교 5학년 때 처음 웅변대회를 나갔는데 상을 받았어요. 다섯 살 터울인 오빠 영향이 컸죠. 선생님이 “너, 홍인기 동생이지? 반공 웅변대회 나가!” 하는데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오빠가 모범생이었거든요. 홍인기 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웅변을 시작했는데 중학교 때까지 계속 하게 되었죠. 처음에 얼마나 떨렸는지몰라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니까요.적극적인 성격은 전혀 아니었는데 하라고하면 “안 해요.” 소리를 못했어요. 자기 주장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하라고 하면거부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편이었던 거죠.

 

몸이 약해서 자주 아팠어요. 국민학교저학년 때였는데 그날도 너무 아파서 조퇴하고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산길을걸어갔어요.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는 산길을 어린애 혼자 가다가 쓰러져버린 거예요. 동네 친구들은 학교 끝나고 다 집에 왔는데 나만 안 오니까 언니 오빠가 찾으러다니고 난리가 났죠. 그런데 가족들은 내가 산길로 왔을 거란 생각을 전혀 못한 거예요. 혼자 깨어나서 해질 무렵에야 집에 도착한 거 같아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몸이 아픈데도 시험 보는 날이어서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간 적이 있어요. 학교 정문까지는 갔는데 저혈압 증상이 심해서 구토까지 하고 도저히 어떻게 안 되겠더라고요. 결국 택시 타고 집으로 되돌아갔죠.

 

중학교 때까지 충남 아산 도고에 살았는데 고등학교 가면서 대전으로 갔어요. 면 단위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거든요. 대학생인 언니, 오빠 영향으로 친구들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은 관심에 없고 정태춘, 박은옥, 양희은 노래를 좋아했어요.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도 그때 읽었고요. 그때 엄청 충격 받았죠. 지금까지 읽어왔던 시랑은 너무 달랐으니까요. 원색적이고 한풀이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이게 무슨 시야.’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니던 성당에서 5.18광주민중항쟁 비디오를 우연히 본 적이 있어요. 광주 사람들은 빨갱이라고만 들었는데 그건 거짓말이고,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걸 알게 됐지요.

 

87년 6월항쟁 때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버스 타고 가다가 대학생들이 가두시위 벌이고 있으면 “저기 떴다. 내려~” 하면서 친구들이랑 데모 구경도 하곤했죠. 대학생들 쫓아다니다 전투경찰 뜨면 도망도 가고. 87년 대통령선거 보면서 궁금했어요. 관훈클럽 대통령 후보자토론회를 보는데 후보들에게 주한미군에대한 입장이 뭔지 꼭 물어보더라고요. 후보자들이 애매모호하게 답변하는 걸 보면서 우리가 미국한테 아부해야 하는 상황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미국과의 관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 같아요.

 

큰언니가 하라는 대로. 그러나···

 

대학 입학도 아홉 살 위인 큰언니가 시키는 대로 했죠. 고등학교 때 문과 이과 나눌 때 언니가 “너는 이과 가야 돼.” 해서이과 갔고, 대학도 전자계산학과가 사회적으로 뜨니까 “무조건 전자계산과 가야돼.” 해서 어떤 공부를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언니가 가라고 하니까 가야되나보다해서 갔어요. 동아리도 언니가 종교 활동을 열심히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카톨릭학생회 들어가라고 해서 가입을 했죠. 그때는 카톨릭학생회가 운동 성향이 강했는데언니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곳에서 운동권 선배들을 만났고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 거죠.

 

입학하고 얼마 안 돼서 충남 예산에 있는 충남방적 야간고등학교 학생들 성폭력, 성희롱 사건 내용이 적힌 대자보를 보게 됐어요. 그곳은 나랑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도 여럿 일하러 간 곳이었죠. 옆집 친구도 갔으니까요. 충격이 컸어요. 고향 친구 누군가에게 일어났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분노가 치밀었죠. 한 친구가 한번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 학교 가는데 일이 많으면 학교도 못 가게하고 일 시킨다.”며 일반학교에 다니는 내가 부럽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내 친구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하는 마음으로 집회에 참석했던 거 같아요.

 

집회 참석하다 보니 선배들이 읽어보라며 책을 자꾸 권하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이 책이야!’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그러다 내 맘에 맞는 책을 보게 됐는데 《민족이여 통일이여Ⅱ》라는 책이에요. 그 책을 보니 고등학생 때 가졌던 미국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더라고요. 아~ 우리나라는 미국의 식민지였구나, 해방 이후 미국이 개입해서 우리가 억눌려 살아왔구나, 하는 걸요. 그 책을 빌려준 선배한테 책을 돌려주면서 추천하고 싶은 책 목록을 주면 구입해서 보겠다고 했죠. 그러면서 한국 사회 모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고, 학생 운동의 길에 빠져들었어요.

 

1학년 때는 학생 운동하다가 졸업하면 모두 공장에 가는 건줄 알았어요. 나도 졸업하면 당연히 공장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카톨릭학생회 활동을 2학년까지 하고 3학년 때는 단대 학생회 들어갈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카톨릭학생회 회장에 당선돼버렸어요. 나 뽑지 말라고 그렇게 거절했는데도···. 카톨릭학생회 내에 운동권 학생 열 명을 제명시키는 일이 생겨 갈등이 심했던 때였어요. 제명당한 선배들이 총회를 소집해 무효화시켰지만, 제명파와 아닌 파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죠. 그래서 동기, 후배들이 갈등 해소를 위해 나를 회장으로 밀었던 거예요. 내가 회장되고 아침, 오후 기도시간 꼭 지키고, 성경공부를 하게 하면서도 운동권 교육도 했죠. 부활절엔 계란 팔아서 재정도 남기는 등 정체성에 맞는 사업들도 하다 보니 미사 볼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선배들한테 신뢰를 받게 됐어요. 4학년 때부터는 총학생회와 대전대협(대전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서 노학연대 사업을 했죠.

 

신발공장 단순조립공

 

그리고 대전대협 활동하면서 알게 된 노동 운동 단체인 ‘참사랑일꾼회(이하 일꾼회)’에 가입했어요. 일꾼회는 현장 활동을 지원하는 청년 단체였어요. 스물다섯 살이 되면서 드디어 공장 취업을 하려고 알아봤죠. 대전 3, 4공단이 막 조성되고 있을 때여서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나이가 많다고 안 뽑아주는 거예요. 그때는 스물다섯 살 정도면 결혼을 많이 해서 그런 거 같았어요.

 

계속 헤매고 다니다가 영세사업장이 많은 대화동 1, 2공단으로 어쩔 수 없이 노선을 바꿨어요. 써니상사라는 신발공장 조립반에 입사했어요. 여성 노동자들이 많은 사업장인데 사향산업인 줄도 모르고 좋아라 하고 들어갔죠. 87년 노동자대투쟁 때 노동조합이 만들어져서 그 당시 조합원이 150명 정도 됐어요. 공장 언니들한테 물어보니 노동조합 만들 때 난리도 아니었데요. “옆 공장에서 파업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노동조합도 없는데 따라서 파업했어.” 그러더라고요. 검사반 지원으로 일할 때 하루는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시간당 150~200켤레가 나와야 정상인데 그날은 400켤레가 밀려오는 거예요. 불량 못 빼고 포장반 넘기면 포장반 반장이 신발 들고 와서 막 집어던지거든요. 신발은 계속 밀려와 쌓이고 그걸 빼내고 있는데 갑자기 서럽더라고요. ‘노동의 새벽’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단순조립공’ 노래가 마구마구 공감이 되면서 눈물이 났어요.

 

그곳에서 3년 정도 일했어요. 현장 활동하려고 공장에 들어갔는데 뭐라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 열 명이 모인 술자리에서 “우리 동아리 만들자.”고 했죠. “뭐할래?”했더니 자전거 타자고 해서 ‘청심회’라는 자전거동아리를 시작했어요. 1년 6개월 정도 유지했는데 한 달에 한 번 하이킹 다니고 노동자대회 있으면 서울도 다니면서 많이 친해졌죠. 지금도 모임을 하며 만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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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국타이어 집단 사망사건 후 2010년 내부고발자로 해고된 정승기 씨 부당해고 철회 단식농성장

 

참사랑일꾼회 활동, 투쟁 현장에서

 

공장 일하면서 일꾼회 회원으로도 계속 활동했는데 현장 교육사업이 잘 안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1995년 12월 31일에 공장 그만두고 일꾼회 현장 교육사업 담당 상근을 시작했죠. 상근 활동 시작하자마자 한국타이어 노동조합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노민추)와 결합해 대의원 선거를 지원했어요. 당시 한국타이어 구사대 폭력이 심각했어요. 미행도 붙고 해서 노민추 사무실 갔다 오면 위험하니까 동지들이 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하곤 했죠. 해고자도 발생하면서 한여름 단식투쟁이 이어지고, 결국 일부 합의로 마무리되었죠. 그러면서도 일꾼회 현장일꾼교실 교육 사업도 기획하고, 지원 요청이 들어오는 사업장 연대도 이어졌죠. ‘엑스피아월드’라는 곳도 힘들게 투쟁해왔던 노동조합이어서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며 연대를 다녔어요. 그런데 ‘만나’라는 레스토랑 사업장 노조 위원장도 구속이 된 거예요. 사측이 노동조합 탈퇴 공작을 해도 안 되니까 위원장한테 시비를 붙인 거죠. 한 놈이 막무가내로 때려달라고 덤볐는데 위원장이 참지 못하고 한 대 툭 쳤는데 갈비뼈가 부러졌다며 전치 6주 진단서를 끊어 왔어요. 그때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정말 투쟁 현장 하나하나 어렵지 않은 곳이 없었어요.

 

그래도 그 해에 현장 투쟁하면서 재미난 일도 많았어요. ‘만나’에 결합해서 투쟁할 때에요. 조합원이 스물네 명 정도 되는, 꽤 비싼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사측에서 노노 갈등을 조장하는 거예요. 사측이 비조합원들을 사주해서 조합원들한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욕하면서 괴롭히니까 조합원들이 위축돼서 노동조합 탈퇴를 고민해요. 그렇다고 우리도 같이 욕하고 싸울 수는 없어서 작전을 세웠어요. 우리만 알 수 있게 수화로 욕을 하자고. 우리는 신나게 욕하는데 쟤네는 못 알아듣잖아요. 그러니까 재밌는 거예요. 한번은 조합원들이 고소 고발을 당했어요. 경찰서에서 조서 쓰고 사인을 해야 하는데 50대 여성들이 경찰서 철창만 봐도 무서우니까 완전 주눅이 들어버렸죠. 잘못 말하면 어떡하나 하고요. 그래서 우리가 또 작전을 세운 게 한글을 모른다고 해라. 그러곤 부위원장, 사무국장이 쫓아가서 “50대 엄마들은 글을 모릅니다.” 하면서 “이거 어머님이 대답한 거하고 다르죠?”하면서 조서를 고치고 한 거죠. 그런 경험이 쌓여서인지, 집회를 하는데 경찰들이 레스토랑을 삥 둘러서 아무도 못 들어가게 원천봉쇄를 한 거예요. 나는 어머님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 줄 알았는데 더 소리치고 북치면서 노래를 하는 거예요. 그때 ‘우리 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 단련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0월경쯤 현장 투쟁이 거의 정리되자 온 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죠. 조합원들은 저만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조합원들이 “어떻게 할까요?”하면 “낸들 알아요. 어떻게 되겠죠. 나도 몰라 미치겠슈.” 하고 말할 순 없잖아요.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돌파해보자 이런 제안을 하긴 하는데 내 속은 내 속이 아닌 거예요. 조합원들은 그래도 저 사람이 우리보다 나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나한테서 자꾸 답을 찾는데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뭘 알겠어요. 우리가 생각한 대로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저 조합원들의 단결을 해치지 않는 기본 원칙을 지키면서 가자는 원론적인 얘기밖에 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러면서도 젤 힘들었던 건 소리 지르고 욕하는 거였어요. 저혈압이 심해서 화를 내면 몸이 굉장히 다운되거든요. 그런데 현장 관리자나 구사대 만나면 욕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조합원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데 시비를 걸어오면 아이씨~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욕하고 싸우게 되는 거죠. 누가 쳐다보든 말든···. 너무 힘들어서 투쟁 끝나고 미용실에 갔더니 스트레스 때문에 원형탈모까지 왔더라고요. 1996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한해였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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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내포수련관에서 진행된 현장일꾼교실 마지막 수련회를 마치고.

 

빚까지 떠안으며

 

1997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일꾼회 회장이었던 선배가 지역 갈등을 중재하다가 도저히 못하겠다며 그만두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가 회장을 맡게 됐어요. 일꾼회 회원들과는 가족 같이 지냈어요. 회원 30여 명이 우리를 먹여 살린 거나 진배없죠. 공돈이 생기거나 보너스를 받으면 십일조를 냈어요. 그래도 사업할 돈이 항상 부족해서 상근자들은 새벽에 아르바이트 해서 돈 벌고, 같이 밥해 먹고 공부하며 지냈죠. 한번은 8.15 범민족대회 참가했다가 열두 명이 연행된 일이 있어요. 학생 운동 전력이 드러난 한 명이 구속돼서 변호사 비용을 마련해야 하는데 일주일 만에 필요한 금액보다 더 많이 걷힌 거예요. 돈도 없는 사람들이 의리만 있어서···. 서로에 대한 애정이 높았던 조직이었던 거죠.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산하 대전충남연합(이하 연합) 사무처장을 겸하면서부터 일꾼회 내부 일을 적극적으로 하진 못했어요. 연합 운영도 단체들 회비로는 감당이 안 돼서 개인 빚까지 지게 됐어요. 2000년 초반에는 900만 원 정도까지 빚이 쌓였죠. 게다가 활동하면서 자동차 사고까지 나서 3백 만 원이 들었는데 그것도 개인 빚으로 떠안았어요. 그 당시로선 큰돈이었는데 겁이 없었나 봐요. 당장 5백 만 원을 갚아야 할 시점이 됐는데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결혼을 하면 빚을 갚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때 눈에 들어온 남자가 우리 남편이었죠. 당시 남편은 건설노조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학교 다닐 때부터 봐온 사람이에요. 이 남자라면 쉽게 마음이 변하진 않겠다는 신뢰가 있었죠. 지금도 내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줘요. 내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할 때 “안 돼!”하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거의 절대적으로 내 말이, 행동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결혼식 하니 정말 돈이 생겼어요. 정산해보니 900만 원이 남아 빚을 청산할 수 있었죠.

 

새로운 세상 속으로

 

큰아이 세 살 때 건설노조 기획수사로 남편이 구속된 적이 있어요. 우리 집에 돈 버는 사람은 남편밖에 없는데 먹고 살 일이 암담한 거예요. 노동조합도 타격이 크다 보니 구속자 기금을 줄 형편이 안 됐거든요. 그때 화물연대 대전지부에서 상근자를 구하더라고요. 그래서 사무차장으로 들어가 2년 정도 일했어요. 

 

둘째아이 돌 지나 2006년에는 구의원 선거에도 나갔죠.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는데 구의원 후보로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당연히 안 하겠다고 했죠. 정치 활동에 대한 거부감도 많았고, 그 일에 대한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한참 실랑이하다가 일꾼회 회원들이랑 의논을 했는데 결국 도전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죠. 우리는 단순해서 이 일을 왜 해야 되는지에 대한 설명만 명확하면, 그리고 그이유가 타당하면 아무 생각 없이 해요. 선거 운동하는데 참 많이 어색했어요. 일꾼회 회원들이 선전물 만들어주고, 방송차운전도 해주고,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결합해서 도와줬죠. 결과는 9퍼센트 득표율로 낙선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회원들하고 새로운 경험을 한 셈이죠. 

 

그러고도 ‘유력 당선 후보’라는 꼬임에 빠져 2010년 지방선거에 또 나가게 됐어요. 그때는 10퍼센트 정도 득표한 거 같아요. 남편도 생업까지 접고 선거에 올인하면서 많이 도와줬죠. 당선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현실의 벽은 높더라고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지역 정치 활동에 대한 고민을 깊게 했어요. 대전이라는 도시 자체가 진보 정치가 자리 잡기 어려운 토대여서 이래저래 고민하다 마을사업에 뛰어들었죠. 이미 ‘또바기어린이도서관’이라는 마을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라움’이라는 마을카페도 만들었어요. 그때 마을기업을 지원하는 프로젝트가 많았어요. 계족산을 낀 동네여서 눈썰매장도 만들고, 마을 생산물 판매 공간 마련, 마을카페 등을 통해 수익을 창출해서 일자리도 만들고 다시 마을로 환원시켜 마을경제를 순환시킬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어요. 구청 담당 공무원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며 적극적으로 권유해서 프로젝트 신청을 했지요. 그런데 구청장이 내가 또바기어린이도서관 관장이란 걸 알고 탈락시켰어요. 민주노동당이라고 완전 찍힌 거죠. 지원만 조금 받았어도 마을기업으로 키울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쉬웠죠.

 

선거.jpg

2014년 대덕구청장 후보 출마 기자회견

 

 

비정규 노동 운동의 길을 찾아

 

2008년 즈음인가 민주노동당에서 서울 동부·안산·광주·부산비정규직지원센터 네 곳에 3천만 원씩 지원한 적이 있어요. 비정규 운동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우리도 비정규 사업을 하면 민주노동당에서 3천만 원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어요. 그래서 일꾼회 회원들이랑 비정규운동추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일꾼회가 해소되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당 지원이 더 이상 없는 거예요. 사무실이랑 운영비도 필요한데 어떡하지 싶었죠. 회원들이랑 의논한 끝에 우리가 백만 원씩 내자, 그럼 되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졌어요. 돈을 모아 공간을 알아보고 있는데 성당 신부님이 공간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한 자매님이 있었다며 소개를 시켜주셨어요. 출자금 형식으로 모은 돈으로 저렴하게 사무실 구하고, 반상근자 한 명 두고 대전비정규노동센터(이하 센터)를 시작하게 됐죠.

 

그 와중에 선거 나갔지, 도서관이며 카페 만들고, 마을사업하느라 너무 많은 외부 활동을 하느라 센터 사업에 집중을 못했어요. 상담, 교육사업에만 주력하면서 한국타이어 노민추 등 지역노조와 현장조직 연대활동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죠. 결국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상근자가 그만두고, 센터 사업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대전광역시 비정규직 근로자지원센터 설치 및 운영 조례’가 만들어지고 2015년에 민주노총이 위탁을 받아 대전시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를 설립하게 됐죠. 그때부터 센터장을 하고 있네요. 처음에는 민주노총과 약간의 갈등이 있긴 했어요. 소소한 의견 차이들이 있더라고요. 지금은 소통을 많이 하려고 해요. 우리가 하려는 사업이 어떤 건지 만나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 나누곤 하죠.

 

재밌게 일하는 편이에요. 내가 못해봤던 사업, 구상만 했던 사업들을 실현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실태조사를 하면 그 결과물이 다음 해에 생기거든요. 2015년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 실태조사를 하고 2016년에 토론회를 여러 번 열었어요. 그랬더니 2017년에 전환 발표를 했잖아요. 그러면서 대전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죠. 2016년에는 여성 노동자 실태조사를 했더니 2017년에 감정노동자보호조례를 만들게 됐어요. 그 조례에 감정노동자지원사업은 센터가 한다는 내용을 넣었어요. 토론회를 하고 감정 노동에 대한 관심수위를 높였죠. 그리고 2018년에 콜센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감정 노동자 실태조사를 또 했더니 시장이 올해 사업으로 감정 노동자 지원사업을 하겠다고 해서 우리가 맡게 됐어요.

 

다시 비상을 꿈꾸며

 

비정규 노동 운동은 취약계층 비정규 노동자를 위한 권리 보호, 증진에 일차적 목적이 있잖아요. 미조직 노동자네트워크(이하 노동넷)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려면 민주노총과 공감하고 소통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집담회도 하면서 노동넷이 마을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소통하고 있어요. 일부 간부들은 “괜찮네, 좋네~”라고 반응하지만, 일부는 “이게 뭐여~” 하기도 해요.

 

2017년부터 시작된 고민이었고, 작년에 노동환경 실태조사하면서 대덕구 마을넷을 준비했어요. 올해는 조직체계를 어떻게 잘 갖춰서 참여단위를 확장시킬지가 목표에요. 센터 사업은 아니지만 우리가 중심이 돼서 미조직 노동자들을 모아보자는 의미가 있고요. 3월 즈음에 본조직을 출범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른 구로도 확장해나갈 거고요. 미조직 노동자들은 임금·단체협상 교섭을 할 수가 없잖아요. 노동조합 만들기도 힘들고. 그렇다면 노동넷을 통해 임단협 효과를 실현해보자는 거죠. 지역 노동 인권을 증진시켜 최저임금 정도는 주고받아야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간다면, 적어도 노동 인권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보호, 개선으로 이어질 거고, 임금 인상 효과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미조직 노동자들이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도 지역사회 사회적 연대를 통해 건강검진도 받을 수 있게 하고, 로컬푸드 매장도 이용할 수 있는 ‘품’이라는이용권도 나누고, 힐링 여행권, 템플스테이 협약을 맺어 하루 휴가권도 주고···. 사회적 기업들과 연대하면서 지역사회에서그이들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힘에 의해 성장할 수 있다면 지역사회 노동 인권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죠.

 

지역에서 노동넷 모델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우호적인 구청장들과 협의해 나가고 있어요.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노동단체들이 마을과 함께 소통하며 활동했다면, 민주노총이 생기면서 노동이 현장투쟁에 집중하며 마을과 분리, 단절된 듯해요. 그러다 보니 미조직 노동자들은 방치되는 것 같고요. 다시 마을로 들어가는 노동, 마을에서의 노동, 마을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운동 방향을 고민해요. 올해는 이 활동이 성과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고, 몇 년 후에는 안정적인 틀이 만들어지도록 미조직 노동넷을 꾸리는 데 힘 쏟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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