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현실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도록

by 센터 posted Feb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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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인 직장갑질119 노무사



2.직장갑질.jpg

2018년 10월, 갑질금지법 국회 통과를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직장갑질119)


내 명함에는 ‘회사에 불만 많으시죠?’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첫인사를 나누는 순간은 어색하지만, 도발적인 문구에 재미와 흥미를 느끼며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곤 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자신이 회사에서 경험했거나 목격했던 일들도 직장갑질이라고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렇지만 직장갑질은 신조어나 다름없다. 법에 정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술적인 개념도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많은 것들을 포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라 불리는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이 통과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직장갑질을 당했다는 노동자들을 상담할 때면 종종 노동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다 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일을 주면서 연장근로와 휴일근로를 강요하고, 빨리빨리 일하지 못했다며 상사에게 면박을 당한다는 노동자에게 해줄 수 있는 법적 조언은 거의 없다. 그나마 연장근로수당과 휴일근로수당을 제대로 받고 있는지 물어봤지만, 어차피 다른 직원들도 수당을 못 받고 있어서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동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본인만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이 힘들었고, 아마도 지쳐서 퇴사할 때까지 괴롭힐 것 같다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물어왔다. 이럴 땐 할 말이 없다. 노동법은 강제근로나 폭행처럼 물리적인 행위들은 금지하고 있지만, 직장 내에서 누구나 겪을 법한 괴롭힘까지 보호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은 게 아니 듯 물리적인 폭행을 당한 것만큼이나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신체적 반응으로 이어져 잠을 못 자거나 숨쉬기 힘든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글로만 봐도 아픈 내용인데 이런 일들이 직장 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은 더 충격이다. 어느 날은 뾰족한 해법을 제시해주지 못한 나에게 “이러니 괴롭힘 당하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거겠죠.”라는 말을 툭 던진 노동자가 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직장 내 괴롭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2014년 대한항공 일가의 갑질을 시작으로 2018년 위디스크 양진호까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갑질들이 끊이질 않는다. 상식 밖의 무례함과 엽기적인 행동들은 그들이 가진 권력을 통해 더욱 막강해진다. 이게 바로 직장 내 괴롭힘의 핵심이다.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 괴롭힌다면 무시하거나 맞서 싸워도 큰 탈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터에서 나보다 권력을 가진 상사나 선배의 괴롭힘이라면 문제는 복잡하다. 적당히 무시할 수도 없고 들이받을 수도 없으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일터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직장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다. 즉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게 개인의 일탈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이 아니라 권력과 위계적 구조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제도적 보호가 필요한 것이다.


2018년 12월 27일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됐고 2019년 7월 16일부터 시행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한 개정안은 지난 9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 3개월이나 묶여 있었다. 정의가 모호하다며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직장 내 괴롭힘을 ‘직장 내 권력을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업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직장갑질이나 직장 내 괴롭힘은 교묘하고 은근한 것들이 많아서 현행법으로 규율하기가 어려웠다. 법의 특성상 수학 공식처럼 명확해야 죄가 성립하는데 노동자를 따돌리거나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가해 행위만으로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의 인과관계나 행위자의 가해 의도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주장처럼 괴롭힘의 정의는 모호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지만,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이를 정의하면서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실효성의 문제가 남는다. 직장 내 괴롭힘 행위가 발생하거나 목격한 노동자는 누구든지 사용자에게 신고할 수 있고, 사용자는 괴롭힘 사실 여부를 조사하며 행위자를 제재해야 한다. 동시에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조치를 해야 하고 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는 금지된다. 또한 직장 내 괴롭힘의 예방 및 발생 시 조치 등에 관한 사항을 취업규칙에 필수적으로 정해놔야 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주어가 사용자라는 점이다.


개정안에 의하면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는 사용자에게 피해 사실을 신고해야 한다. 그런데 사용자가 가해자인 경우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한 경우를 제외하면, 과태료나 처벌조항도 없다. 사용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사용자에게 신고했지만 조사하지 않는다거나, 행위자를 제재하지 않고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더라도 행정기관은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할 뿐 개입할 법적 근거는 없다. 각 사업장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건데, 자정작용이 원활할지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직장 내 괴롭힘을 보호할 수 있는 테두리가 전혀 없었던 것보다는 진전됐다. 그렇지만 근로기준법 개정안이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보호받지 못한다. 법은 큰 틀을 정하고, 세세한 내용은 취업규칙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지만, 취업규칙 역시 10인 이상 사업장에 작성 의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배제되는 범위가 너무 크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됐다는 소식을 접한 직장인들은 자신이 당한 갑질을 신고하고 싶다며 상담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법 시행 전까지 약 5개월 남았다.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괴롭힘 매뉴얼을 내겠다고 했지만, 발표가 늦어지고 있다. 시행 전부터 예상되는 한계가 명확한데, 남은 5개월의 시간이 법 개정 없이 보완할 수 있는 내용을 손볼 수 있는 시간으로 사용됐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근로기준법 시행령을 개정해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와 제76조의3(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조치)을 5인 미만 사업장에도 예외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직장 내 괴롭힘 정의에 포함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 풍부한 사례를 제시하고, 신고나 조치사항을 사용자가 아닌 독립적인 기구에서 담당하도록 하는 방법들도 필요하다. 이렇게 보호의 범위와 구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의 보완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의미는 있지만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괴롭힘 피해자 입장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여전히 무기력한 수준이다. 아마 법이 시행되면 신고 방법을 묻는 피해자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행정기관이 개입할 만한 법적 근거는 없지만, 처벌규정이 없더라도 법은 법이다. 사용자가 괴롭힘 가해자를 두둔하며 아무런 제재 조치를 하지 않을 때 일단 노동청에 신고해 보는 것도 좋다. 처벌 규정이 없으니 노동청은 시정명령을 하거나 권한이 없다며 노동자를 돌려보내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이런 사회적 경험들이 쌓였을 때 다음 단계를 고민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사업장과 노동자들이 참고할 만한 매뉴얼뿐만 아니라 노동청 근로감독관들이 직장 내 괴롭힘 감수성을 갖고 상담과 신고사건 처리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숙지할 수 있도록 교육과 업무편람이 주기적으로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이왕 통과된 법이 현실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고용노동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촉구하며, 시끌시끌한 공론의 장이 펼쳐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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