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말하기를 - 폭력이 현실을 잠식하는 방식

by 센터 posted Dec 2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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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1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잠들어 있다. 꿈속은 새벽이고, 뭇짐승의 습격을 받았는지 가까운 곳에서 암탉이 소스라치듯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느낀다. 화들짝 일어나 방문을 연다. 문 앞에 엄마가 쓰러져 있다. 한 동네에 살지만 집을 달리하여 아버지랑 둘이서만 사는 엄마가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그 캄캄하고 깊은 밤 속을 달려온 것이다. 내 방문 앞에 이르러서야 울부짖듯 딸의 이름을 부르고는 의식을 놓아버린 엄마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급히 수건을 가지고 나와서 피와 눈물로 얼룩진 엄마의 얼굴부터 닦는다. 그러다 잠에서 깬다. 일어나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고, 창밖은 아직 검다.  


#2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마주친 밤-아주 늦은 밤은 아니고 9시 반경이거나 10시 무렵이다. 나는 야근을 하고 귀가 중이다. 버스에서 내려 도시 외곽의  한 복도식 아파트 1층에 자리한 집에 거의 다 왔다고 느끼며 열쇠를 꺼내드는데, 10미터가량 떨어진 곳으로 승용차 한 대가 도착한다. 밤인데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야구방망이 같은 걸 들고 차에서 내리더니 기지개를 켠다. 순간 공포감이 엄습해오고, 나는 얼어붙는다. 열쇠 구멍이 찾아지지 않는다. 평소처럼 집안엔 아무도 없다. 아파트 복도는 적막하다. 사내가 저만치서 걸어온다. 애써 태연한 척 왔던 길로 다시 걸어 나간다. 냅다 뛴다. 오늘따라 가방이 무겁다고 느낀다. 달리다가 깬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도로 눕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3 

꿈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친구랑인가 몇 채가 뚝뚝 떨어져 마을을 이룬 어느 산골에 깃들여 살고 있다. 집 마당엔 텃밭과 거름간이, 집 주위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밭들이 있다. 친구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예전에 이 집에 살았다는 사내가 찾아오더니 대뜸 집과 밭을 다 밀어버리고 이 자리에 작은 학교를 세울 예정이니 집을 비우라고 한다. 낯선 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텃밭과 거름간을 훼손한다. 집주인도 아니면서 집주인 노릇을 하려는 그는 막무가내다. 내 항변은 소용이 없다. 나는 겁에 질려 깨어난다. 가슴이 뛰고 있다. 다시 잠을 청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그녀들이 들려주는 ‘나쁜 꿈’은 대체로 저런 내용들의 변주다. ‘#1’의 그녀는 거의 평생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려온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뜬지 1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어머니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머니는 늘 말이 없고 아픈 모습이다. 말라가는 시든 풀 같다. ‘#2’의 그녀는 이와 비슷한 꿈들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꾼다고 했다. 왜 그럴까를 골똘히 생각해보면 그녀가 10대 때 등굣길에서 또는 20대 때 퇴근길에서 ‘당했던’ 몇 가지 일이 떠 오르곤 한단다. 집을 나서 학교로 가는 길, 누군가 뒤에서 걸어오나 싶었는 데 갑자기 자신을 꽉 껴안기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평소 자상한(?) 옆집 아저씨였다든가, 퇴근 후 저녁에 버스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데 저 반대편에서 남학생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 쪽으로 걸어오는가 싶더니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놓고는 재빠르게 뛰어가던, 놀라 소리를 질렀으나 아무도 내다보지 않던 골목길에 대한 기억. ‘#3’의 그녀는 귀농한 비혼 여성인데, 작은 집과 밭을 빌려 반려동물과 함께 몇 년째 그럭저럭 살아오고 있긴 있지만 농촌으로 오면서 가벼워졌다고 믿었던 주거불안에 더해 오고 싶었던 농촌에 와서 짓고 싶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면서도 무시로 엄습해오는 어떤 불안감이 있다고 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꿈’의 첫 번째 뜻은 “잠자는 동 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이고, 위에서 나열한 이야기들은 이 정의에 따른 꿈의 내용이다. 꿈이 일종의 ‘정신 현상’이라서 꿈을 통해 무슨 정신 분석을 해보려는 건 아니지만(꿈 분석이라든가 정신분석에 관해 아는 바도 거의 없다) 이전부터 여러 여성에게서 비슷비슷한 꿈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고, 내가 꾸어온 꿈 또한 그런 꿈들과 자주 겹쳐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언젠가 한 번쯤 여성들이 자주 꾸어왔다는 ‘악몽’을 좀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말하자면 그녀들이 깨어 있을 때만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때도 맞닥뜨리게 되는 ‘나쁜 꿈같은 현실, 나쁜 현실을 옮겨 놓은 듯한 꿈’에 관해서 말이다. 자다가 가위 눌리고 그러다 소리 지르며 깨어나 보면 눈가가 젖어 있던 기억. 꿈이 들춰내는 기억을 통해 과거는 집요하게 현재에 따라붙는 현실이 된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도 쉬이 걷히지 않는 그림자 어른거리는, 현재진행중인 과거. 그 어둑하고 황망한 기억들은 과거를 재현하는 모습으로 현재로 옮아 오고, 실재로 현실에서 되풀이되어 다시 과거가 된다.  


나도 쫓기고 갇히고 뺏기고 위협당하는 꿈을 꾸곤 한다. 위에서 풀어놓은  꿈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어떤 꿈들은 때때로 퍽이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데 가령 이런 내용들이다. 소녀이거나 청년인 꿈속의 내가 80년 전쯤이나 70년 전쯤으로 돌아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용되기도 하고, 4•3 무렵인 어느 봄날에 제주 중산간 지역의 동굴에 숨어 있거나 여순항쟁에 연루된 채 여수의 어느 가을 산자락을 정신없이 헤매 다니기도 한다.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 활동가로 일하다 이스라엘군에 적발되어 고립장벽 안에 억류당하기도 하고,  난민이 되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기도 한다. 그리고 꿈속 곳곳에서 이 모든 나는 누군가(들)로부터 늘 감시당하는 중인데, 나를 감시하는 그들은 꼭 남성이다. 대개 이런 꿈들은 이와 관련한 책이나 영화나 기사 따위를 보고 읽거나 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꾸게 된다. 물론 내가 그 시대, 그 나라에 살고 있었다면 실제로 맞닥뜨렸을 법한 일들이기도 하다. 


남성들이 주도해온 전쟁과 학살, 전시강간, 애국심 부추기기 내지는 집단 의식 고취하기를 비롯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가로지르며 구축해온 억압적인 질서는 대다수 여성들은 물론 다수 남성들의 삶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어왔다. 정치질서와 사회문화에 개입할 힘이 남성들 못지않게 여성들에게도  주어져왔다면, 아니 그 힘의 반만이라도 여성들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처럼 야만적으로 쓰이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곤 한다. 앞서 본 꿈속 상황이 많은 여성의 여전한 현실에 다름 아니고, 이 시각에도 지구 어느 편에선가는 전쟁과 고문과 감시와 숨막히는 가부장적 질서로 인해 공기처럼 떠도는 폭력을 피하려고 여성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있다. 그녀들을 불면으로 몰아가는 갖가지 꿈들 또한 내가 꾸어온 나쁜 꿈들과 어떻게든 닮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꾸는 악몽은 이래저래 폭력에 잠식되어 가는 불안의 민낯을 옮겨놓은 현실의 거울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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