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마라톤이다_이종명 부천시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 센터장

by 센터 posted Dec 2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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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부드러운 카리스마. 이종명 센터장을 한마디로 일컫는다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 부모의 따스함을 못 느끼고 자란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밝고 건강한 아이로 자랐다. 사회에 대한 정의감에 불탔다기 보다는 삶으로 받아들였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이의 녹록치 않았던 순간순간들에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쌓이고 쌓인 그이의 깊은 내공 때문일 터다. 스님에게 무술을 배우기 위해 절을 찾았던 에피소드, 연애사 등 재미나면서도 속 깊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지면에 모두 담지 못해 아쉽다. 


인터뷰·정리 : 강인수 센터 상임활동가


도입사진.JPG

(@강인수)


수줍음 많았던 산골소년 


강원도 횡성, 열여섯 살 중학교 졸업 때까지 내가 살았던 동네에요. 아버지 형제가 세 명인데 동네 면장을 하던 큰아버지가 이런저런 비리로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그래서 삼형제가 뿔뿔이 흩어졌죠.  


둘째였던 우리 아버지는 가진 거 하나 없이 날품팔이하고, 가끔 밭일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며 형과 나를 키웠어요. 엄마도 내가 여섯 살에 돌아가셔서 엄마 정을 모르고 자랐고요. 그래서 엄마에 대한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거의 남아 있지 않죠. ‘엄마 없는 아이’라는 말을 많이 듣기도 했어요. 형도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서울 고모네 공장으로 취직해서 가는 바람에 여섯 살 터울 나는 형이랑도 데면데면 지냈어요. 아버지도 생활이 어려워서 그랬는지 자식 돌보는 일엔 젬병이었죠. 어린 나이에도 혼자서 모든 일을 알아서 해야 했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녔어요.  


국민학교 1학년 땐가 겨울방학식을 하는 날이었는데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이 끝나고 불우이웃돕기를 한다며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불우한 학생들을 도와준다며 학년별로 몇 명씩 이름을 불렀는데 그 속에 나도 포함된 거죠. 도와주고 싶으면 산타 할아버지처럼 몰래 갖다 주든가하지 공개적으로 이름이 불리니 엄청 창피했어요. 그래서 다음해 겨울방학식 날은 아예 학교를 안 가버렸죠. 그래도 달리기를 잘해서 체육대회 날이면 계주선수로 뽑히기도 했어요. 하굣길에 뚝방에서 맨손으로 뚜구리, 꺽지, 취리(쉬리), 메기, 버들치 같은 물고기도 잡고, 잠수해서 우렁이를 건지기도 하며 친구들이랑 재미나게 놀았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 중학교 다닐 때가 재밌었어요. 엄마 없이 자라다보니 여성에 대해 잘 몰랐는데 여자 아이들을 보면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3학년 때 남녀 합반하면서 여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지요.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갈 형편이 안 돼 사귀어볼 엄두를 못 냈어요. 중학교도 아버지가 보내지 않겠다는 걸 큰엄마가 애를 학교에 안 보내면 어떡하냐며 입학금을 줘 겨우 들어간 거라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팔자는 못됐던 거죠. 선생님이 횡성고등학교 장학생으로 가면 어떠냐고 했지만 오고갈 차비도 없어서 포기했어요. 옛날로 돌아간다면 아마 다녔을 거 같아요. 살아오면서 고등학교 친구들이 없는 게 아쉽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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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잘해서인지 요즘 마라톤에 푹 빠져있다.


춘천직업훈련원, 시작된 공장생활 


국비직업훈련생 모집 광고를 보고 춘천직업훈련원 기계과에 들어갔어요. 기숙사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다하니까 큰 걱정 없었죠. 80년대 중후반기 경제성장기여서 기술직이 많이 필요할 때였어요. 그때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시집이 기숙사 내에 쭉 돌았던 적이 있어요. ‘짤린 손가락을  땅에 묻었네’ 하는 시구를 보면서 ‘얼마나 일을 못하면 손가락이 툭툭 잘리나, 작두질하는 것도 아닌데’ 하는 반발감이 생기더라고요. 기숙사 사감이 빨간 책 돌고 있다고 난리치고 빳다질하고. 이래저래 훈련생들은 사감한테 많이 맞았어요.  


선반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따고 직업훈련원에서 현장실습으로 1986년 11월에  독산동에있는 공장에 취직을 시켰어요. 첫 일당이 3,450원이었죠. 원래 처음 일하는 사람은 3,400원을 주는데 훈련원 출신들은 자격증이 있어서 50원을 더 줬어요. 다음해엔 월급을 올려 받기로 했는데 안 올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만두고 직업훈련원 선생님한테 가서 월급 더 주는 곳으로 소개해달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취업한 곳이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30~40명 규모의 미싱 제작 회사였어요. 일당 4,500원 받고 선반 일을 시작했지요. 


1987년 7월이었어요. 옆 공장 노동조합에서 데모를 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우리도 월급 더 올리자고 20명 정도가 결의하고 8월 15일에 출근을 안 했어요. 최 반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먼저 주동해놓고 아침 출근 시간에 사장을 데려 와서 “야, 출근해.” 하고 욕을 막 하면서 기숙사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이 새끼들이 다 어디 갔나본데요.” 이러는 거야.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었죠. 어쨌든 우리는 안 나갔어요. 그런데 다음날 출근해보니 어린 우리 친구들 다섯 명만 안 나간 거예요. 나이든 사람들은 다 생각이 있었던 거죠. 쟤네들 안 나오면 물건이 제대로 안 나올 거고 슬슬 놀면서 월급 받을 수 있다고. 우리는 이용만 당한 거죠. 사장은 노발대발하며 재떨이 던지고 누가 주동자냐며 난리를 쳤죠. 우리는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그래도 사장이 일은 잘한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다섯 명 월급을 5,000원으로 올려줬어요. 일은 똑같이 하는데 우리만 월급이 제일 작았거든요.  


〈한겨레신문〉 1호 배달사원 


다음 해에 부천으로 줄행랑칠 일이 생겼어요.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상고에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그 친구는 내가 공장 다니는 걸 몰랐어요. 또래 애들은 공부하는데 나는 학교 못 다니는 게 창피해서 재수생이라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어느 날 “오빠는 이과야 문과야?” 하고 물어보는데 중학교밖에 안 다닌 내가 이과가 뭐고 문과가 뭔지 어떻게 알아요. “어··· 난 기계관데?” 했죠. 그랬더니 “아~ 이과구나?” 하는 거예요. 어쨌든 답은 제대로 한 셈이었죠. 12월 학력고사 때가 됐어요. 그때는 전기·후기 시험이 있었는데 “오빠, 시험 어떻게 됐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직 안 봤어.”했더니 “아~ 후기 준비하는구나.” 하더라고요. 이건 또 뭔 말인가 싶었죠. 그래서 서점에 가서 대학교 이름도 외우고 과들도 훑어보고, 여자 친구  만나서 나올 만한 얘기들도 미리 알아봤어요. 후기 시험이 끝나니까 2월에 전문대 시험이 남아있어요. 또 물어보기에 “전문대는 안 가. 삼수할 거야.” 그랬죠. 궁색한 핑계도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공장에서 나오는 걸 여자 친구가 본 거 같기도 하고 해서 군대 간다고 거짓말 하고 625번 버스 타고 종점인 부천까지 왔어요. 부천에 연고도 없었는데 내 처지를 들키기 싫어서 도피한 거죠. 레스토랑에 가서 경양식 먹고, 영화보고, 손만 잡고 걸어 다녀도 참 좋았던 시절이었네요.  


그때는 일자리가 흔했죠. 시골에 살 때 아르바이트로 신문 배달, 우유 배달을 정말 하고 싶었어요. 시골은 그런 일자리가 없어 못했거든요. 그런데 부천에 오니 〈한겨레신문〉이 창간 준비 사원을 모집하는 거예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바로 전화를 했죠. 부천역 근처에 신문사 지국이 있었는데 기숙사도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신문 배달을 하게 된 거죠. 그것도 〈한겨레신문〉1호 배달사원으로. 〈한겨레신문〉이 1988년 5월 15일 창간을 했는데 ‘한겨레’라는 이름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달리기를 잘해서 딴 일보다 잘할 수 있을 거 같았고, 국민주 모금도 하고, 노태우 쪽도 아니고, 기존 언론과는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죠. 특별히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닌데 노태우는 이상하게 싫더라고요. 10만 원 정도 되는 월급이 생기니까 검정고시를 봐야겠다 싶어 학원에도 다녔어요. 새벽에 신문 배달하고 낮에는 마찌꼬바(영세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엔 학원가고. 배달사원 중에 학생 운동, 노동 운동하던 형들이 많아서 데모하는 데 따라가기도 하면서 참 바쁘게 살았죠.  


〈한겨레신문〉창간호 특집 기사가 5·18 광주 이야기였어요. 광주항쟁에 대해 그때 처음 알았죠. 빨갱이인 김대중이 선동해서 간첩질한 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기사를 보고서야 간첩이 날뛴 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한 거구나 하는 정도로. ‘간첩들도 숨어있었겠지. 계엄인데 시민들이 총 들고 대치한 건 잘못했네. 그럼 안 되지.’ 하는 생각은 그래도 남아있었어요. 게다가 나는 전라도가 싫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도시 가더라도 전라도 놈들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등쳐먹는다고. 방화동 공장에서 만났던 최 반장도 전라도 광주 출신이었거든요. 그래서 전라도 것들은 상종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스며들어 있었던 거죠. 신문 기사를 통해 광주에 대한 인식이 바뀌긴 했지만 완전히 해소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야학, 그리고 노동조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저녁시간이 생기면서 시흥에서 제정구 선생이 운영하는 작은자리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학교인 줄 알고 갔는데 같이 신문 배달하는 운동권 형들이 거기 모여서 교장, 선생 다 맡고 있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학출(학생운동권 출신)들이었던 거죠. 어쩐지 세상물정은 잘 아는데 공장일 얘기하다 보면 잘 몰라서 이상하다 싶었어요.  


그때 만난 형들이 공장 가서 노동조합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들을 했어요. 나도 그러고 싶기도 해서 1989년 봄에 다시 공장에 들어갔어요. 신문 배달 땜빵하면서 지국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했고, 데모하는 공장들도 찾아다니고, 사람들도 계속 만나고 다녔죠.  


그때는 3월 10일이 근로자의 날이었는데 회사에서 야유회를 간다는 거예요. 그날 노동조합을 띄우자고 몇 명 형들하고 그전에 모의를 했죠. 그리고 야유회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우리도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선동을 했어요. 노조 만들기로 한 사람들끼리 교육도 받고 집회도 찾아다니면서 4월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를 지도했던 한국노총 쪽에서 시간을 갖고 사람을 좀 더 모아서 5월쯤에 띄우자고 해서  5·18 광주항쟁 즈음으로 날을 잡았어요. 그런데 사장이 나한테 빨간 물이 들었다며 해고를 시켜버렸어요. 지금 같았으면 당연히 해고구제신청을 했을 텐데 그때는 잘 몰라서 군대라도 갔다 와야겠다고 맘먹었죠. 영장이 나왔는데 연기 신청을 해놓은 상태였거든요.  


아는 형이 부천 YMCA 노동형제단이라는 서클이 있는데 일할 사람도 없으니 잘 됐다며 군대 가기 전에 활동이나 좀 하라고 해서 다니기도 했어요. 그런데 바로 나올 줄 알았던 영장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군대 가기 전까지 낮에는 중동 신도시 아파트 공사 현장에 가서 돈 벌고, 저녁 되면 노동형제단 가서 모임도 하고 노래도 배우며 쭉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 1992년 5월에 영장이 나와서 방위로 군복무하고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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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명 센터장은 웹툰 <송곳> 구고신의 실제 모델 3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맞은 서른 살 


제대하고 오니 노동형제단은 이미 해산돼 버렸더라고요. 다른 단체들도 92년 대선에서 김영삼한테 줄서서 다 흩어지고 어디 갈 곳이 없는 거예요. 그때 ‘노래를  찾는 사람들’ 활동을 했던 아는 누나가 갈 데 없으면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시흥 은행동의 목화연립으로 갔죠. 이젠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 나도 대학을 가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낮에는 입시학원에 다니고, 끝나면 우유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어렸을 때 꿈을 다 이룬 거죠. 신문 배달도 해보고 우유 배달까지 했으니.  


93년에 수능 시험이 처음 도입됐을 땐데 8월에 시험이 있었고 몇 달 공부한 게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와서 대학에 들어갔어요. 학교 다니면서 부천민주노동청년회 (이하 부민노청)라는 단체에서 활동도 하고. 그동안 주워들은 걸로 학생 운동도 좀 해볼까 하고 풍물패에 들어갔죠. 그런데 나보다 훨씬 어린 애들이잖아요. 잘 못 어울리겠더라고요. 등록금도 내야하고 월세도 내야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 돈도 벌어야 했어요. 학기 중 평일에는 수업 끝나면 알바하고, 주말엔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방학하면 공장에 가서 죽어라 일만 했죠. 그러니 학교 다니는 것도, 청년회 활동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었죠. 살아오면서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 중에 하나였던 것 같아요. 


1996년에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이 벌어졌잖아요. 명동성당 사수대로 열심히 투쟁도 했어요. 그러다 97년에 부민노청 침탈사건이 터지면서 11명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서울에 있던 북부노동자회가 먼저 침탈당했고 사회민주청년회, 안양민주청년회, 구로청년회, 관악청년회, 인천새날청년회 등이 줄줄이 구속 될 때였죠. 나는 학교 다니기 바빠서 활동도 제대로 못했는데 구속돼서 엄청 억울했어요.  


그때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한다고 발표를 했어요. 그래서 ‘전노 사면반대’라는 글을 수의에 쓰고 단식을 했지요. 누구에게도 단식에 대해 배운 게 없어서 물도 안 먹고, 밤에는 샤우팅을 했죠. 3일도 안 돼 목이 다 마르고 입이 쩍쩍 달라붙고···. 말도 안 나오더라고요. 교도관이 와서 물이랑 소금을 마시면서 하는 거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마시면서 한다고 알려줬어요. 무슨 개소리냐 이간질시키지 말라고 했죠. 면회 온 선배가 단식은 물 마시면서 하는 거라고 알려줘서 처음으로 단식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았어요. 그런데 단식하면서 왜 오래 버티려고 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에요. 어차피 죽기 살기로 하는 건데···.  


98년 1월 1일 감옥에서 서른을 맞았는데 여직 노동 운동도 제대로 못해보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거 같고 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대학을 다닐 이유도 없어졌더라고요. 학출에 대한 부러움, 대학 가면 결혼도 잘할 거 같고, 큰 회사에 취직해서 아버지도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간 거였거든요. 그래서 출감하고 4학년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부천지역일반노동조합을 시작하다 


감옥에서 나와 2000년 4월 30일 부천시 내동에 있는 00공구라는 회사에 면접을 보고 입사를 했어요. 절삭공구를 만드는 업체였는데 한 달 지나고 월급을 탔더니 5월 2일부터 계산을 해준 거예요. 바로 문제제기를 했죠. “내 입사일은 4월 30일이다. 5월 1일은 노동절이라 쉰 거니 1일부터 계산해서 월급을 다오.” 결국 월급을 받아냈죠. 그러면서 요주의 인물로 찍혔어요. 4~5개월 지났을 때쯤인가는 정보과 형사가 사장을 만나고 갔더라고요.  “이종명이란 친구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고 빨간 물이 든 친구니 잘 관찰해 .” 뭐 이런 얘기를 했나 봐요. 그래서 사장이 “해고시킬까요?” 했더니 “자르면 안되고 얘네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인데  몰려다니면서 데모하고 다니니까 비위 잘 맞춰주고 나쁜 짓 안 하게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했데요. 그 후로 회사 관리자들이 날 경계했죠.  


일은 잘해서 기술부 차장 총애를 받아 신기술도 배우고 했는데 노동문제연구소(이하 노문연)에서 상근 요청이 들어왔어요. 청년회가 해산되고 만들어진 곳이 노동문제연구소였어요. 활동비도 못 주면서 “너는 맨날 말로만 했지 상근은 안 했잖아.” 하며 자꾸 다그치는 바람에 회사를 그만두고 상근을 시작했죠. 그리고 다니던 회사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며 모임을 만들어서 노조를 조직했어요. 일하면서 관계를 잘 맺은 곳들이 있어서 몇 군데 노조를 더 만들게 됐어요. 그런데 지역의 노조 지형도를 볼 때, 노문연이 노조 몇 군데를 장악하고 있는 모양새로 보였나 봐요. 경계도 좀 받고 그랬죠. 결국 세 개 단체(노동사목,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노동문제연구소)가 연합해서 2004년 4월 30일 부천지역일반노동조합을 만들어 지역 활동을 시작했지요. 나는 수석부위원장하면서 현장에서 일도 하고 있었어요. 야간 현장일 끝나고 나면 낮에 교섭 가고, 교육하고, 투쟁 지지방문 다니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노조 만들기 전에 부산일반노조 가서 자문도 받았는데 깃발만 꽂으면 조합원이 몰려온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13명 조합원으로 시작해서 1~2년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조합원이 잘 안 늘었어요. 노조 상담도 했지만 조직화까지는 잘 안 되다가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한 사업장을 만들었어요. 김포에 있는 00의료라는 회사였는데 이 노조와는 정도 많이 들고 지금까지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어요. 나는 노조 조직할 때 면밀하게 준비하는 편이에요. 준비가 되지 않으면 조합원을 가입시키지 않죠. 조합원 수 늘리려고 무작위로 가입시켜봐야 그런 분들은 오래 가지도 않고···. 그래서 실패한 경우가 많지 않아요.  


〈송곳〉 웹툰에 나오는 얘기이기도 한데 한번은 한 제조업 회사 총무부장이 사장 비리 정보를 저한테 갖고 와서 노조를  만들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장이 회사 돈을 계속 빼돌려서 몇 억씩 적자인 곳이었어요. 교육하고 노조 만들어서 사장이 가지고 있는 주식 소각하고 새롭게 조합원  출자 형식으로 운영하기로 했어요. 조합원들이 퇴직금, 임금을 출자해서 3억여 원의 자본금을 만들어 새롭게 출발했죠. 사장 만나서는 그동안 빼돌린 돈 다 뱉어놓든가 자본금 소각해서 당신 지분 다 없애라고 했죠. 사장이 그날 밤 술을 잔뜩 마시고 전화를 했어요. “이종명 이 새끼야, 니가 우리 회사 먹으려고 그러지. 나 지금 15층에 있는데 뛰어내리면 죽어 이 새끼야.”  하면서 욕을 해대는 거예요. 그래서 “뛰어 내려. 그러면 우리가 회사 접수할게.” 했더니 주식 소각하고 손 떼고 가버렸어요.  


이런저런 경험 많이 했어요. 그래도 사장 중에는 자기가 처한 조건 때문에 우리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나름대로 의리 있는 사장도 있고, 조합원이라고 해서 다 똑똑하고 훌륭한 건 아니기도 하더라고요. ‘위대한 노동자 계급(?)’ 늘 그렇게만 책에서 봤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못나도 일했으면 정당한 대가는 받아서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조합원들한테 뒤통수 맞은 일도 많았지만 다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걸 품어 안으면서 조금씩 발전시켜 나가는 게 노조의  역할인 거 같아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부천지역일반노조 위원장을 했는데 상근비가 없어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도 해봤어요. 내가 원하는 차도 실컷 타봤죠. 위원장하면서 원 없이 욕도 하고 싸워도 보고 가장 가열차게 살았던 거 같네요.  


워크숍.jpg

2012년 12월, 부천시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에서 주최한 비정규직 지원센터의 역할 및 비정규직 지원 활동 활성화를 위한 워크숍.


부천시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 이후의 삶


그러다 2012년 9월, 부천시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를 만들었죠.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화되니까 노조를 좀 더 조직하기 위해서는 완충지대가 필요하더라고요. 부천 지역은 영세 사업장이 많아 정규직, 비정규직이 큰 차이도 없어요. 나는 제조업과 공공부문 노조를 조직하는 일에 주력하는 편이에요. 제조업 노동자들의 폭발성을 80~90년대에 경험했고,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서기 좋잖아요. 


센터를 시작할 때는 예산도 있으니까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일단 노동 상담하고, 교육 강좌 돌리는 걸 기본으로 하다가 실태조사를 통해서 연구사업도 하고, 노동인권 교육, 몸펴기 등 생활 운동도 하게 됐지요. 2014년부터는 노동영화제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센터하면서 좋은 건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거예요. 민주노총에서 선전전할 때는 시민들 거부감이 컸는데 센터 이름으로 하니까 수월하더라고요. 노조 조직화에도 기대를 걸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당장은 안 되더라고 일상에서 관계를 맺다 보면 그이들이 어려울 때 손 내밀 수 있으니까요. 


현재 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로 되어 있는데 조례를 개정해서 노동자 권리를 지켜주는 ‘노동권익센터’ 같은 형태로 가면 좋겠어요. 그 안에 비정규직 문제, 청소년 노동인권, 노동자 권리보장,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형태로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올해 추진하려고 했는데 시 지원을 못 받고 있어서···.  


센터도 자리를 잡아서 이젠 다른 일을 해보고도 싶어요. 전북 장수에 월세 10만 원짜리 집을 계약했는데 귀촌해서 기간제 공공근로하면서 먹고 살 계획을 갖고 있죠. 농사지을 자신은 없는데 시골 내려가서 먹고 살려면 공공근로밖에 없잖아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기간제를 조직하는 일을 하게 될까요? 운동에 대한 특별한 전망은 없어요. 지금껏 잘 살아왔으면 됐고 앞으로도 부끄럽지 않게 잘 살면 되죠. 비정규 운동도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노동 운동이지. 다만 비정규직이라는 조건이 주어져 있는 거죠.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투쟁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우리는 제도 개선을 해서 그이들이 투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우리 역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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