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노미야 긴지로와 근대적 노동윤리 형성의 이면

by 센터 posted Nov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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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일본은 원조 과로사회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과로사, 과로자살 역시 1980년대 이래 일본에서 개념화된 것이다. 196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치며 일본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는 ‘경제동물’이 일본인들의 이미지로 굳혀지기도 하였다. 한편에서는 일본인들의 이처럼 근면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의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일본 내에서도 비판적인 논자들에 의해 과로사, 과로자살과 같은 노동 인권 억압의 측면이 강조되는가 하면, 더 나아가서는 일본이 내세우는 ‘근면’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근면하게 보이는 것’이 중시되고 그 근저에는 국가와 자본이 필요로 하는 ‘집단에의 충성’이야말로 핵심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것이 실제로 ‘근면’이든, 아니면 ‘충성’이든 일본이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나아가 독점자본주의를 배경으로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사회규범의 변화가 수반되었음에 틀림없다. 자본가계급의 출현과 성장에 ‘자본주의 정신’이 필수적이라면, 노동자계급의 형성에는 노동윤리가 필수적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정신과 노동윤리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각각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다. 전자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부터 ‘무한이윤추구’에 이른다면, 후자는 장인적 전통부터 ‘무조건적 복종’에 걸친 다양한 모습을 띤다. ‘회사에의 충성’이라는 지배적 노동윤리는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역시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기에, 일본에서 ‘청성’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윤리가 형성되는 과정의 일면을 살펴보는 것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노동윤리를 논하는데 있어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郎)로 알려진 에도시대 말기 행정가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徳)다. 그가 활약했던 막부 말기 시대는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경제성장이 한계에 달해 침체를 맞이한 시기였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고, 또 변화의 씨앗이 꿈틀대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 사회에서 니노미야가 재조명을 받으며 각광을 얻는 시대가 찾아오는데, 첫 번째는 메이지 이후 자본주의 발전 시기에 기업경영자의 모범으로서 등장한 것이었다. 많은 기업가들(오하라 마고사부로 등)이 스스로 니노미야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밝히곤 했다. 두 번째는 이른바 ‘쇼와공황’ 시기였다. 공황으로 피폐해진 농촌의 재건에 있어 산업조합이 활발하게 운동을 전개하는데,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의 근간에는 니노미야의 ‘보덕사상’이 있었다.


니노미야는 막부 말기에 오다와라번 카야마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년 뒤에는 어머니마저 잃게 되면서 16세에 숙부에게 맡겨졌다. 당시에는 평민 백성에게 학문은 필요 없다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었으나, 니노미야는 낮에는 숙부의 일을 돕고, 밤에는 아버지가 남긴 유교 및 불교 서적을 읽었다. 이렇게 그는 청소년기에 자립에의 강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니노미야는 19세에 독립하여 인근 농가에서 일을 하거나 땔감을 하여 내다 팔며 자신의 땅을 넓혀갔고, 31세에는 명문가였던 핫토리 가문에 들어가 재정관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의 행정력은 호평을 얻어 번의 재정관리 일을 하게 되었고, 이후 여러 번에서 재정 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매우 이른 시기에 일종의 복식부기를 도입하는 등 수입과 지출의 균형 및 꼼꼼한 관리를 강조하였다. 그는 이처럼 기본적으로 유능한 행정가였으나, 동시에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독자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많은 저술을 남긴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이런 그가 일본의 ‘노동윤리’를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지는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그의 생애와 사상의 ‘일부’가 교과서에 수록되고, 또 군국주의로 접어든 이후 1930년대에는 일본 전국은 물론 식민지 조선의 소학교에 니노미야 동상이 세워진 데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 지금도 일본의 소학교에는 장작을 지게에 짊어진 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서 있는 니노미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말하자면 그는 ‘주경야독’의 상징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구술자료 등을 접하다 보면, 등교 시 교문 언저리에 세워진 니노미야 동상에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교사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는 식의 언급이 눈에 띠곤 한다. 물론 식민지 조선의 교과서에도 그의 생애가 소개되었다. 그런데 니노미야의 보덕사상, 아니 그의 사상 가운데 ‘노동윤리’에 초점을 맞춰 보더라도 그가 국가와 자본에의 충성을 강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매우 다면적이며,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오히려 ‘도덕경제’의 성격을 띤다.


니노미야의 사상은 분도分度와 추양推譲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분도란 분수(分)을 정하고 한도(度)를 세우는 일이고, 추양推譲이란 분도를 지킴으로 산출되는 여분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다. 물론 그는 근면을 강조하였는데, 우선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근면히 일하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분수에 맞게 행하며, 이렇게 검약을 실천하면 여유가 생기게 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생긴 여유분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의 근면은 근린공동체와의 나눔을 위한 근면이었지, 국가나 자본, 혹은 초국가주의적 상징에의 ‘희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니노미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예컨대 니노미야는 화전과 같은 약탈적 농법에 반대하였다. 이는 그의 인도人道 사상에서도 드러나는데, 그에게 인도란 사회는 물론 자연으로부터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하며, 이를 ‘보덕’이라 하였다. 그에 따르면,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원하는 것은 천성의 자연스러움이고, 이것을 바로잡고 이것을 인내하여 가정경제의 한도에 맞추게 한다. ··· 분수의 한계를 살펴 그 안에서 남음을 만들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다음 시기로 이양해야 한다. 이것을 ‘인도’라 한다.”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삶이란 만족할 줄 아는 것(足るを知る, 知足)에서 온다는 말로도 요약되는 그의 분도 사상은 오늘날 우리의 장시간 과중노동의 또 한 가지 배경인 ‘소비주의’에 관해서도 교훈을 준다. 그는 개인적인 나눔만으로는 사회를 풍요롭게 할 수 없다는 점 역시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상호부조 조직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일본에서 근대적 협동조합의 기원 중 하나로 꼽히는 보덕사報徳社 설립으로 발전되었다.


니노미야의 도덕경제 사상 가운데 ‘노동윤리’로 초점을 좁혀 보면, 그가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얻기 위한 활동으로서 ‘근로’를 정의하고 있으나, 노동labor이라기보다는 작업work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의 의미를 강조하였고, 노동을 생산적이며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으로서 숭고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노동관은 ‘장인적 노동’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니노미야의 사상이 어찌하여 ‘국가와 자본에의 충성’으로 왜곡되었을까? 메이지 유신 이후 188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는 근대적 학교 교육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근대국가 형성기로서 ‘국민의식’ 형성이 중시되던 시기였던 동시에 산업자본주의 발전이 본격화되면서 통제기제로서 노동윤리가 필요해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당시의 지배세력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탈아입구’를 목표로 무엇보다 ‘신속히’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 전환하고자 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가, 그리고 국가의 주도하에 형성된 자본에의 충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국정교과서 제도를 도입한 지배세력은 빠른 시간 내에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채택이 용이한 인물 중심의 서술을 선호하였다. 그러던 중 1904년에 이르러 수신修身, 즉 도덕 과목 교과서에 니노미야의 성장기가 수록되었고, 이후 그의 이야기는 근면이라는 노동윤리의 원형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이야기가 채택될 당시 경쟁 모델로서 그보다 반세기 정도 앞선 시대의 대상인이었던 시오하라 타스케(塩原多助)가 있었다.


시오하라의 생애를 다룬 전기들은 도시화를 배경으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여 계층상승을 이루어내는 입신양명 스토리를 강조했다. 동시에 ‘의리와 인정’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이는 니노미야와 달리 근대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전통적 공동체’의 가치들에 보다 부합하는 측면들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생애는 니노미야가 가족과 고향을 배경으로 성공을 이루어가는 것과도 상반되었다. 물론 그 역시 니노미야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경제로의 전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지만, 그의 생애와 저술들은 보다 평민주의적이었고, 따라서 가부키로 만들어져 상연되는 등 지배자들보다는 일반 민중들에게 훨씬 인기가 있었다. 결국 니노미야의 이야기가 ‘국가에의 충성’이라는 스토리에 더욱 어울렸던 것이다.


당시 교과서에 니노미야의 이야기가 채택된 배경 가운데에는 보덕사報德社, (호토쿠샤) 운동이 큰 지지를 얻으며 확장되고 있었던 점이 있었다. 보덕사는 에도 말기 니노미야가 하급 신분의 일꾼들을 모아 결성한 일종의 공제조합으로서, 모금을 통해 기금을 조성하여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보덕사 운동은 일종의 ‘농촌 부흥 운동’으로서 메이지유신 이후 급격히 성장하였다. 메이지 시대는 농민 폭동이 끊이지 않던 시기이기도 하였고, 메이지 정부는 ‘자조’를 통해 농촌 부흥을 꾀하는, 요컨대 ‘분배’보다는 ‘발전’을 강조하였던 비교적 온건한 이념 성향의 단체였던 보덕사를 파트너로 삼은 것이다. 보덕사 역시 주요 지도자들이 정부의 공인을 받아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는데, 양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그밖에도 메이지 천황이 1880년에 니노미야의 저서인 《보덕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곧이어 정부가 그의 저작들을 공식 출판하여 정부기관에 배포하였다는 점도 니노미야가 교과서에 실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배경에는 당시 메이지정부의 핵심 슬로건이었던 부국강병, 식산흥업을 추진함에 있어 첫 번째 과제였던 농업 개혁 및 선진화에 니노미야가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는 점이 있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니노미야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볼 때 핵심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도덕경제’가 도외시되고 ‘근면절약’과 ‘충성’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과로로 인한 죽음이 끊이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어떠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이념에 따라 일하고 있는 것일까? 산업화 시대에 ‘산업전사’로서 ‘조국과 민족’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했던 모습,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혹은 ‘사람 취급 받기 위해’ 일하는 모습, 그리고 ‘언젠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일에 매달리지만 결국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 등등 이런 모습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일하는 모습인 듯하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또 옛것과 새것이 뒤섞여 있기도 한데,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따져 묻고 새롭게 발견해 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지향점을 다시금 확인해 보아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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