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예술을 통한 자립의 길을 찾아서

by 센터 posted Nov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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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그녀가 태어나던 199410, 부산의 길거리엔 떨어진 나뭇잎들이 세상의 소란과는 별 상관없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지 않았을까, 산기슭엔 억새꽃이 한창 피어나는 중이었으리라. 한 여자아이가 세상에 제 존재를 알리고 뚜벅뚜벅 자라나 지금에 이르는 동안 세기가 바뀌었고, 디지털 혁명이니 북미 정상회담에 따른 비핵화 선언이니···. 세계는 급물살을 타는 중이다. 이토록 가파른 세상의 변화와 맞닥뜨리는 중에도 고요를 확보하는 일, 고립을 자처하는 일, 자립을 조직하는 일과 함께 한편으론 , 여기 있소라며 세상의 벽을 두드려 다양한 방식으로 제 존재를 드러내는 일-그녀에겐 이것들이 다 필요했다. 지난해, 제주와 부산에서 좌충우돌하며 겨울과 봄과 여름을 보내고 가을 무렵, 전라남도 해남에 자리한 한 시골살이 체험/실험 공간에 와서 어느덧 두 번째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일상예술가이면서 생활디자이너로 자립하여 살아가고픈 페미니스트, 동동1)에겐 말이다. 이곳에서 노래를 만들고 디자인 작업을 하고 농사짓고 밥 짓고 집 짓고 쿠키 굽고 틈틈이 여행도 하면서···. 생활인으로서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는 재료를 가능한 대로 다양하게 장만해가는 방법들을 몸과 영혼에 새기는 중이다. 흔히 남성의 일로 분류되는 공구와 기계 다루는 법 같은, 어릴 적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던 생활기술들도 차근차근 익혀보려고 시도 중이다. 애초 사흘가량만 머물다 가리라던 계획이 한참 늘어나 이곳에서 지낸지 1년을 지나치고 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여기서 살아갈 테지만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자신도 알 수 없으나, 어디로 가든 고요와 고립과 독립을 직조해가며 일상예술로 자립은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품고 답을 좇아 움직이게 될 것 같다


일상을 디딜 때마다 예술이 걸어오는 분주한 말들을 받아 적는 것으로 자립의 방식을 탐색하는 실험들을 본격적으로 해나가기 위해 대안 대학2)을 졸업한 직후 제주도로 날아간 것은 재작년 12월 말 무렵. 그저 잠시 떠돌기 위한 여행자의 처지로 발을 디딘 게 아니었으므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돈부터 벌어야 했다. 마침 숙식을 제공 받으며 일할 수 있다는 감귤 선과장을 알게 되어 이곳에 취업하게 되었다. 4등급으로 분류될 감귤이 끊임없이 떠밀려 도착하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쉬는 날 없이 하루에 14시간가량씩 한 달을 꼬박 일하고 손에 쥔 돈은 150만 원. 한 달을 안 채우면 임금을 주지 않는다는 얘길 듣고 시작한 일이었다. 작업자 30명 규모의 사업장에서 사업주를 포함한 두어 명의 관리자와 식당에서 식사 준비를 도맡아 하는 아주머니 한 분 말고는 다 불법 체류자 처지인 작업자들 틈에서 내국인은 달랑 그녀 혼자였다. 노동시간과 강도가 거의 노예노동 수준이어서 제주도로 함께 내려와 선과장에서 하루 같이 일하고는 이곳이 있을 곳이 못됨을 한눈에 파악한 친구는 일찌감치 서울로 돌아간 후였다.


그녀가 혼자서라도 이 무지막지한 일터에 남아 하루하루 살아낼 결심을 다질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제주에서 거주하며 일상예술로 자립을 일궈나가기 위해 우선 확보해야 할 주거비용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또 다른 까닭 같은 걸 대자면 평소, 앎을 행동 속에서 구현해내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었고, 땀 흘려 일할 때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한다고 느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살아오면서 특별히 지은 죄도 없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있자면 죄 사함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곤 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여태껏 살아온 어느 달보다 기나긴 한 달이 지났을 때 이런 저런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마침내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오긴 했으나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제주도에서 연세 150만 원짜리 집을 구하는 일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작업장을 어렵사리 벗어나 20172월의 길 위에 섰는데, ‘이제 뭘 어찌 해야 하나···.’ 무력감이 엄습해왔다. 어디 조용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 머물며 새로운 일이며 거처를 찾아보리란 생각조차 일지 않았다. 의지를 배반한 삶이 복잡하게 엉켜버린 실타래의 모습을 하고 굴러들어와 있었다. ‘내 인생-이렇게 망하는구나···. ’ 중얼거리며 도로가 벤치에 앉아서 무심코 책 한 권을 붙들고 있을 때 다음의 문장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증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들을 믿지 않는다. 확실한 단 한 가지는, 매듭으로 가득 찬 실타래처럼 모든 것이 너무도 복잡하다는 것이다. 모두 거기에 있으나 시작 부분을 찾기 힘들고 끝을 가늠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3)


순간, 눈앞에 불이 확 지펴지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울컥하는 소릴 들은 것도 같다. 추운 거리에서 성냥을 그어 불을 환히 밝혀 든 성냥팔이 소녀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좌절감을 꾹꾹 즈려밟고 일어나 버스를 탔다. 지금 내 삶이 엉켰음을 직시하자. 엉킨 실타래가 되어버린 삶이 저절로 풀릴 거란 기대 따위 하지 말고 고양이마냥 이것을 가지고 놀아보자


물론 일단은 기대를 무참히 박살 내버린 제주라는 곳에서 탈출해 지친 심신을 회복해야 했다. 그런 후에야 이 매듭으로 가득 찬 실타래같은 삶을 풀어볼 수도, 이것으로 어떻게든 놀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지간해서는 찾지 않았던 엄마 품이 새삼스레 떠올랐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부산에 와서 5개월간 디자인 학원엘 다녔다. 디자인 공부는 뭔가를 배치한다든가 편집하는 일, 있는 것들을 재조합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녀의 적성에 잘 맞았다. 학원에 다니는 틈틈이 예전처럼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노랫말을 써서 곡을 붙여 부르는 일도 컴퓨터를 사용해 디자인을 하는 일도 누군가의 손을 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단칸방에서 해낼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녀에게 일상예술/상황예술이란 이런 작업들을 일컫는 것이고, 스무 살 무렵부터 이런 예술활동들이 농사와 더불어 자신의 일상 속에서 놀이이자 생존수단이면서 소통의 도구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살아온 터였다


지금 머물고 있는 해남의 미세마을은 다시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을 만큼 기운을 차렸을 때 제주살이에 재도전하겠다고 맘먹고 제주도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르게 된 곳이다. 서울에서 다녔던 대학을 매개로 한 인연들을 이곳에서 우연히 만나 어울리게 되면서 며칠만 머물려던 계획이 한 달로 두 달로 1년으로··· 점차 늘어났던 것이다. 삶을 누리는 것과 예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므로 자립 선배들이 많은 이곳에서 다양한 일상예술과 갖가지 생활기술을 접하고 익혀 가면서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예술로 표현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려고 한다. “, 순간, 일상, 예술, 아름다움, 체험, 공동체-이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낌없이 누리고싶은 것이다


충동,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혼자, 혼자를 기르는 법, 표류, 방해, 해방, 부조리, 아나키즘, 소비 없음, 복종, 불복종, 미니멀리즘, 체제, 우주, 자립, 독립, 고립···. ”

머잖아 동동사전에 실릴 언어들이다. 자신만의 사전에 등재한 이 말들과 더불어 일상예술로 자립을 조직해가며 크고 작은 삶의 고개들을 한 고개, 한 고개 기어이 넘어가고 있을 그녀가 그려진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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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릴 적 함께 살던 고양이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삼았다.

2) 풀뿌리사회지기학교를 일컫는다서울 신촌에 있는 2년 10개월 과정의 대안 대학으로, 2004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3) 지넷 윈터슨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민음사, 2009,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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