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착순으로 삭제되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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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정 르포작가, 센터 기획편집위원



처음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98년 울산의 현대자동차 노동자 파업 과정에서 해고된 그녀들을 떠올렸다. 얼굴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98년,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하던 생산직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은 밥을 해먹이던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삭제시키면서 회사와 ‘타협’에 이르렀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밥·꽃·양〉이라는 영화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한다. 

“밥을 짓던 그녀들이 어느 순간 투쟁의 꽃이었다 희생양이 되어, 밥 먹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3년. 그녀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가?”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이기심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로 우리가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다면, 이런 질문은 어떤가. 왜 여성 노동자가 먼저, 그리고 그렇게 쉽게 삭제되는가. 왜 그녀들이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정리해고 되어야 하는가.”(〈밥·꽃·양〉 제작 일지 중에서) 그런 질문들이 이 영화 속에 있다. 20년을 훌쩍 넘어 지금 이 공장의 그녀들에게서 같은 질문을 듣는다. 

“노예같이 15년, 16년 일해 온 자리를 어떻게 내놓아요? 왜 여자들 자리를 빼앗냐고요.”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한탄에 가깝다. 


1.기아차.jpg

2018년 6월, 기아자동차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렸다.(@한국여성노동자회)


여성들이 설 땅이 없다


원래 없었다고 했다. 정규직 제조생산공정에 여성들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기아차에서는 여성은 안 뽑는대요. 원래부터 정규직(제조생산공정)에 여성들은 없었다는 거예요. 원래 그런 게 어딨어요? 헌법도 잘못되면 뜯어고치는 세상인데.”

기아자동차에 입사한 지 올해 11년째인 조수현(가명) 씨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녀는 정규직에 여성을 뽑았더라면, 여성도 많았을 것이라고 한다. 갈 곳은 사내하청 자리뿐이었다고, 들어가 보니 너무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여성들이 설 땅은 예나 지금이나 없다고, 그녀는 한탄하고 있다. 



기아현대차는 사내하청 비정규직이 모두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이 나온 후, 정규직이 되고 싶으면 각자 소송을 걸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선심 쓰듯 특별채용이라는 미끼를 던졌다. 법원은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판결을 내놓았지만 회사는, 특별채용에 합격한 사람에 한해 ‘신규채용’하겠다고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특별채용에 합격된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소송(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취하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길고 지난한 소송을 견디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특별채용에 응시하고 있다. 회사를 압박할 수 있는 불법파견 소송 판결을 받아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나둘 줄어가고 있다. 회사는 근속을 전부 인정해줘야 하는 정규직 전환 대신 특별채용이라는 전략을 쓰면서 정규직 전환에 들어갈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고, 특별채용에 합격된 노동자들과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을 가르면서 노동자들을 파편화시키고 있다. 비용도 절감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 결집력도 약화시키니 회사로서는 1석 2조의 전략이다. 그러나 이런 회사의 꼼수조차 그간 함께 투쟁해 온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애당초 여성들은 회사의 시나리오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선택’된다는 것은 누군가는 ‘선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년 전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공정을 떠맡았다. “힘들고 더러워서 아무도 안 하려는 자리”는 월 50만 원, 60만 원에 외주화되었다. 값싸고 해고가 쉬워지자 여성들이 대부분인 공정도 생겼다. 제조생산직에 여성을 들이지 않는다던 회사는 값싸고 해고가 쉬운 생산직 비정규직 자리에 여성들을 들였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면 해고였어. 겨울엔 난로 하나를 안 줘서 쓰레기봉투 까만 거 뒤집어쓰고 일했다니까. 참 나, 그런 것 생각하면. 노조 없었을 땐 그런 세월을 살았어.” 

박소은(가명) 씨는 자신이 처음 공장에 들어왔던 17년 전을 그렇게 회상한다. 그녀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싸우면서 ‘힘들고 더러운 공정’의 복지를, 노동 강도를 개선시켰다. 원래부터 편한 자리가 아니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어렵고 위험한 일들을 줄여나갔듯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쓰레기봉투 뒤집어써가며 일했던 박소은 씨의 자리엔 지금 근속이 높은 남성 정규직 노동자들이 들어와 일하고 있다. 


그녀들은 강제전적을 당하면서도 ‘선착순’에 내몰렸다. 어차피 정규직은 될 수 없으니 빨리 전적을 가야 조금 더 쉬운 자리로 갈 수 있다고 회사는 그녀들을 협박했다.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전적을 가보니, 15년을 일해 온 공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소한 공정인데다,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맡게 되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비정규직 라인이 정규직 라인으로 전환되는 만큼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있다. 

“20년간 우리가 해온 것은 뭐예요? 왜 우리의 역사를 지워버려요? 나이 먹은 제가 싸우고 있잖아요. 제가 산 역사예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조수현(가명) 씨의 외침은 이대로 묻혀서는 안 된다.


치킨게임의 딜레마, 해답은 간단하다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치킨게임의 딜레마를 끝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게임의 참가자가 서로를 향해 겨눈 총을 게임의 룰을 만든 자에게로 향하면 된다. 게임의 룰을 박살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게임대 위에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만 오르게 될 것이다. 지금 자본은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겨누게 하지만, 나중에는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 각각 총을 쥐어주고 게임대 위에 세울 것이다. 회사는 계속해서 희생양을 찾을 것이다. 역사는 이미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최선이었나.” 

밥꽃양의 말미에 떠오른 물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밥꽃양은 역사다. 여성 노동자들의 자리가 누구보다 먼저 지워졌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다. 잘못된 역사를 반복해선 안 된다.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14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앞세워 해고시켰지만, 정리해고의 칼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라인 밖의 노동자들이 먼저, 그리고 라인 안의 노동자들이 다음으로 해고의 위협은 계속되어 왔다.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은 14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내친 것이 아니라, 144명의 훌륭한 투쟁 동력을 잃은 것이다. 거대한 자본에 맞서 우리가 믿을 것은 한 명이라도 더 어깨 기대고 같이 투쟁할 동료들이다. 144명을 잃고, 다음엔 천 명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만 명을 잃을 것이다. 나중엔 누구와 함께 싸울 건가? 이렇게 동료들을 잃는 방식으로는 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원하청 연대는 그냥 나온 구호가 아니다. 누구도 치킨게임의 게임대 위에 오르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그것이다. ‘최선’은 그렇게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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