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사 전태일과 비정규직 노동자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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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호 센터 이사, 전태일재단 이사장


일기나 수기에 의하면 전태일이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가 1965년 가을, 그의 나이 열여섯 무렵이었습니다.

“한 달 월급은 1,500원이었다.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50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 지도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위 글에는 시다라고 불리는 미싱보조로 시작한 봉제 노동자 전태일의 모습과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전태일은 특유의 성실함과 뛰어난 재주로 짧은 기간에 미싱사, 재단보조를 거쳐 재단사가 됩니다. 그가 간절히 바라던 자리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의 재단사는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사용자에 더 가까운 요즘의 정규직이었습니다. 미싱사들에게 일감을 나누어주고 작업감독을 하며 사업주와 협의하여 비정규직 미싱사나 시다들의 임금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했으니까요. 작업장 안에서는 상당한 권한이 있었고 수입도 차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태일은 빨리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피나는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달랐습니다. 전태일이 미싱사로 일하면서 느꼈던 문제의식이 그의 수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작업이 힘들게 작업시간이 길고 힘에 겨운 야간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공장 안에서 절대적인 책임자인 재단사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하기 싫은 야간작업을 하고 나면 그 다음 날은 평일보다 작업량이 형편없이 떨어지지만 공장 주인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인 우리 직공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직공들은 어린이들 바지를 만들어내는 매수에 따라 월말계산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우리 미싱사들이 다 같은 불만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1매 당 얼마를 지불한다는 것을 재단사와 적당히 타협해서 주는 것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기 때문에 일이 바빠 직공들이 매수를 많이 올려도 겨우 평균 월급보다 조금 나은 월급을 받을 뿐이다. 더구나 직공들이 대부분 여공들이기 때문에 주인들의 이런 비리 사실을 직접적으로 따지는 예가 드물고 대부분은 불만을 잘 나타내지도 않았다. 나는 이런 계통에서 미싱사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지만 너무 억울했다. 아무리 열심히 밤잠 못자고 많은 양의 바지를 만들어야 끝에 가서는 피땀 흘린 대가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나는 미싱사들 중에서 유독 혼자만의 남자였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태일이가 재단사가 되려 한 것은, 정규직으로 보장된 신분에 봉급을 많이 받거나 비정규직인 미싱사나 시다에게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작업장 내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사용자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관리하는 재단사의 역할을 제대로 함으로써 노동자를 보호해 볼까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재단사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나도 어서 빨리 재단사가 되어서 공임타협을 할 때에는 약한 직공들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리라고 결심했다. 사실 그땐 다른 직공들이 다 작업량에 의해서 임금을 계산했지만 재단사나 재단보조 등 특종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월급제였던 것이다. 아주 큰 공장을 제외하고는 공장장이 없는 공장은 재단사가 공장장까지 겸하여 직공들의 절대적인 문제인 입사와 해고의 문제까지 재단사가 마음대로 관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재단사는 주인에게도 절대적인 존재였고 우리 직공들의 건의사항도 재단사를 통해서 주인에게 건의되며 재단사는 절대적으로 양심껏 중립을 지켜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에게 월급을 받는 약점에 의해서 자연히 주인에게 편파적이었다.”

그래서 전태일은 재단사가 되기 위해 미싱사를 포기하고 재단보조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재단보조를 하면서도 그의 결심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하는 일은 이층 재단판에서 나라시를 잡고 원단가게로 심부름을 하고 잠바나 코트 만드는데 들어가는 싱을 짜르는 일이었다. 나는 처음 재단을 배우려고 생각할 때 결심한 바 있어 열심히 나에게 맡겨진 일을 했다. 내가 가기 전까지는 무질서하게 방치해 있던 환경을 깨끗이 정리하고 시다들이 이층에 부속을 가지러 오면 기다리는 일이 없고 찾는 일이 없도록 잘 정돈해 두고 주머니, 후다, 싱 같은 것은 언제든지 풍부하게 잘라 두었다. 아침 8시 반까지 출근하면 평균 퇴근시간이 오후 10시였다. 그렇지만 열심히 배운다는 생각 아래 고단한 것을 참고 이 공장에 들어온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 용어조차 없었던 때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전태일의 예에서도 보듯이 분명히 노동자를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고 차별하고 착취하는 구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전태일 시대는 사실 대부분의 노동자가 근로기준법 밖에 있었고 공공연한 착취와 차별에 노출돼 있었으며, 노동 운동도 극심한 탄압을 받았음은 이미 잘 아는 사실입니다. 어찌 보면 4대 보험 같은 노동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고 해고가 자유로웠던 그 당시는, 노동자 모두가 비정규직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당시 평화시장 일대의 봉제 노동자 근무실태는 전태일이 대통령께 보내려고 쓴 간곡한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전태일과 바보회 친구들이 온갖 방해와 탄압을 무릅쓰고 감행한 실태조사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앞부분 생략) 1개월에 첫 주와 삼주 이틀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 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 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중간부분 생략)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퍼센트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말할 수 없는 가난과 모진 고초 속에서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세파에 시달리며 고생하다가 열여섯에 평화시장으로 와서 봉제 노동자가 되어, 미싱보조에서 미싱사, 재단보조를 거쳐 재단사가 될 때까지의 전태일의 삶의 태도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에서 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라도 노동자는 착취당하거나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일관된 생각과,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했다는 것입니다. 위의 인용한 글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 재단사는 상당한 지위의 신분과 부가 보장된 정규직이었습니다. 구태여 시다나 미싱사 등 당시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전태일은 달랐습니다. 작업장 안에서 힘들어 하는 미싱사의 일을 대신해주는가 하면, 배고픈 시다들에게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주는 등 혼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오히려 돌아오는 것은 해고라는 탄압이었지요. 전태일은 혼자 고민하면서 포기해버릴까도 했지만 결국 다시 일어나 어린 여공들 곁으로 돌아갔고, 친구인 재단사들을 모아 노동조합에 가까운 삼동회를 조직하여 조직적 대응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전태일이 분신항거한 지도 어언 48년이 지났습니다. 노동자의 삶은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똑같은 구호를 외치며 싸우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정규직 비정규직의 상대적 차별과 박탈감은 더 심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조업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학교나 언론사 등 공공기관에서의 차별도 노골적입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당사자들의 투쟁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기득권을 가진 정규직 노동자들의 태도는 뭔가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올해도 11월 13일이 되면 우리는 전태일정신계승전국노동자대회를 열어, 그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제대로 계승하려는 다짐을 할 것입니다. 올해는 부디 정규직 노동자 재단사 전태일의 삶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겨보는 계기가 되는 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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