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학’ 형성과 ‘위로부터의’ 산업민주주의 시도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노동안전보건 영역과 밀접한 ‘과학’ 분야를 꼽아 본다면 의학의 한 갈래인 직업환경의학을 들 수 있다. 물론 직업환경의조차도 모두 ‘노동자의 의사들’인 것은 아니다. 일하다 다치고 병든 이들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꼼꼼히 따져 묻는 의사들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소수이며,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병들고 다치는 일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노동 현장에 주목하는 의사들은 더더욱 소수이다. 직업환경의학은 사회적인 요인을 통해 의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사회의학의 한 분야로 규정된다. 물론 진보적 직업환경의학 전문가들은 노동조합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사회과학자들과 협력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의학의 한 갈래이다 보니 ‘사회적 요인’을 규명함에 있어 협업이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반대로 사회적 문제를 과도하게 ‘의료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에 ‘노동과학’이라는 분야가 학문 분과로서 제도화되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더욱이 일본에서 노동과학이 출현하고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거의 백년 전부터였다는 점은 더더욱 주목할 만하다. 물론 국내에도 1970년대 후반 국립 노동과학연구소가 설립되었던 적이 있고, 현재도 인천대학교에 노동과학연구소가 있으나, 노동과학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낯설다.


지난여름, 일본은 폭우라는 재난을 맞아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그 중에서도 커다란 피해를 입어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곳이 오카야마 현의 쿠라시키 시이다. 쿠라시키는 중소 규모 도시지만, 노동과학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그 배경에는 오하라 마고사부로(1880-1943)라는 개혁적 기업가의 존재가 있었다. 오하라 가문은 쿠라시키 지역에서 방적회사를 운영하던 지방 재력가였다. 그는 26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쿠라시키 방적 2대 사장 및 쿠라시키 은행장에 취임하였는데, 초기부터 노동 환경 개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우선 당시 심각한 중간착취 문제를 낳고 있던 ‘함바’ 제도를 철폐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적 성향은 오하라 가문의 가풍 자체에도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청소년기 그의 개인적 경험에도 배경을 두고 있었다.


마고사부로는 열여덟 살 때 저명한 사회사업가이자 오카야마고아원 설립자인 이시이 쥬지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기독교 사회개혁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사업 수완도 뛰어났는데, 그가 사장을 맡은 지 채 10년이 안 되어 쿠라시키 방적은 전국 규모 기업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발전설비 도입 등을 통해 증기에서 전기로의 동력원 전환에 선구적으로 대응하는 등 적극적인 신기술 도입과 투자가 있었다. 1926년에는 인조섬유 국산화에 눈을 돌려 쿠라시키 레이온(쿠라레)을 설립하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지역사회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및 복지사업에 힘썼으며, 쿠라시키에 세워진 병원과 미술관은 현재까지도 잘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학술 진흥에 관심이 많았는데, 단순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빈곤 구제나 노동 환경 개선 사업을 벌이면서, 보다 근본적인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각각 농업 분야 연구소인 오하라농업연구소(1914),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1919), 쿠라시키노동과학연구소(1921) 설립이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노동 문제와 강한 연관을 갖고 있던 사회문제연구소와 노동과학연구소는 현재까지도 해당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기관이다. 노동과학연구소의 설립과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에 노동과학이 자리 잡게 된 데에는 테루오카 기토라는 인물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0년대 중반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생리학을 전공하고 있던 테루오카는 도쿄 빈민가에서 6개월간 거주하며 현장연구를 실시하였고, 1927년 그 연구 결과는 일본 사회의학의 중요한 성과로 남는 <사회위생학>이라는 저서 발간과 이후 동명의 학술지 창간으로 이어진다. 그는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먼 친척이었던 지도교수 추천으로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보건의료를 사회적 맥락에서 연구하던 그의 접근법은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방적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 테루오카는 마고사부로에게 협조를 요청하였고, 이것이 쿠라시키노동과학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테루오카가 주류 의학의 접근법과는 달리 인간 신체기능과 사회심리적 요인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접근법을 취한 데에는 당시 급속히 확산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접근법에 따라 연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그는 심리학자인 키리하라 시게미를 영입하였다. 이후 생리학, 인간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을 끌어들였고, 1920년 조사팀을 구성하면서 테루오카는 자신들의 연구 분야를 ‘노동과학’이라 지칭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1921년 연구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1924년부터는 기관지인 〈노동과학연구〉가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그 부제는 ‘산업에 관한 의학적 심리학적 연구’로서 안전, 건강, 환경을 통합적으로 고려하여 노동을 연구한다는 연구소의 접근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당시 방적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과로와 결핵은 핵심적인 건강 문제였고, 이것이 오하라 마고사부로가 연구소를 설립한 계기이기도 했다. 테루오카가 마고사부로와 함께 방적공장을 돌아보았는데, 영국 맨체스터에서 수입해온 방적기계가 여공들의 신체 사이즈에 맞지 않아 위험한 자세로 큰 신체적 부담을 받으며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설립 이후 상당 기간 동안 노동과학연구소는 방적공장 조사연구에 집중하였는데, 이 시기 연구소가 여성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 문제 조사를 통해 내놓은 교대제 건강 영향 연구와 그에 바탕한 개선 방안 등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노동 문제 연구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런데 세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 쿠라시키 방적이 경영 위기를 맞아 연구소 역시 폐쇄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마고사부로는 연구소를 독립시켜 자비로 운영하다가 1936년 일본학술진흥회로 이관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전쟁(1931~1945)이 시작된 시기였다. 전시 체제 하에서 노동과학연구소 역시 동원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를 씁쓸히 지켜보던 오하라 마고사부로 역시 1939년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사업에서 손을 떼었고 1943년 결국 사망하였다. 전쟁시기 노동과학연구소의 테루오카 소장, 그리고 그와 더불어 노동과학 선구자였던 키리하라는 전쟁기간 동안 군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나아가 노동과학연구소는 1941년 대일본산업보국회에 강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전쟁시기  노동과학연구소에서는 고도의 사회적 통제 하에서 군사적 목적의 연구가 증가하는 한편, 전시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생산성 향상에 주안점을 두게 되었다. 예컨대 테루오카의 제자이자 노동과학연구소에 오랜 동안 근무했던 미우라 토요히코는 전시 중인 1940년, 연구소가 일본 육군으로부터 군화 개발 연구를 위탁받은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1940년부터는 ‘노동과학’이라는 용어도 ‘산업의학’으로 대체하여 사용해야 했다. 기관지 역시 한때 〈산업의학〉으로 개명하였고, 부제 역시 ‘국민의 근로에 관한 종합적 연구’로 바뀌게 되었다. 1939년에는 부설기관으로서 이른바 ‘만주국’에 만철개척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는데, 이 연구소는 만철 철도총국인사보국과의 소관 하에 놓이기도 하였다. 테루오카는 만철연구소의 개척민 생활과 노동에 관한 조사 연구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침략 전쟁 승리를 위한 사업에 협력하였다. 요컨대 테루오카의 사회위생학은 ‘민족위생학’으로 전환하면서 타 민족에 대한 배척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다만 전후 시기 그의 활동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전쟁시기 동안의 활동을 반성하고 노동과학의 본래 의의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전후 노동과학연구소는 전쟁 기간 활동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다시금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연구소는 1945년 재건되었는데, 초대 소장인 테루오카가 1948년까지 소장을 맡았다. 이후 연구소는 일본 전역에 걸쳐 농업 노동자, 탄광 노동자, 공장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현장 조사를 벌이며 작업 환경 개선을 제안하였고 연구뿐만 아니라 기업 및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능 또한 강화하였다. 연구소가 성장하면서 일본산업위생학회 등 산업의학 분야는 물론 의학 분야의 수많은 연구자들이 연구소와 협업을 하거나 연구소를 통해 연구 성과를 발표해 왔다. 현재까지도 노동과학연구소에는 의학 및 보건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노동과학이 등장하고 전쟁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초기의 형성 과정이다. 전쟁 전 일본에서 ‘노사관계 형성’을 주도했던 자본가들은 대체로 개혁적 성향을 띠었는데,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당대의 적잖은 개혁적 자본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시도들은 ‘주종관계’에 바탕을 둔 온정주의를 넘어 노동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여 대등한 노사 관계로 새롭게 구축하고자 한 ‘산업민주주의’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위로부터의’ 시도였고, 실질적인 산업민주주의란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실현될 수 없다. 전후 일본의 기업주도적 노사 관계가 바로 그 증거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노동존중’ 역시 ‘쟁취’하지 않는 한 온전히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전쟁 전 일본의 위로부터의 산업민주주의 시도 역시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움직임에 대한 반응의 측면을 지닌다. 일본의 1910년대는 러시아 혁명 발발(1905년 혁명) 등의 영향 하에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사상의 유입과 확산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사회 문제가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러일전쟁을 계기로 해서 일본의 자본주의 역시 크게 변화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사할린 일부를 차지하였고, 조선을 식민지화하였으며, 만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직후부터 일본은 만성불황에 시달렸고, 전쟁 비용 및 군비 확장 비용으로 인해 농민과 노동자들의 부담은 오히려 전시보다도 가중되었다. 반면, 재벌에 의한 자본의 독점화와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의 대규모화도 급속히 진전되었는데, 이는 노동자들의 폭발적인 노동 환경 개선 요구와 인금 인상 투쟁으로 이어졌다. 특히 1906년부터 1907년 사이에 수많은 대규모 공장에서 집단적으로 쟁의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오하라 마고사부로가 산업민주주의 시도의 일환으로 연구기관들을 설립한 배경에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 그리고 그 한 축을 이루었던 노동자 민중의 저항이 있었다. 노동과학연구소는 사회문제연구소와 더불어 개혁적 자본가에 의해 설립되었음에도 공식적으로 특정한 입장을 지지하지는 않았고 상당한 자율성을 지니고 있었다(특히 사회문제연구소는 상당 기간에 걸쳐 일본 사회민주주의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장을 중시하고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과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한다는 설립 초기의 이념은 꾸준히 지속되었고, 따라서 일본의 노동 운동, 노동안전보건 운동과도 협력 관계를 지속해왔다.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학술적 기여를 통해 진보적 보건의료인 양성에도 커다란 기여를 해왔다. 안전과 건강이라는 문제에 대해 노동자의 관점에서 노동자가 주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노동자들의 ‘무기고’ 역할을 하는 연구기관과 전문가들의 존재만큼은 부럽게 느껴진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