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박 중인 한 척의 작은 배 같은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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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내가 사는 마을로 하루에 겨우 세 번 오가는 군내 버스를 어쩌다 타게 되면 저 뒤쪽에 그녀가 앉아 있곤 했다. 대체로는 아침 무렵이었는데, 어느 마을에서 버스를 탔는지는 모르겠으나 셔츠에 바지 차림을 하고 안경을 낀 단발머리 그녀가 무릎에 가방을 놓고 고요히 앉아서 창밖을 응시 중이었다. 단정한 입매, 어딘가 쓸쓸하고 단호해 보이는 눈빛-곁눈질로 얼른 표정을 살피고 한 칸 건너 옆자리나 뒷자리에 앉고는 했다. 말을 걸어보고도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뭐랄까, 자신 안에 이미 단단한 세계를 들여놓고 이에 몰두 중인 사람 같아서 말을 붙이는 게 사소하게라도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스에서나 지역의 작은 장터에서 가끔 마주치곤 했는데, 일본에서 온 이주민임을 알게 된 건 2년가량이 흐른 후였다. 언제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겠구나 싶어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마침내 말을 걸어 인터뷰 요청까지 하게 되었다. 읍에 있는 어느 작은 문화공간에서 우연히 몇 시간을 어울리게 된 자리에서였다.     


그녀의 이름은 교코恭子. ‘공손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도쿄에서 북쪽으로 차로 두어 시간가량 달리면 가닿는 사이타마 현에서 1963년, 2남매의 첫째로 태어났다. 그녀가 나고 자란 마을은 ‘히가시하라’라고 불리는 곳으로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농촌이었다. 논이 많은 곳이어서 마을 사람 대부분이 쌀농사를 짓는 한편 장사를 한다거나 직장에 다닌다거나 하면서 다른 일을 병행했다. 그녀의 부모님도 농사를 지어가며 어머니는 하루에 5시간가량 일을 하는 공장엘 다니셨고, 아버지는 10년 넘게 우동집을 하셨다. 중학생 때부터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간호조무사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 후 졸업할 때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다. 이후 마을을 떠나 간호사 자격증이 주어지는 간호전문학교에 들어가 해당 과정을 마치고 간호사로 일하다가 서른세 살이 되던 해인 1996년, 한국의 남도로 이주해왔다. 외국에 나가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국제결혼을 주선했고, 그녀보다 한 살 위인 지금의 한국인 남편을 만나 그의 고향인 이곳, 전라남도 장흥으로 와서 여태껏 살면서 네 아이를 낳아 길렀다. 그동안 딱 네 번 일본 땅을 밟았다. 그녀의 국적은 여전히 일본인데, 아마 앞으로도 죽 그럴 것이다. 어릴 적부터 불리어 온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굳이 바꿀 이유가 없는 것처럼, 그녀에겐 국적도 이름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고개를 넘어 지금에 이르렀지만 20년 넘게 이국땅, 그것도 작은 농촌 마을의 오래된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게 녹록할 리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 오고 한 5년간은 무엇보다 언어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그나마 5년쯤 지나니 말이며 글이 조금씩 눈과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한글을 어느 정도 익힌 이후에는 책을 좋아해서 지역에 있는 한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3년간 자원 활동을 하며 지내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면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어머니는 종교가 없는 분이었지만 딸이 종교를 매개로 하여 한국 남성과 결혼해서 한국에 가서 살겠다고 했을 때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딸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녀를 믿고 일관되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던 어머니는 줄곧 사이타마 현의 고향집에서 지내다가 8년 전,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녀에게 삶의 지표가 되어준 소중한 분이다. 


한편 ‘이주민’으로 살아오면서 미묘한 차별의 기운과 맞닥뜨릴 때가 종종 있는데, 이럴 때도 힘들다고 느낀다. 가령 오래 전에 한국으로 이주해 와 이곳에서 20년 넘게 살아오고 있건만 아직도 그녀가 태어난 나라 이름을 거론하며 자신을 ‘어디 사람’이라고 부를 때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녀는 ‘일본 사람’이라기보다 ‘일본에서 온 사람’일 뿐인데, 그녀의 다양한 정체성 가운데 한 가지만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명칭을 적용하여 ‘어떤/어디 사람’이라고 규정짓고는 고착된 관념 속에 그녀를 가두어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에 저항감을 느끼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단순히 이주민이 포함되어 있는 가족을 구분 짓기 위한 호칭으로 들리기보다는 ‘다문화 가정’이라는 특정한 말 속에 고정된 이미지를 주입하여 대상화한다는 느낌이 든다. 고유하고 다양한 개개인의 특성과 정체성이 차이 없이 뭉뚱그려지고 획일화되어 한 테두리 안에 팽개쳐지는 느낌이랄까. 이런 ‘부름들’ 앞에서 알게 모르게 차별 받고 있다는 인식이 돋아나곤 하는 것이다.


다행히 자신처럼 일본에서 온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교회에서 꾸준히 만나게 되면서 한국에서의 삶에 활기를 보탤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하루나마 굳이 서로가 이주민임을 의식할 필요 없이 일본어를 맘껏 나눌 그녀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일요일이 되면 꼭 교회에 간다. 무엇보다 신의 존재를 믿거니와, 이 속에서 안도감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기에 살아가는 일의 굴곡 앞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현재의 삶이 마냥 만족스럽진 않지만 신에게 의지하며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평등이라든가 조화와 화합 같은 가치를 일구는 이상적인 삶을 변함없이 꿈꾸고 있다. 간호학교 시절, 마더 테레사 수녀의 모습을 처음 접했던 그 무렵부터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힘이 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왔다. 아직은 이 꿈을 현실 속에서 한껏 톺아내고 있진 못하지만 자신이 비교적 오랫동안 간호사란 직업을 가졌던 것도, 수십 년 동안 신앙 속에서 묵묵히 일상을 일궈온 것도 젊은 시절, 저 꿈의 단초가 가늘게나마 현실로 이어진 까닭이라 믿고 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작년 5월부터 주간노인보호센터에서 주 5일, 어르신들을 돌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생활을 꾸리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때이지만, 10년 후쯤이 되어 이런 저런 역할에서 놓여나고 나면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꿈꿔온 것들을 본격적으로 실현해보고 싶다. 


인터뷰를 위해 나는 두 번에 걸쳐 따로 그녀를 만났다.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어느 인적 드문 포구 한쪽에서 드넓은 바다로 나갈 날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정박 중인 녹슬지 않은 한 척의 작고 다부진 배가 떠오르곤 했다. 20여 년 전, 용감하게 이 한국이란 나라에 닻을 내릴 결심을 하고 왔던 것처럼 언젠가 때가 되면 그녀가 인연이 닿는 어딘가를 향해 사뿐히 출항할 수 있기를. 바라온 대로 여러 거처에서 만나게 될 아픈 이들에게 의지와 힘이 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동시에 그들에게서 에너지를 얻게 되기를. 그녀 말대로 사람들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사람들은 대체로 그들 자신이 그런 것처럼 타인들도 고통 없이 평등하고 조화롭게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며 살아가길 바란다고 믿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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