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서비스 기사도 노동자다_양용민 休서울이동노동자 북창쉼터 사무장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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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전라남도 신안군에는 ‘천사의 섬’들로 불리는 1004개의 섬이 있단다. 양용민 사무장은 그 가운데 팔금도라는 섬에서 나고 자랐다. 그이를 처음 만난 건 休서울이동노동자쉼터 개소 1주년을 기념하며 토론회를 한 날이었다. 그날은 여느 토론회와 달리 어깨가 딱 벌어진 ‘깍두기 머리’를 한 아저씨들 몇몇이 나타나 고성과 폭력을 행사하며 훼방을 놓아 분위기가 살벌했다. 그때 누구 편(?)인지 쫌 아리까리하게 생긴 아저씨가 굳은 표정으로 왔다 갔다 했는데 그이가 양용민 사무장이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그이는 순박한 동네 옆집아저씨 같은 사람이었다. ‘아비 없는 자식’이란 말을 듣지 않으려고 어린 시절 ‘조신하게’ 살았지만 불의 앞에선 눈 감지 못했던 그이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퀵서비스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이동 노동자들의 쉼터지기를 하기까지 여정을 톺아보았다.


인터뷰·정리 : 이진훈 쉼표하나 회원


도입사진.JPG

 休서울이동노동자 북창쉼터 양용민 사무장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내주어라


전라남도 신안 낙도 외딴섬 아주 가난한농가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늦둥이로 태어나 형님 누나들과는 나이 차이도 꽤 많이 납니다. 신안군에는 무인도를포함해서 1004개의 섬이 있답니다. 그래서 천사의 섬으로도 불려요. 그 중에 팔금도라는 섬에서 나고 자랐지요. 유년시절에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나름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축구도 하고 전쟁놀이도 하며 시간가는줄 모르고 지냈던 것 같아요. 공부도 잘했지요. 겨울방학 때마다 우등상을 받았으니까요~(웃음) 


아버지는 직업이 목수셨는데 돈을 벌기위해 평양까지 가서 집을 지었다고 해요.그리고 천주교 신자셨죠. 아침에 일어나면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기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어른거려요. 일찍부터 일을 너무 많이 하셔서인지 혹독한 노동의 대가로 얻은 지병 때문에 가난한 집안의 강인한 가장 모습은 아니었어요. 더군다나 막내인 제 눈에는 기력이 노쇠한 할아버지에가까운 모습이었죠. 방안에서 주로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자랐어요. 제대로 드시지못한 아버지는 폐가 안 좋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병마에 시달리시다 변변한 병원치료도 못 받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말씀이 없는 분이라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그리 많지가 않아요.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내주어라’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가끔 하셨는데 지금도 왜? 라는 반문이 듭니다. 일찍 철이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아비 없는 자식’이란 말은 듣지 말자고 다짐을 했죠. 아마도 자존심이 강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성장기를 겪는 동안 집안 살림은 모두 어머니가 책임지다시피 하셨어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셨던 거죠. 형님과 누나들은 다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보겠다고 상경해서 돈 번다고 떨어져 지냈지요. 그래서 방학 땐 또래 사촌들이 많은 비금도에 가서 지내곤 했죠. 비금도라는 곳은 목포에서 배로 약 2시간 정도 거리로 섬초(시금치)가 유명한 곳으로 부모님의 고향이었죠. 그래서 사촌과 이종사촌이 많아요. 집안 선산이 있어서 해마다 형제들하고 벌초도 하고 낚시도 하고 여름휴가 겸 형제간 회포도 풀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팔금도는 목포에서 약 40분 정도 배를 타고 가는 거리고요. 그곳에서 중학교 때까지 보냈고 고등학교는 목포로 유학 왔죠. 그 당시 배 타고 육지로 와서 학교 다니는 것을 빗대어 해외유학이란 표현을 농담처럼 썼지요. 


방황했던 사춘기, 그리고 광주


어린 시절 저도 예외 없이 개구쟁이였지요. 싸움이든 공부든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했죠. 예를 들어 이번 중간고사에서 1등을 못하면 다음 기말고사에서는 꼭 1등을 해야만 하는 성격이었어요. 싸움은 또래 동창들보다는 선배들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특히 축구하다가 많이 싸웠죠. 축구 경기 특성상 몸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진짜 싸움으로 번지곤 했죠. 


초등학교 때부터 훌륭한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비록 작은 규모의 대회지만 우승도 하고 최우수선수상도 받았죠. 그 당시 전국적으로 축구와 레슬링이 인기 스포츠였는데 차범근 선수와 김일 선수는 저에게도 우상이었죠. 차범근 선수 등번호가 11번이어서 저도 센터포워드를 했고 11번을 달고 뛰었습니다. 나중에 차범근 선수처럼 뛰어난 선수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차범근 선수가 다녔던 서울의 축구명문 경신고등학교를 진학하기로 결심했죠. 그러나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어요. 큰형님이 8남매 중에 너라도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을 가야 한다고 강력히 만류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축구를 포기하고 목포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게된 거예요. 그런데 그 학교에 정식 축구단은 없었지만 학생들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축구부가 있어서 선수로 뛰었어요. 학교에서 정식으로 지원해 주지 않았지만 다른 학교 축구부랑 시합도 하고 자체적으로 룰을 정해서 운영했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땐 나름 열심히 공부는 했어요. 집안 어렵다고 장학금도 받고 그랬으니까요. 고2때 사춘기를 겪으면서 1년 동안 방황했죠. 지금도 가끔 친구들 만나면 고1때와 고3때 친구는 흔히 말하는 범생이들인데 고2때 친구들은 요즘 하는 말로 좀 노는 친구들이었죠. 당시 목포 모 극장 앞에 중화요리집이 있었는데 거기 2층에서 목포 각 고등학교 짱들이 모여서 조직 결성을 했죠. 그리고 같이 어울려 다니며 시내 활보도 하고 패싸움도 하고 목포 근처 유원지 식당에 가서 밤새 노래 부르며 놀기도 하고, 공부하기 싫어 가출도 하고요. 그렇다고 선량한 학생을 괴롭히거나 돈을 빼앗지는 않았어요. 우리 학교 누가 다른 학교 누구한테 맞았다더라 하면 쫓아가서 해결하고, 그런 과정에서 학교끼리 집단 패싸움도 했던 거죠.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스스로와 약속했던 일이 떠올랐죠.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요. 그래서 고3때는 다시 맘 잡고 공부에 집중했어요. 그러나 1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쉽게 성적이 오르지 않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성적이 안 된 거죠. 그래서 광주에 있는 모 대학 1학년 1학기 다니다가 형편도 안 되고 적성에도 맞지 않아 자퇴해버렸죠.


학창시절 또 하나의 변곡점은 광주민중항쟁을 접하면서부터지요. 군부독재정권 퇴진을 담은 〈울라송〉과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노래들이 선배와 친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불리어졌던 것 같아요. 1980년 5월 어느 날 선배들이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가더라고요. 그게 광주로 가는 트럭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요. 광주 이야기를 선배들을 통해서 많이 들었어요. 전두환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한다는 얘기들•••. 처음엔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유언비어인 줄만 알았어요. 그런 엄청난 일들을 사실대로 전해주는 신문사, 방송사는 없었으니까요. 직접 다녀온 선배들 말을 통해서 이 어마어마한 사건이 사실인 줄 알았던 거죠. 〈오월가〉에 나오는 가사들 중에 참혹한 장면을 묘사한 부분들이 모두 거짓 없는 사실이었던 거예요. 광주 선배들 중에 김 아무개 소식 들었냐고 지금도 가끔 물어보곤 하는데 5월 민중항쟁 때 실종되어 아직까지 오리무중으로 실종자 처리 되었다는 겁니다. 참으로 아픈 비극이죠. 두 번 다시 군사독재정권이 국민을 죽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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퀵서비스노동조합 활동할 당시 비정규직 투쟁 기자회견


전태일을 만나다


그 후 서울에 올라와 8남매를 키우느라 고생만 하신 어머니를 위해 자수성가해서 효도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죠. 작은 누님이 남대문 재래시장에서 숙녀복 도·소매업을 하셨어요. 지금도 그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경기가 안 좋아서 자리만 지키는 정도라고 해요. 또 직접 옷 만드는 공장을 운영해서 군대 가기 전 알바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됐죠. 이것저것 심부름도 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시다였어요. 심지어 새벽에 팔 옷이 다 떨어지면 짐자전거에 옷을 싣고 갖다 주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퀵서비스를 하게 된 건가요.(웃음)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게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을 읽게 됐죠. 본인도 어리고 어렵고 힘든 시기였는데도 같이 일하는 어린 시다들에게 자신의 차비로 빵을 사주고 10리가 넘은 길을 걸어 다니며 출퇴근하고 노동 조건을 개선해보겠다고 바보회를 결성해 노동청에 찾아가 장시간 노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독해달라고 따지며 애쓰는 모습이 20대 초반에 가능했을까? 1970년 당시에는 12시간 이상 일 시키는 게 비일비재했다는군요. 결국 스물세 살이던 해인 11월 13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한 사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지금 그 나이면 한참 친구들과 놀며 미래를 설계할 나이인데 분신을 통하여 훗날 많은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던져준 고귀한 열사 정신에 그저 놀랍고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영향도 있었지만 당시 자장면 값이 300원 정도 할 때였는데 재단사 월급은 무려 30만 원 이상 받았었지요. 꽤 많은 월급을 받는 기술자였죠. 그래서 나도 재단 기술을 배워 재단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공장 재단사에게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온갖 심부름이나 잡일을 하며 밤마다 하나씩 배워나갔지요. 그리고 군대 갔다 와서 재단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죠. 나이가 어린 재단사를 안 받아주려고 해서 나이 먹어 보이려고 일부러 머리도 길게 기르고 양복만 입고 다녔어요. 그렇게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하면서 받았던 첫 월급이 55만 원이었죠. 첫 월급은 어머니에게 대부분을 드렸고요. 


그렇게 재단사로 직장을 다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직장생활보다는 낫겠다 싶어 봉제공장을 차려 직접 운영했어요. 공장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작지만 빌라도 사고 차도 사고 그랬죠. 젊어서인지 바쁠 땐 새벽 한두 시까지 일해도 피곤한지 몰랐지요.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어요. 1997년 IMF 금융대란이 일어난 거죠. 수출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내수경기도 악화됐는데 특히 의류, 섬유시장은 직격탄을 맞았지요. 저 또한 12명의 공장 식구들을 내보내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버텨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감당이 안 됐어요. 그렇게  한두 명씩 내보내다가 결국 공장 문을 닫았죠. 그런 과정에서 이혼도 하게 됐어요. 막내아들이 일곱 살 때였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나쁜 일들만 생겨 앞이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제 인생의 첫 위기였지요. 특히 애들에게 나름 최선을 다해 엄마 없는 빈자리를 채워주려 노력은 했지만 많이 모자랐죠. 그래도 별 탈 없이 커 준 애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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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오토바이 준법투쟁 행진


퀵서비스 부르신 분!


공장 문을 닫고 3개월 동안 매일 술에 찌들어 방황했던 것 같아요.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고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세상 돌아가는 게 내 의지와는 많이 다르다는걸 깨달은 거죠. 그렇게 자포자기 생활을 하던 1998년 겨울 어느 날이었죠. 가슴에 있는 울화를 어떻게 삭힐까 고민하다가 퀵서비스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에게 놀러 갔는데 그때부터 퀵서비스를 하게 됐죠. 남들은 엄동설한 겨울에 퀵서비스 일을 하게 되어 힘들겠다 생각하겠지만 결코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슴에 있는 응어리를 찬바람에 날려 시원하다는 느낌이었지요. 


3년 정도 퀵 기사로 일하다가 퀵 사무실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죠. 당시 지입 형태가 정액제로 업주한테 하루에 만 원 꼴로 월 30만 원만 내면 나머지는 모두 내 수익으로 위험한 일치곤 짭짤했어요. 일하는 방식은 퀵 사무실에서 삐삐가 오면 기사가 퀵 사무실로 전화해서 오더 받고 일을 했죠. 그때만 해도 시내에서 강남까지 퀵서비스 요금이 기본 만 오천 원 정도였으니까 10건만 해도 15만 원 정도는 벌었어요. 빡세게 일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데에는 큰 지장 없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도 안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막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입이 감소한 만큼 퀵 기사들의 불만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여러 가지 명목을 붙여서 중간착취가 심해졌죠. 진입장벽도 없다보니 면허증과 오토바이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업주들은 관련법이 전무하다는 이유로 현재는 정률제를 적용해 건당 23퍼센트의 살인적인 수수료를 받아요. 일하다 사고 나도 보호 장치가 없다는 것은 큰 문제죠. 


모래알 같은 퀵서비스 노동자들이 모여


도저히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싶어 2007년 3월에 노동조합을 만들었어요. 52명의 조합원이 퀵서비스 노동 조건을개선해 보고자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조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초대 집행부가 전원 사퇴하고 맙니다. 물론생계에 지장도 있고 생각만큼 노조 가입도 저조해서 힘들었을 겁니다. 아무튼 열악한 상황을 반전시켜보려고 민주노총 임원들을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한남대교를건너서 노들길을 경유해 국회 정문 앞까지오토바이 12대로 행진을 했죠. 경찰 2개중대가 앞을 막고 국회 진입을 못하게 했지만 결국 오토바이 2대가 들어가서 퀵서비스의 열악한 상황과 요구안을 담긴 문서를 전달했어요.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당시 도로교통법은 이륜차를 서자 취급했죠. 한남고가가 일자고가로 전혀 위험하지도 않은데도 이륜차 통행을 막았죠. 그래서 1인 시위도 하고 용산경찰서 서장 면담도 하고 그렇게 투쟁하면서 통행금지 구역을 이륜차 통행구역으로 바꿔냈지만 조직 확대는 시원찮았지요. 


그 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노조 위원장을 맡아 2008년부터 2013년까지 6년 동안 선봉에 서서 많은 투쟁을 했지요. 그때 퀵노조가 요구했던 게 노동자성 인정하라, 노동3권과 노조할 권리 보장하라, 산재보험 전면 적용하라, 이륜차 통행 제한 해제하라, 표준 운임 적용하라 등이 큰 요구안이었지요. 17만이나 되는 퀵 노동자들이 뭉쳤으면 진작 해결되겠지만 그게 그리 쉽나요. 그래서 매년 노동절에 퀵서비스노동조합 조합원과 퀵 기사들을 조직해 오토바이 준법투쟁 행진을 했는데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약식집회를 하고 광화문을 걸쳐 국회를 돌아 시청까지 준법투쟁 행진을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했다고 봅니다.


그 후로도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다란 심정으로 산재를 부르짖었더니 결국 이명박 독재정권으로부터 2012년 5월 1일 노동절, 반쪽짜리지만 산재보험을 쟁취했어요. 성과를 떠나 조합원들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동기가 되었죠. 그렇게 투쟁과 홍보를 열심히 했지만 모래알 같은 퀵 기사들을 노동조합으로 이끄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조합원이 많지 않아 노조를 운영하는데도 애로가 많았습니다. 노동절에 참가한 조합원들한테 김밥과 생수도 나눠주고 깃발도 달아 주고 해야 하는데 노조비가 턱없이 모자랐어요. 그래서 퀵 기사들과 상생을 도모하는 퀵 업주들에게 협조를 구했지요. 그렇게 해서 집회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죠. 저는 퀵 업주가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퀵 업주도 퀵 기사들 처지와 별반 다를 게 없거든요. 대부분 퀵 기사 출신에다 마찌꼬바와 다름없는 사무실에서 여직원 한 명 두고 운영하는 데가 태반이죠. 진짜 사업주는 퀵 프로그램 회사와 공유그룹 그룹 장들인 거예요. 퀵 기사들과 퀵 사무실은 서로 상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관계인데 퀵 프로그램이 접목되면서 퀵 기사와 퀵 업주 모두 을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플랫폼 4차 산업이 가져온 폐해인 거죠. 


그렇게 6년 동안 위원장직을 맡아 노조 일을 하다 보니 한계가 오더라고요. 애들 교육비와 살림하는데 고통을 겪어 집을 팔아서 여유가 조금 생겼지만 생업과 노조 활동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상근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제 가정 경제도 어려워지고 해서 결국 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생업에만 전념하게 됐죠. 퀵 기사도 하고 오토바이 정비소도 하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아 가는 도중에 미련을 못 버리고 퀵 기사들을 다시 조직해보자는 생각에 강남에서 상조회 겸 쉼터를 만들었어요. 규모는 작았지만 지금의 이동노동자쉼터와 같은 역할을 했어요. 컵라면도 비치해서 점심 못 먹은 기사에게 주고 교통사고 나면 상담도 해주고 노조 가입도 시키고 대규모 체육대회도 열어 단합을 다지기도 하고요. 말이 통하는 업주들한테 기사하고 퀵 사무실하고 상생 한번 해보자고 설득해서 쉼터 운영하는 경비를 보조 받아서 운영을 했죠. 그렇게 8개월을 운영했는데 퀵 사업주들이 지원을 못해주겠다는 거예요. 쉼터를 중심으로 상조회도 만들었는데 상조회비도 8개월 동안 천만 원 넘게 모았지요. 쉼터를 할 수 없게 되고  상조회 정관에 1년 전에는 회비를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어길 수 없어 결국 쉼터와 상조회를 접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많이 아쉽단 생각이 듭니다.


깃발.JPG

퀵서비스노동조합 위원장 시절 만든 깃발


부러지고 깨지는 퀵서비스 기사


저도 큰 사고 경험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1999년 3월 중순이었어요. 군포에 있는 부곡 물류터미널이라고 규모가 제법 큰 물류터미널이 있어요. 물류창고가 A동에서 F동까지 있는데 창고 옆 도로가 거의 활주로 수준이에요. 입구에서 제일 먼 F동에 물건을 갖다 주고 나오는 길에 내달렸죠. 어스름한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었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속력을 낸 거죠. 물류터미널을 거의 빠져 나왔을 때 갑자기 오토바이가 붕하고 공중에 떴죠. 그곳이 오르막경사가 진 곳인데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속력을 내 버린 거죠. 추락하는 건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요. 오토바이와 함께 100미터 넘는 거리를 날고 추락하며 부상을 당한 겁니다. 119 구급차에 실려서 산본에 있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고나니 거의 미라처럼 온몸을 붕대로 감아 놨더라고요. 다행히 골절상이 아니어서 병원에 오래 있지는 않았어요. 그 사고 후론 안경은 뿔테만 껴요. 사고 당시 금속테 안경을 꼈는데  미간을 긁혀서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어요. 이게 흔히 하는 말로 ‘자뻑’이라고 혼자서 나가떨어져서 다친 사고다 보니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하고 산재보상도 받지 못했지요. 


또 한 번은 교차로에서 신호를 받아 출발하는데 택시가 신호위반을 하고 오는걸 보지 못해서 그대로 충돌했어요. 택시 앞 유리를 뚫고 조수석으로 떨어졌지요. 병원에 실려 가서 처치와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죠. 저 뿐만 아니라 퀵서비스 기사들 중 크고 작은 사고 경험은 한번쯤 다 있을 겁니다. 제가 위원장할 때 조합원이나 퀵 기사들 사망사고로 벽제 화장터를 다섯 번이나 갔어요. 1년에 한 번 꼴로 사망사고가 있었던 거죠. 그 사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의 가정사가 다 보이잖아요. 참 딱하고 짠한 경우도 많았죠. 하루 빨리 근본적인 보호 장치가 마련돼야 합니다. 퀵서비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리 잡은 지 30년이 됐는데도 관련 근거법은 전무합니다. 창피할 노릇이죠. 국회, 청와대, 관공서, 회사, 학교할 것 없이 급할 때 전 국민이 이용하는 퀵서비스인데 무법이라는 건 국가적으로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보고요, 시급히 온전한 대책과 산재보험이 전면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길 위의 노동, 그리고 쉼


그나마 지방 정부(서울시)에서 퀵서비스 기사들을 위한 이동노동자쉼터를 만든다고 하면서 수탁기관인 서울노동권익센터로부터 저에게 자문 요청이 왔습니다. 2016년도에 이미 대리기사 중심의 서초쉼터를 개소한지 일 년 만에 퀵 기사 중심의 쉼터를 만든다는 거죠. 한편으론 참 다행이란 생각을 했죠. 이제 퀵 기사들도 업무 대기 시간에 빌딩 옆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고, 언제든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했습니다. 이런 공간이 꼭 필요했거든요. 이동 노동자라고 쉴 때도 길거리에서 쉬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필요한 상담이 있으면 상담의 공간으로, 업무 관련 교육이 있으면 언제든지 교육할 수 있는 장소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업무 정보도 공유하면서 친목도 도모하고 동료 간 유대감도 키우는 장소로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또한 그동안 익힌 노하우를 알려주면 퀵 기사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쉼터에서 상근하게 됐죠. 나이 50이 넘어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이동 노동자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떳떳한 직업인이 되는데 일조한다는 심정으로 일하게 됐죠. 홀대받고 외면 받아도 쉼터에 와서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고, 이동 노동자들도 사회구성원으로서 권리도 찾고 특수고용노동자들도 노동조합 설립신고필증도 받아서 당당하게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퀵 기사와 이동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쉼터로 자리매김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활동들을 꾸준히 해 나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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